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78화 (278/489)

◈ 278화. 제로부터 시작하는 (2)

플레이어의 상식이다.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러니 이호열, 그가 [은신]을 간파했다곤 믿을 수 없었다.

[은신 (Master) : 주변 환경에 몸을 숨긴다. 상대방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발각될 확률이 대폭 줄어든다.]

마스터에 다다른 은신의 스킬 숙련도.

그것도 모자라 설명에 ‘대폭’이라 명시되어 있다?

설령 제로 산맥 꼭대기에 사는 드래곤이라고 한들. 이쪽이 먼저 살기를 내뿜지 않는 이상에야 수백 미터 이상의 거리에선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을 터였다.

‘어그로 시스템은 다른 영역이니까.’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

기습 따위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사내와 특임대에게 적의 따위는 없었다.

‘절대 알아차릴 수 없어야 하거늘…….’

수많은 경험이 있기에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득 스쳐가는 생각.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흑암룡.’

드래곤조차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드래곤보다도 위대한 존재라면.

흑암룡이라면.

‘은신을 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흑암룡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판단을 내리는 순간.

사내는 자신들이 어떤 짓을 벌이고 있는지 자각하고 말았다.

“!”

흑암룡의 뒤를 밟다니……!

이건 예정에 없던 전개였다.

더 나아가서 군주를 위한 판단이기도 했다.

만약, 이대로 호열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 화살은 내가 아닌 주군에게 돌아갈 것이다.’

끄덕─

그러니 사내는 특임대를 향해 신호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작전상 후퇴다. 고작 거대 연합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흑암룡의 경고를 무시한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으니까.

스스스!

사내는 물러나며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금 자각했다.

이 순간, 자신이 목숨을 부지한 건.

흑암룡의 너그러운 자비 덕분이란 걸.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연락이 끊긴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됐을지도 모르겠지.

그들을 떠올리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방불명에 이호열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이호열이라면.

천하통일의 실력자들을 단시간에 제압하고도 멀쩡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사내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행보는 실시간으로 세계에 중계되고 있지 않았던가?

불과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기자들과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던 그다.’

포탈을 발현해 이동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호열, 그에겐 천하통일의 실력자들과 접촉할 이유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보통 그릇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뒷공작을 펼칠 이가 아니란 의미.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병력을 소집시킨 모습에 거대 연합을 의심했건만.

그 이유가 이호열 때문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왜, 군주를 성대하게 맞이하는 건 신하의 당연한 도리일 테니까.

덕분에 오리무중에 빠져버린 사고 회로.

사내를 일깨운 건 다름 아닌 진동이었다.

지이잉!

“……!”

행방불명되었던 이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도 집결지에 복귀했다는 소식이었다.

“뭐야, 대체?”

헛수고를 했다는 아쉬움보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군께서 접속기를 위해 제로 산맥에서 자리를 비우셨다고 한들.

주군의 명을 어기고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복귀하다니.

“오성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작태로군.”

주군의 공백을 완전히 채울 순 없겠지.

허나, 조금이라도 주군을 대신해.

규율 위반에 관한 책임을 물어야 할 터.

“신속하게 이동한다.”

사내와 특임대는 집결지로 향했다.

그곳에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태의 원흉.

그림자 용병단이 똬리를 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

찍찍!

다급하게 풀숲으로 사라지는 쥐 한 마리.

초심을 되살린다고 해서.

말투까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거늘.

주변 반응을 통해 내 주둥이의 파급력을 실감하게 된다.

“영원한 밤을 선사하시겠다니, 참으로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감격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마라, 히사기.

거기, 받아적는 사람은 또 누구냐?!

젠장, 벌써부터 이 동굴을 선택한 게 후회되기 시작한다.

‘필기 잘한다고 칭찬하고도 남겠지, 그랑펠 성격이라면.’

그런 말을 내뱉을 바엔.

차라리 외면하자.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로 시선을 회피했다.

[산맥 지하 작은 챔피언의 성소]

[적정 레벨 : 850]

[붕괴도 : 100%]

누군가는 묻겠지.

어째서 뜬금없이 쥐에 관한 속담을 들먹인 거냐고.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메시지의 작은 챔피언이라는 게 쥐를 말하는 거였거든.

