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80화 (280/489)

◈ 280화. 제로부터 시작하는 (4)

늘 빠지지 않는 자신감에 더해.

총대장이라는 직책의 무게감까지.

덕분에 오만하게 내뱉었지만.

‘나라도 잊지 말자, 주제 파악.’

나는 그동안 수많은 중간 과정을 건너뛰어 왔다.

[천적관계]를 앞세워 사냥한 고레벨 악마를 통해 수급한 경험치도 무지막지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거품이 잔뜩 낀 위치에 걸맞는 경험을 쌓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문답무용.

마법으로 끝내버리는 건 자제하자.

명심해야 한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여러모로 서럽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그동안 타 클래스에 관한 정보 수집을 외면했던 나였다.

대충 듣기만 하더라도 심각하게 배가 아파졌거든.

허나, 총대장의 무게란 무엇인가?

구성원의 장단점을 파악해 그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피지기. 다른 플레이어의 클래스에 관한 지식도 겸비해야 할 터.

‘하여튼, 뭐든 떠맡으려는 게 문제라니까?’

그 바람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었다.

천민캐를 넘어서 플레이어의 기억 속에서도 잊힌 클래스, 악마 사냥꾼으로서.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축복받은 클래스들의 직업 스킬을……!

──────

[선천적 마력 친화 (Master) : 마력의 소모 효율이 100퍼센트 상승한다.]

[마력 친화 특화 - 화염 (30%) : 화염마법 소모 효율이 130퍼센트 상승한다.]

[후천적 마법 재능 (Master) : 모든 마법 스킬 숙련도가 20% 추가로 상승한다.]…….

──────

저게 흔한 마법사의 스킬 목록이라니, 믿어지는가?

다시 떠올려봐도 억울하기 그지없다!

제시 같은 히든 클래스의 스킬창이라면 억울하지도 않았다.

나는 믿어지지 않아서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크샨 선배님들에게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어질 정도로.

‘……됐다. 말을 말자.’

물론, 그 양반들 성격에는 귓등으로 들은 척도 안 하겠지.

갑자기 웬 신세 한탄이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울며 겨자 먹기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결국, 악마 사냥꾼은 악마 사냥꾼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서클을 형성하고 초월자가 되었다고 한들.

하나에만 집중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뜻.

‘물론, 내건 마법이 아니라 기이긴 한데…….’

애초에 기이는 마법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전혀 다른 두 개념을 더하는 기이는 응용할수록 빛을 발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다행이다.

내 육성법이 틀리지 않은 듯싶었으니까.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81]

[능력치]

근력 : 166 / 민첩 : 165 / 마력 : 585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5

[보유 포인트 : 0]

누가 보면 무슨 이딴 망캐가 다 있냐 싶겠지.

근력, 민첩, 마력이 중구난방으로 성장한 잡캐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이 잡스러운 스탯을 활용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이 있다.

필요한 건 실전에 녹여낼 경험뿐.

‘그런 의미에서 헛되게 기회를 날리지 않는다.’

충분한 경험을 쌓게 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레벨을 훨씬 웃도는 스탯의 총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선택지는 의미가 없었겠군.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훈육을 택하다니. 보기보다 영특하구나.”

……찍?

워낙 커서 그런가, 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게 훤히 보인다. 그러나 방금도 말했듯.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부디 내가 얌전히 경험을 쌓는데 협조하기를 바란다.

[챔피언 도전자 거대쥐 : Lv.820]

네임드 몬스터답게 그 이름도 생김새도 다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거겠지.

녀석이 머리에 쓴 투구가 들썩거리기도 잠깐.

찍!

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신속한 발현.

“훈육 이전에 눈높이 교육이 우선이겠군.”

탐색, 간섭 과정은 어디에 팔아먹었느냐고 묻는다면.

말했다시피 건축마법이란 학파를 창시해도 될 정도로.

이런 발현엔 익숙한 나였다.

두둥실─

마치 크리스탈 홀 강단에 올라선 것처럼.

나는 솟구친 지반 위에서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또각─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물론, 진짜 허공이 아니다. 이 또한 마탑의 계단을 모방한 발현. 내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떠오르는 발판이 나의 행보를 떠받들었으니까.

지이이잉─

그 순간, 허리춤의 귀철이 공명했다.

하여튼, 누굴 닮아서 그런지 어디에서든 나서고 싶어 한다니까?

그러나 참아라, 귀철.

‘네가 나서면 훈육이란 선택지를 고른 이유가 없다.’

