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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79화 (279/489)

◈ 279화. 제로부터 시작하는 (3)

이나즈마.

이젠 거대 연합의 길드원인 토모요는 스태프를 굳게 쥐었다.

쥐구멍 같던 동굴에 진입하고, 베이스캠프를 설정한 지금.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후우─”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히사기 대장과 이호열 총대장님을 제외하면…….

다른 길드원들의 표정은 자신과 별다를 게 없었다.

무려 850레벨의 적정 레벨이다.

“언제나처럼 쉽지 않겠네. 그렇지, 토모요?”

“하하…….”

사내의 말에 토모요는 그저 웃었다.

농담을 주고받을 정신조차 없다.

토모요의 클래스는 [배틀메이지]. 마법사 계열 클래스면서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클래스의 특성상, 토모요가 느끼는 부담감은 적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어?”

“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배틀메이지의 이명?

귀족캐의 정반대 뜻을 가진 천민캐가 대표적이다.

천민 취급에 비하면 유리 대포라는 별명은 감지덕지.

무엇보다 납득할 수 있는 별명이었으니까.

사내가 말을 잇는다.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배틀메이지의 공격력? 상당하지. 파괴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마법계 스킬을 가까운 거리에서 정확하게 때려 박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레벨의 격차를 생각해 봐.”

토모요의 레벨은 475이다.

동레벨 대에서 걸출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토모요라고 한들.

800레벨이 훌쩍 넘는 거대쥐들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접근할 수나 있을까?

“정통으로 스킬을 적중시켜도 큰 피해를 줄 순 없을 거야. 그럼 그 반대의 경우에는? 냉정하게 몇 번이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토모요는 자신의 장비를 바라봤다. [마력] 스탯과 [마력 재생력]을 보완하기 위한 마법사용 천 방어구는 얇디얇았다.

“글쎄요. 운이 좋으면 두 번……?”

사내의 말대로 스치는 순간, 치명상.

어쩌면 첫 피격에 그대로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겠지.

토모요는 멋쩍게 말을 이었다.

“해주신 조언, 명심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고 있다.

이 순간.

이 자리에.

목숨을 걸지 않은 이는 누구도 없었다.

“제길, 새로운 장비만 착용할 수 있었어도.”

“어허,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

“아니, 변명이 아니라니까요?!”

사정이 없는 이도 없겠지.

그런 이들이 서로서로 위해 등을 맞댄 전장이란 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클래스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냐고?

‘진짜 솔직하게…….’

균열에 진입하고 몬스터와 마주할 때마다 후회했다. 근접전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매일같이 자책하다가 되돌아보니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을 뿐.

누군가는 사내처럼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해왔다고 생각해, 토모요. 배틀메이지란 클래스로 그런 레벨에 도달하다니. 진심으로 존경해. 엄청난 재능이야.”

토모요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청난 재능 덕분이라니.

인정하면 자신의 개고생을, 발버둥을 부정하는 꼴.

“사실 배틀메이지란 클래스만 아니었어도. 토모요, 너는 지금쯤…….”

동시에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꾹─

그럴 때마다 토모요는 스태프를 굳게 붙잡았다.

후회하면서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왔다.

그러나.

“빌어먹을……!!”

처음으로 그 고집이 꺾일 것만 같았다.

[성소를 지키는 파수꾼 쥐 : Lv.800]

사람, 서너 배 덩치의 쥐들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무려 800레벨.

아무리 일반 몬스터라고 한들.

한 마리를 처치하는 데만 하더라도 몇 명이 달라붙어야 할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수북한 털.

크기만큼이나 두꺼운 가죽.

마주한 순간, 의심이 싹튼다.

저런 괴물이 내 스킬에 움찔거리기나 할까?

혼란한 와중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점돌파!”

히사기 대장의 명령.

일점돌파 명령을 수행하는 건 근접 계열의 플레이어들.

선봉에서 어그로를 끌어 그를 통해 활로를 개척해야만 한다.

‘……따라붙어야 해.’

토모요가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척─

사내가 토모요의 팔목을 붙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너는 특별하잖아, 토모요.”

특별하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배틀메이지란 흔치 않은 클래스 덕분에 토모요는 전열과 후열.

상황에 따라서 자유롭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명령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말하지 않아도 난 충분히 냉정해.’

배틀메이지는 애매한 클래스다.

좋게 말해서 특별 대우지.

전열이나 후열에서도 애매한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 탓에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억울해서라도 고집은 꺾지 않겠다.

“나랑 같이 후열에서…….”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뭐?”

“후회하는 건 이미 익숙하거든요.”

토모요는 전열로 뛰쳐나갔다.

달리는 순간에도 손은 떨리고 있다.

언제나처럼 머릿속은 후회로 가득하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격변 따위에 굴복해서 과거의 선택마저 부정해버린다면.

대격변 이전의 삶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누군가는 무모한 고집이라 말하겠지.

“함께 길을 열겠습니다, 히사기 대장.”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토모요.”

“……말투가 달라지셨네요?”

“칭찬 고맙군.”

“……이게 칭찬인가요?”

그러나 동시에.

천민 클래스의 비애를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는 말하리라.

그것이야말로 마땅히 응답받아야 할 긍지라고.

응답이라.

인간의 처절한 발버둥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신이 아니고서야 그걸 알아차리고 응답할 수 있느냐고. 비아냥을 듣기에 딱 좋은 말이다.

그 말이 옳다.

“……어라?”

토모요는 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스쳐 가는 전직의 서약.

별생각 없이 읊조렸던 구절이 떠오른다.