“그 형태는 미궁과 유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히사기가 가리킨 곳엔 풀숲 속 쥐구멍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쥐가 드나드는 쥐구멍이다.

이런 걸 어떻게 발견했나 싶었는데.

히사기의 뱀눈을 보고 납득하고 말았다.

‘하긴 뱀이 또 쥐의 천적이긴 하지.’

히사기가 진짜 뱀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육체가 찰나지만 멈칫했다.

천하의 그랑펠이 멈칫거리다니.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거늘.

‘당연히 쫄아서 그런 건 아닐 테고.’

850레벨.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하긴 했다만, 그보다 더한 균열과 몬스터와 앞에서도 주눅이 들긴커녕 꼿꼿했던 나였으니. 결국, 그랑펠이 머뭇거린 이유는 하나뿐이리라.

‘하여튼 그놈의 옷매무새 집착은.’

작은 쥐구멍에 진입하다가 옷이 구겨지진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 간만에 인간미가 느껴지고 좋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고민의 방향성이 남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냐?

내 속내를 알 리가 없는 히사기가 말을 잇는다.

“다만, 동굴답게 특이한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진입하는 순간, 육체의 크기가 줄어들게 되더군요. 작은 쥐가 수 미터에 이르는 괴물로 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사이렌과 조우했던 [용암의 바다]에서도 느꼈지만, 제로 산맥의 동굴은 확실히 까다로운 요소가 존재했다. 동굴마다 레벨만으로는 공략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거고.’

레벨은 도화지 크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내가 아니던가?

어떤 경험을 통해서 도화지에 무엇을 그려내느냐에 따라 그려지는 결과물도 달라질 터.

그런 의미에서.

“그대들에겐 나쁘지 않은 도전이 되겠군.”

제로 산맥.

특히나 동굴에서의 경험은 플레이어들에게 큰 양분이 되겠지. 물론, 그대들에는 나 이호열도 포함이다. 그나저나 히사기의 말에 금세 머뭇거림을 떨쳐내다니.

‘몸이 작아지면 쥐구멍에서 낑낑댈 필요도 없겠지.’

의복이 구겨질 염려가 사라진 그랑펠에게 더는 두려운 게 없었으니.

나는 망설임 없이 쥐구멍을 향해.

동굴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히사기가 뒤따르며 말을 잇는다.

“저를 믿고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누가 들으면 내가 중요한 선택이라도 한 줄 알겠다.

내가 히사기의 동굴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하게 적정 레벨이 가장 높았으니까.

그러나 긍지에 전염되어서일까.

모든 행동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영락없이 그랑펠을 보는 것 같구나, 히사기…….

‘더 이상의 분신은 사양하고 싶다, 진심으로.’

나는 한탄을 삼키곤 발을 내디뎠다.

[‘산맥 지하 작은 챔피언의 성소’에 진입합니다.]

.

.

.

찍찍!

쥐 울음소리가 귀청을 떨어트릴 정도로 크게 울린다.

진입 메시지와 동시에 육체가 작아졌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나저나.’

괜히 성소(聖所)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로군. 쥐들이 쌓아올린 성소라 그런가.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지만, 확실히 경건한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여신교단 성지, 뮤온이 딱 이런 분위기였지 아마?’

쥐들의 성소와 여신교단의 성지를 비교하다니.

탈림이 듣는다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는데 별수 있나.

“웅장하군.”

무엇보다 거대한 규모가 엉성함을 압도했거든.

실제 크기는 별 볼 일 없겠다만.

작아진 내 시야에선 더없이 크게 보인다는 거지.

심미적 평가에 여념이 없는 나를 뒤로한 채.

히사기는 공략 준비에 돌입했다.

베이스캠프를 설정하고, 선후발대 역할을 구분하는 게.

이게 체계적인 공략이구나 싶다.

‘역시, 난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

예전처럼 솔플을 고집할 거라면 별 필요가 없는 지식이겠지만, 길드를 넘어서 성전 연합군까지 짊어지게 된 나였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오겠지.

준비를 끝마친 히사기가 말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행동에 돌입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미진한 점이 보이신다면 언제든 호되게 꾸짖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호열 총대장님.”