꼭 형태를 바꾸는 게 아니더라도 귀철은 [전설] 등급의 무기다. 『긍지의 검로』가 아니라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초리다.”

나는 읊조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다.

이 또한 마탑의 계단을 모방한 발현.

콰드드득─

내가 손을 뻗은 위치에 암석이 떠오른다.

한 뼘 더 손을 뻗자 암석에서 손잡이가 솟구쳐 나온다.

오직 폼생폼사를 위한 마력 지랄의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린다.

“바, 바위에서 검이 튀어나왔어!”

“설마, 총대장님의 신무기인가?!”

“세상에. 등장씬이 존재하는 무기라니……!!”

단순하게 바위에서 솟구치는 무기라니.

그렇게 말하면 이 순간, 소모되고 있는 마력들이 듣기에 섭하지. 오직 멋과 격식을 위한 이 행동에 얼마나 많은 마법이 발현되고 있는데……!

지반에 파묻힌 광물을 탐색.

광물을 허공으로 소환.

그 형태를 변형.

찰나에 화염, 빙결 마법을 동시에 가해 강도를 높인다.

불필요한 과정 끝에.

내가 이렇게 검을 손에 쥐게 되었단 말이다.

소모되는 마력?

막대하지만.

[첫 세계수의 축복]이 있으니까 너그럽게 넘어가겠다.

‘다른 수고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중에서도 화염과 빙결 마법을 동시에 발현하는 게 핵심이다.

서클을 형성할 때 섭취했던 영약으로.

속성 친화력을 높여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거든.

‘진짜 죽을 고생을 해서 가능한 짓이란 거지.’

그런 나의 발버둥을 단순한 아이템으로 착각하다니.

서운하기 짝이 없구나.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색은 할 수 없으니.

나는 고고하게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스릉─

정말로 고집도 이런 고집도 없겠지.

한탄을 삼키고 검을 치켜드는 순간.

메시지가 떠오른다.

[집념이 근력으로 환산됩니다.]

[집념이 민첩으로 환산됩니다.]

근력과 민첩, 마력.

마지막으로.

집념까지.

‘이런 느낌인가.’

모든 걸 물 흐르듯 운용하고 있는 이 감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니,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훈육이라 선언했지만, 어째 내가 더 배우고 있는 기분이군.

허나, 뻔뻔함은 어디 가지 않았으니.

“각오하거라, 작은 들짐승이여.”

나는 냉랭하게 선언했다.

“나의 가르침은 더없이 엄격할 것이다.”

*

제로 산맥.

거대 연합의 본진.

남철민은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수많은 화면에 떠오른 플레이어 시점의 앵글은 평소보다 정확하게 세 배가 많았다. 덕분에 투입된 분석관의 숫자도 평소보다 북적거릴 수밖에.

신규 분석관 중 하나가 싱글벙글한다.

“동시에 세 개. 그것도 동굴 공략이라뇨! 허접한 적정 레벨도 아니고 최소 800?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녹화분 떠서 보도자료로 뿌리고 싶다니까요?”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거대 연합.

거대 연합 초창기의 기세는 샤이닝과 천하통일이 쌓아온 아성을 가뿐히 무너트릴 정도였다. 하지만 연합을 구축한 자신들보다 천하통일이 먼저 치고 나갈 줄이야.

“이것만 보여주면 당분간 안티들도 잠잠해질 텐데.”

“안티?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당연히 신경 쓰이죠! 숫자도 꽤 되고요.”

남철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티라고 해봤자…….’

전부 천하통일 쪽 공작일 텐데 말이야.

천하통일의 개수작이야, 가온이 루키로 분류되던 시절부터 수도 없이 접해온 남철민이다. 척 보면 척이라는 거지. 덕분에 남철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그런다고 잠잠해질까 싶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잘나서 가능한 공략이 아니잖아? 모든 게 총대장님께서 시간을 내주신 덕분이니까.”

“아……. 그건 또 그렇죠.”

“그래도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 거대 연합은 이호열 총대장님과 함께 제로 산맥의 동굴을 공략할 정도로 긴밀한 사이라고…….”

“거참, 긍지 없는 발언이구만.”

“……흡. 그냥 다물고 있겠습니다.”

총대장님께 한소리를 듣기 전에.

신입들 예절 교육부터 철저히 해야겠는데?

남철민이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본격적인 공략 상황이 전달되어 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행동에 돌입한 건 남태민이었다.

-진형은 우리에게 유리해!

