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제로부터 시작하는 (1)
수치심 풀 충전.
기이 탐구를 운운하며 결국, [용군주, 흑암룡 이호열. 세상을 향해 울부짖다]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고야 말았다.
‘저건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어야만 한다.
끝없이 중얼거린 덕분일까.
이성을 되찾고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인터뷰를 평가할 수 있었다.
‘얼굴에 금칠을 아주 그냥……!’
다시 들어도 틀린 말은 없다.
다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그지없을 뿐.
특히나 흑암룡이 일부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덕분인가.
-설마 아직도 뭘 숨기고 있는 거임??
-ㅋㅋㅋㅋㅋ그러고 보면 아직 클래스도 안 깠잖아
-용기사 위에 용군주 클래스 있는 거 아닐까??
-ㄹㅇㅋㅋ
클래스부터 시작해서 커뮤니티엔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게시글을 보고 있자니.
어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플레이어로 각성하자마자 아스큐라 백작을 처치했던 그 시절로.
그래도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쏟아지는 과대평가의 수준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어떤 위치에서도 초심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지.”
화법도 초심.
포장의 수준도 초심 그대로구나, 그랑펠.
하지만 인터뷰.
아니, 그놈의 기이를 탐구하는 데 소모된 시간이 적지 않거든?
나는 서둘러 제로 산맥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포탈의 좌표는 제로 산맥, 거대 연합 주둔지.
“!!!”
갑자기 나타난 포탈.
그 포탈의 빛 무리 속에서 내가 모습을 드러내니.
거대 연합의 플레이어들은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확장된 동공, 벌어진 입, 멈춰버린 행동.
찰나의 정적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직.
-용군주 흑암룡 이호열. 역사에 남겨질 이름입니다!
……플레이어들의 스마트폰에서 재생되는 나에 관한 이야기뿐.
예상했던 바였지만, 역시나 고통스럽구나.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색할 수 없으니.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난 모양이로군.”
“……아앗!”
나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돌아오는 목소리.
남철민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다급히 다가왔다.
‘초심을 되찾자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가.’
첫 균열에서 알게 됐던 남철민.
그와 다시금 얼굴을 맞대고 있자니 초심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금연 중이라고 했나.
확실히 그때보다 안색이 훨씬 좋아 보이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대장님!”
하여간 그놈의 총대장님은…….
‘호열 씨가 담백하고 좀 좋아?’
서로 간의 호칭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거늘.
그때와 다르게 짊어진 게 워낙 많은 나였다.
사실 흑암룡에 비하면 총대장은 양반이지, 진심.
감지덕지라 여기며 묻는다.
“제로 산맥의 공략 상황은 어떠한가?”
“총대장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속도를 내서 산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로 산맥이 워낙 방대한지라…….”
“이해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땅이니.”
위로하려는 빈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적정 레벨은 있을지 몰라도 제로 산맥에 공략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충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는 있지.
십만 개의 동굴, 십만 동굴.
현재까지 거대 연합이 발견한 동굴의 숫자는 8개였다.
내가 발견했던 [용암의 바다]를 포함해도 채 열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뭐, 천하통일과 샤이닝을 비롯한 다른 길드가 발견한 동굴이 넉넉잡아서 쉰이라고 쳐도…….
‘십만 분의 오십이면…….’
공략도는 고작 0.05퍼센트라는 것.
물론, 나야 제로 산맥의 최종 콘텐츠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을 공략하긴 했다만……. 그 공략이 다른 방향의 공략이니까. 남철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민이랑 두 사람은 선발대 쪽에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동안 총대장님의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할 방법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봤는데요……!”
확실히 사람의 재능은 가지각색이다.
‘그땐 참 엉성했는데.’
플레이어로서는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남철민이었지만.
분석관이 돼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라는 건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았지만.
선발대 쪽에 가까워지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시만요, 총대장님.”
엄청난 존재가 기척을 뿜어낸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살벌하네.’
단순하게 플레이어들의 안색을 보고 알아차린 낌새였거든.
그나저나 확실히 심각한 상황이긴 한가 보군.