내가 꾸짖을 자격이 있어야 꾸짖지.

말했다시피 나는 파티나 길드 단위의 공략에 관해선 문외한이다. 그랑펠의 잘나신 설정 덕을 볼 수도 없는 게 플레이어 방식의 공략은, 아르카나의 전술과 명백하게 달랐으니까.

그러나 역시나 뻔뻔하게 지껄인다.

“그렇다면 지켜보겠네, 히사기.”

물론, 마냥 뒤에 물러서 있겠다는 건 아니다.

발버둥에도 완급조절이 있어야 하는 법.

막말로 정공법과 꼼수를 가리지 않는다면 적정 레벨 850 정도야, 나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내다봐야 할 건 한 치 앞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다.

‘나 혼자 나아가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경험치?

뭐, 재킷을 제대로 걸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꼭 이 동굴이 아니더라도.

내가 경험치를 획득할 수단은 차고도 넘친다.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적절하게 나서야 할 때는 나서고, 지켜봐야 할 때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말했다시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거든.

그런데…….

역시,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땅의 지하답군.

꼭대기의 드래곤부터 시작해서.

제로 산맥의 모든 건 레벨로만 판단할 수 없다.

십만 동굴도 마찬가지.

찍찍찍!

사방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울음소리.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거대쥐들.

“히사기 상! 이대론 대열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당연히 무의미할 수밖에.

집채만 한 쥐들이 사방에서 몰려오는데.

전열과 후열을 구분 지어봤자 전략적인 이득은 없으리라.

히사기가 창을 치켜들며 외쳤다.

“일점돌파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다.

사방이 뻥 뚫린 공간에서 방어나 난전?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밸런스가 맞지 않는군.

찍찍!

성소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기운.

아마도 이 동굴의 보스몹인 ‘작은 챔피언’의 능력이겠지.

성소 덕분에 거대쥐들의 사기는 급격히 상승한 상태 같았다.

‘홈팀 버프라는 건가.’

그에 반해 이쪽의 상황은 어떠한가?

현재 히사기의 레벨은 500레벨 중반이다.

동굴의 적정 레벨에 무려 300레벨이나 뒤처진 상태라는 것.

랭커인 히사기가 그런 상황인데, 다른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히사기도, 다른 두 사람도 진입하지 못했던 거겠고.’

한마디로 나의 전력을 믿고 있었기에.

거대 연합은 동굴의 공략에 돌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전력을 기울이는 게 당연하다.

물론, 꼭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만 최선이 아니잖아?

말했다시피 필요한 건 적당한 완급조절.

내 역할은 감독으로서.

홈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원정팀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거다.

그렇다면 일단.

‘귀찮은 버프부터 어떻게 해야 되겠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성소를 박살을 내서 홈팀에 찬물을 끼얹든가.

그게 아니라면 성소 버프에 버금가는 버프를 거대 연합에게 쥐여주든가.

어떠한 선택지가 최선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에게 절실한 건.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작은 챔피언이라고 했나?

이곳에서 신처럼 군림하는 모양인데.

이쪽에도 작지만 대단하신 존재가 있어서 말이야.

“하이엘.”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보조 능력에 특화된 하이엘이 능력을 펼치기에 적합한 전장.

이내, 나의 부름에 응답한 하이엘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잠깐만…….

뭐가 이렇게 크냐, 하이엘?!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설마, 플레이어가 아닌 {고유 정령} 하이엘에겐.

입장하는 순간, 작아진다는.

동굴의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은 건가?

“……!!!”

덕분에 가뜩이나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하이엘의 자태는 더더욱 고귀하고 위대해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자, 잠깐만……. 저게 뭐야?”

“후광이 너무 강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근데, 아르카나에 저런 존재는…….”

“서, 설마……. 여, 여신님 아니야……?!”

뭐라고 여어어어시시이이이인?!

설마 하이엘을…….

아르카나 대륙, 최대 종교.

여신교단의 여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지금?

‘얼굴이 안 보여도 그렇지, 여신이라니.’

그나저나 넌 또 왜 듣고만 있냐, 하이엘……?

아무리 그랑펠의 분신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뻔뻔한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잖아.

아니, 그 여신처럼 온화한 미소는 또 뭔데?!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