‘운이 따랐구나, 태민아.’

특별한 규칙이 적용되는 동굴이 아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숱하게 공략해왔던 던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형태.

“레벨 격차 때문에 공략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몹들 패턴이 단순해요. 그리고 워낙 출중하게 어그로를 끌어주고 계셔서 당분간 지원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동생, 남태민의 진가는 레이드에서 드러난다.

이성을 잃은 짐승과도 같은 움직임.

그 몸놀림엔 어떤 강적이라도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태민이의 체력이 받쳐주는 이상.’

특별한 지원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레오니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저쪽은…….

‘사실 극한상황이 아니고서야 지원이 불필요하지.’

광전사, 혈법사, 보우댄서 등등.

레오니의 파티는 대다수가 버서커 길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지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길드의 색채가 워낙 짙기 때문이었다.

남철민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시선을 떼지 말고 유심히 살피자고.”

“넵. 명심하겠습니다.”

태민이나 레오니.

두 사람 성격에 먼저 지원 요청을 해오는 일은 없을 거다.

상황을 판단하는 건 오직 자신에게 달린 일.

남철민이 적잖은 무게감을 떨쳐내려 어깨를 풀던 순간이었다.

“확실히 이쪽이 보통이 아닌데요?”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엔 히사기가 있었다. 과연, 가장 높은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동굴답게 특이한 규칙이 적용될 거라 예상은 했거늘.

“성소라고 했었지?”

“네, 정확하게는 작은 챔피언의 성소입니다.”

“확실히 다른 쪽하곤 분위기부터 다르네.”

화면으로 전해져 오는 압력.

스케일.

쏟아지는 몬스터의 수준까지.

전황을 지켜보던 분석관이 말꼬리를 흐린다.

“50레벨의 격차가 이 정도까지 클 줄이야…….”

남철민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레벨로 모든 걸 판단하던 때는 지난 건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적정 레벨만으로 난이도를 파악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뜻이야. 왜, 같은 레벨의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공략 난이도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뛰어난 분석력을 가지고 있어서 떠올린 게 아니다.

-적정 레벨도 스탯도 내겐 숫자에 불과하다.

그저 호열의 말을 곱씹다가 깨닫게 된 사실일 뿐.

물론, [산맥 지하 작은 챔피언의 성소]가 상상 이상으로 귀찮은 요소가 가득한 동굴이라도 해도 우려는 없었다. 히사기 측엔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이 있었으니까.

남철민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총대장님의 존재감은 더없이 크다.’

더없이 크기에 한편으로는 우려될 정도로.

왜, 아무리 동행 한다고 한들.

다른 이들이 호열의 뒤를 쫓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간격이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벌어질지도 모르지.’

허나, 남철민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호열이 내뱉었던 말에는 분명.

-내가 있으니 고민할 것 없다.

그런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수, 수석 분석관님!”

자신을 찾는 다급한 소리.

남철민은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봤다.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눈을 파고 들었다.

정확하게는 모니터 화면 속에.

“……?!”

찬란한 빛을 내뿜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플레이어의 시점으로 촬영된 화면.

때문에 그 정체를 특정할 순 없었다.

그러나 함께 송신되어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 여신님이다!!

……잠깐만, 여신이라면.

설마.

여신교단의 여신을 말하는 건가?

드륵!

남철민은 곧장 모니터 앞에 앉아 헤드셋을 착용했다.

그러고는 플레이어들에게 물었다.

성소에 여신이라니.

어쩌면 이건 공략보다도 중요한 정보가 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 분석관님?

“여신이라고 하셨습니까?”

-아, 네! 아무리 봐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일대에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버프가 발동 중이거든요……!”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고요?”

효과는 전해 듣지 못했지만.

세계수라니, 그 이름만 들어도 대단해 보이는 버프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 전개였거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 저길 봐!!

다시금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

전환되는 카메라의 시야.

이내, 모니터에 떠오른 호열의 자태.

또각.

또각.

또각.

호열이 계단을 수놓아 가며 허공을 거닌다.

놀랍지만, 처음 목격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 남철민을 비롯한 분석관들이 경악한 이유는.

“도, 돌에서 검을……?”

쿠드드득!

호열이 암석에서 검을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박학다식한 분석관들이다.

그러니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구체적이고, 그럴싸할 수밖에.

그런 남철민이 설마 하며 입을 열었다.

“에에에엑, 엑스칼리버……!!”

호열이 듣는다면 기겁할 소리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