오죽했으면 내 또각거리는 발소리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의문도 잠깐.
나는 납득하고 말았다.
확실히 다른 쪽에 신경을 쓸 정신은 없었던 것 같군.
붉은 휘장.
천하통일의 플레이어들이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거대 연합의 마스터들과 대립 중이었으니.
천하통일이라니, 벌써 일석삼조 중 하나를 건졌나 싶었거늘.
이내, 천하통일의 길드원들이 몸을 돌렸다.
“뭐야, 저 새끼들?”
남태민의 혼잣말에 남철민이 급히 달려나간다.
“태민아, 무슨 일이야?”
“어, 형. 다른 게 아니라……. 아니, 호열 씨?!”
“이런. 총대장님을 기다리시게 하다니, 면목 없습니다.”
“……어휴.”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가지각색의 반응이 쏟아지기도 잠깐.
남태민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천하통일, 저것들 웬만해선 저희랑 말도 안 섞어주거든요.”
천하통일의 폐쇄성에 관해선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길드와 말도 섞지 않을 정도일 줄이야.
남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나? 그 콧대가 워낙 드높아야 말이죠. 그래서 저희도 어이가 없던 참이었어요. 다짜고짜 우리 구역에 찾아와서는 뜬금없이 자신들을 본 적이 없냐니. 지금 보고 있으면서 뭔 개소릴까요, 그것들?”
듣고 있던 남철민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자신들을 천하통일이라 생각하면……. 방금 만남을 두고 본 적이 있냐 없냐, 물을 리는 없겠죠. 아무래도 천하통일 내부에 사건이 생긴 모양입니다. 내부에서 급히 사건의 원흉을 찾아 나설 정도로 말입니다.”
“천하통일 내부에 균열이……?”
“엥?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되묻는 히사기와 남태민.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말 한마디에서 그런 정보를 추측할 수 있다니.
역시 괜히 분석관이 아니라니까?
남철민이 판단의 근거를 늘어놓았다.
“천하통일 플레이어들에겐 이동속도 버프가 걸려있었습니다. 효과를 유지하는 데에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기에 전투 중엔 되도록 발현하지 않는 스킬이죠. 순수하게 우리, 거대 연합과의 대화가 목적이었던 겁니다.”
나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닥치고 있으면 절반은 간다.’
플레이어의 심리는 천하의 그랑펠조차도 읽을 수 없는 것.
물론 나, 이호열도 그쪽으로는 자신이 없다.
악마를 비롯한 고레벨 몬스터.
그리고 아르카나인들과는 남 부럽지 않게 부대낀 경험이 있다만.
플레이어와 직접 충돌한 경험은…….
‘확실히 드물지.’
그런 의미에선 든든하구나.
내 뒤엔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거대 연합이 있었으니까.
물론, 타인의 경험에 의존하는 건 긍지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있으니 고민할 것 없다.”
그래, 지금이야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그냥 보내줬는데 말이야. 다음에도 그냥 돌아갈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천하통일.
‘일석삼조의 목표로 삼은 이상.’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얻어서 돌아갈 테니까, 나랑 그랑펠은.
그나저나, 내 말에 남철민이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분석관의 날카로운 감각…….’
그 시선으로 봤을 때.
내 뻔뻔함에 웃음을 터트린 건가, 싶었거늘.
남철민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그와 비슷한 말씀을 총대장님을 처음 뵈었을 때 들은 것 같아서요. 뭔가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총대장님께서는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으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이놈의 입방정이라면.
지금과 비슷한 말을 하고도 남았겠지.
그 소리에 히사기가 실눈을 지그시 감고는 읊조린다.
“제가 알지 못하는 총대장님의 초심이라…….”
뒤이어 남태민과 레오니가 반응한다.
“나도 몰라. 넌 아냐?”
“글쎄다. 그래도 너보단 잘 알겠지.”
……세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는가, 싶었는데.
레오니가 묘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걸 보고 확신이 들었다.
‘어째, 나랑 알게 된 순서대로 얼굴이 밝은데……?’
첫 균열 공략에서 만났던 남철민.
그다음이 레오니.