──────

아르카나 대륙, 그 어떤 곳에도 여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지니. 그곳이 설령 쥐굴 속이라고 해도, 지옥이라고 해도, 여신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

꿈인가, 싶어서 입을 연다.

“……히사기 대장님, 보고 계세요?”

끄덕─

히사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다시금 묻는다.

“제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헛것을 보는 거 아니죠?”

끄덕끄덕─

히사기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인정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토모요는 넋이 나간 채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여신을 바라봤다.

찍찍찍!

거대쥐들조차 당황케 할 정도로 크다.

그 바람에 얼굴이나 자세한 형태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온기가.

그 기운은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이를 굽어살피는.

여신이 아니고서야 내뿜을 수 없을 정도로 온화했다.

동시에 전능했다.

말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냐고?

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으니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일대에 가득합니다.]

[생명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대폭’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기 충분하다는 뜻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버프야?”

“말도 안 돼……. 중급 포션보다 효과가 좋잖아?!”

“히사기 대장! 이런 버프라면……!!”

히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점돌파 명령은 철회하겠다. 지금부터는 전원.”

“……!”

“각개전투에 돌입한다.”

무려 800레벨.

몬스터 무리와 난전을 벌여도 승산이 있을 정도의 효과라는 것.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명확했다.

“여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실 때까지!”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고 했나.

사기적인 버프의 효과는 여신이 사라질 때까지 지속될 테니까.

따스한 온기 때문인가.

토모요의 팔다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 대신 의문이 들었다.

‘하필이면 지금……?’

사실 역경과 마주한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신께서는 이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신 걸까?

결론에 다다를 때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라진 건 오직 하나.

“……설마.”

총대장.

호열의 존재뿐이었으니까.

토모요의 시선이 호열을 향했다.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이 아니다.

위대한 여신의 자태 앞에서도 조금 위축되지 않은.

그저 한결같은 모습.

토모요는 경악을 삼켰다.

……정말로 여신님과 관련이 있으신 거야?!

*

왜,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기는 했다만.

하이엘, 굳이 너까지 나서서.

나의 초심까지 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뭐라고 말 좀 하든가.’

솔직한 감상으로는.

플레이어들이 하이엘을 여신으로 착각하는 것도 이상한 반응이 아니구나 싶긴 하다. 작은 정령일 때도 치렁치렁거리는 복장 때문에 정령왕으로 오해를 받던 하이엘이였거늘.

‘후광은 또 왜 이렇게 밝은 거래.’

거대한 몸집도 모자라 자체발광을 하니.

성스러워 보이기 그지없었거든.

화룡점정으로 그랑펠을 빼다박은 우아한 행동까지.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부모는 자식의 거울.

다 내 탓이오, 하고 넘기는 수밖에.

그제야 머릿속에 하이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감히 주군을 내려다보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주군께 해가 가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목소리를 내 주군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쥐굴에서 하이엘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영향을 받지 않은 이유까진 알 수 없겠지.’

단순히 계약 정령을 뛰어넘은 {고유 정령}이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하이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굴에 담기지 못할 존재가 되어버린 건지.

나로선 알 방법이 없다만.

“그럴 필요 없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인사를 이번에는 자제해 주면 좋겠구나. 특히나 하이엘에게 여신이라는 크나큰 착각이 덧씌워진 지금은 더더욱.

[첫 세계수의 축복이 일대에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버프 성능 한번 확실하다.

히사기를 필두로.

거대 연합의 플레이어들이 거대쥐에 맞섰다.

‘효과는 내가 보증하지.’

원조보다는 못하겠지만,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 향상 버프는 웬만한 포션을 들이켠 것보다 효과가 좋을 거다. 덕분에 목숨이나 부상을 걱정할 필요 없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을 터.

“스스로 깨우칠 수 있겠지.”

그놈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말이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레이드, 퀘스트를 플레이어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었으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단 거다.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들은 느려도 천천히 깨우치고 있었다.

“800레벨이면 어쩔 건데? 패턴이 뻔해!”

“스쳐도 치명상? 그럼 안 맞으면 되는 거잖아.”

“좋아, 한 마리!”

나는 그 모습을 진짜 총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흡족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총대장이라.

‘막중한 직책이네.’

근데, 흑역사의 원천.

클라우디 가문까지 인정한 마당에 총대장의 자리가 뭐가 대수겠냐?

무엇보다 떠맡게 된 이상.

대충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다짐했던 것처럼.

확실하게 하자고.

완급조절.

샤샤샥!

눈앞에 전투에 온 신경이 쏠린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내게는 여유가 있었다.

달라지는 공기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단 의미다.

나는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군.”

내뿜는 기세로 봐서는 800레벨은 가뿐하게 넘는 네임드 몬스터인 것 같은데 말이야. 말했다시피 멋지게 등장했어도 성의껏 상대해 줄 여유가 없다.

“아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 또한 총대장의 역할일 터. 그러니 그대들이 마냥 날뛰게 두고볼 수는 없겠구나. 산맥의 가냘픈 들짐승들이여.”

저 괴물들이 가냘프다니.

그랑펠식 화법에 흠칫하기도 잠깐.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 : 585]

동굴의 적정 레벨을 생각하면 빈약한 수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월자』도 모자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내게.

마력 스탯은 그랑펠의 말대로 숫자에 불과했으니.

나는 입을 열었다.

“허나, 그대들의 단잠을 깨운 것이라면 적절히 보상하겠다.”

……찍찍?

쥐조차 당황하게 하는 격식과 품위.

“둘 중 원하는 보상안을 선택하도록.”

그리고 흑역사에 물든 선택지를 들이밀면서.

“영원한 밤 혹은 잠투정에 관한 훈육.”

진짜 초심 한 번 제대로 되찾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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