그다음으로 남태민과 히사기를 만났었지……?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결국, 긍지가 문제로구나.’
유치하다, 다들!
그랑펠.
네가 중2병의 긍지를 남에게 전염시키니까.
다들 중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유치한 쪽으로 경쟁하고 있잖냐?
‘죄가 많다, 진짜로.’
아르카나 대륙도 모자라 현실에까지 중2병을……. 아니, 긍지를 전염시킨 죗값을 치르기 위해선. 역시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지.
“총대장님께는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총대장님의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우리 거대 연합은 동시에 3개의 동굴을 공략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더없이 좋은 계획이었다.
‘세 배로 고생하면 잡생각에 시달릴 틈도 없겠지.’
떠올려본다, 십만 동굴의 적정 레벨을.
[적정 레벨 : 800]
[적정 레벨 : 750]
[적정 레벨 : 850]
하나는 몰라도 동시에 셋이라니.
아무리 나라고 한들, 긴장의 끈을 놓을 순 없는 난이도였다.
아니, 냉정하게 조금 벅차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 게.
‘마력 소모가 보통이 아닐 테니까.’
무려 세 개의 동굴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총대장님이시라면 동굴에서 다른 동굴로 통하는 포탈을 발현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 포탈을 사용한다면 전력의 분산 없이 효율적으로 공략을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나의 마법 발현력 덕분이다.
다만, 경험으로 봤을 때 마력 소모가 장난이 아닐 거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 중이라고 해서 최대 마력량까지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사실상 균열에서 균열로 통하는 포탈을 여는 거야.’
그 상황에 따라선 거대 연합의 플레이어들도 포탈을 이용할 터.
‘생각만 해도 마력 탈진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 드는구만.’
그러나.
이런 과대평가야말로.
그랑펠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으니.
“흠잡을 바 없는 계획이군.”
거만한 말과 정반대로.
이제부터는 과대평가를 실현하기 위해.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부지런히 발버둥 칠 때가 왔다는 것이다.
*
천하통일.
꿀꺽─
물처럼 들이켜는 건 [중급 마력 회복 포션].
그 값어치는 웬만한 장비 아이템과 비슷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동 속도 증가 스킬, [신속한 발놀림]에 이어서 [은신]까지 발현해야 했으니까.
[스킬, ‘은신’이 발동됩니다.]
거대 연합.
행방에 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했겠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잠적할 리 없다.’
주군의 집결 명령을 어긴 파티가 하나도 아니고, 일십(一十)에 이르렀다. 반란은 아니니라. 하나도 아니고, 일십이 작당 모의를 할 동안 주군께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셨을 리는 없으니까.
‘외부 세력의 짓이 분명하다.’
패도를 선언한 천하통일이었다.
그런 천하통일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이들?
제로 산맥엔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거대 연합.
‘특히 짐승과 뱀 새끼.’
가온과 이나즈마 시절부터.
천하통일에 치여 온 남태민과 히사기라면 천하통일에 악감정을 품고 있을 터. 이번을 기회로 본색을 드러냈을 가능성은 차고도 넘쳤다.
심지어 조금 전의 대면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거대 연합은 상당한 병력을 집결한 상태라는 걸.
물론.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소식이 끊긴 이들?
오성인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천하통일 내부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강자들이다. 그들과 사투를 벌였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멀쩡한 모습들이었다.
‘허나, 모든 게 다다익선이다.’
특히나 정보는 더더욱.
설사 단순한 해프닝에 그칠지라도 거대 연합에 관한 정보는 주군께 도움이 될 터. 때문에 천하통일의 플레이어들은 몸을 숨긴 채 거대 연합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
또각─
예상 밖.
아니, 규격 외의 존재와.
그가 입을 열었다.
“낮말을 엿듣는 쥐인가.”
……동요하지 마라.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 거리에서 은신을 간파할 수 있을 리 없…….
“영원한 밤을 선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다.
영원한 밤을 선사하겠다니.
저런 확신에 찬 말을 뱉었다는 건.
“……!!!”
그는, 이호열은 우리의 은신을 간파한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