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자비롭지 않은 자들 (2)
광활한 제로 산맥의 어딘가.
벌어지고 있는 건 전투가 아니다.
일방적인 학살이다.
PVP(Player versus Player).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PVP의 결과는 절대적인 레벨에 달려 있지 않았다.
대인전에 가장 우선시되는 건 경험이다.
가장 큰 차이점.
플레이어는 몬스터와 다르다는 것.
심리가 존재할지언정 패턴은 없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상대의 심리를 읽어야만 한다.
천하통일의 길드원들에겐 상당한 대인전 경험이 있었다.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천하통일의 길드원으로서 살아남았다는 건 그런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어설퍼!”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 플레이어의 기준이다.
상대는 그림자 용병단이다.
악행이 자자한 플레이어, 초신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림자 용병단의 악명과 대인전 경험에 비하면 사막의 모래알갱이 수준도 되지 않는다.
3석, 핸더슨은 호탕하게 웃었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일 땐 말이지. 확실한 걸 넘어서 철저해야 한다고. 어설프게 가슴팍을 찌르면 질긴 목숨이 끊어지나? 이렇게 모가지를 완전히 돌려놔야지!”
슝!
해머를 휘두르자.
두득!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머리가 회전한다.
목이 부러져 180도로 돌아간 것.
열 배가 넘는 머릿수가 무색할 정도의 전력 차였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팔과 다리가 떨려온다.
그럼에도 유지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생각.
‘내가 물러서면……!’
주군께서 위험에 빠진다.
그런 유지오에게 부단장, 울프는 말했다.
“신기하군. 이쯤 되면 정신을 차리는데 말이야.”
……갑자기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바짝 날 선 유지오와 달리 울프는 느긋하게 움직였다.
석궁을 미리 손봐두길 잘했군.
이렇게 곧바로 피를 묻히게 될 줄은 생각 못 했지만.
중얼거리곤 다시금 유지오를 바라봤다.
“모험가라도 군주는 군주라는 거겠지.”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 수준은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한다. 근래엔 뜸했지만, 과거엔 군주의 그릇을 가진 이들을 향한 암살 의뢰가 끊이질 않았었다.
“내가 그쪽 의뢰론 꽤나 전문인데.”
그때마다 울프는 자진해서 의뢰를 수행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군주의 육체 능력은 특출나지 않았으니까.
멀리서 슉 하고 쏘면 쓰러지는 게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의 군주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야.”
류오쥔춘이라고 했나?
유일무이한 모험가들의 군주는 무언가가 달랐다.
아르카나 대륙의 뒤편에서 구른 덕분일까.
울프에겐 그 이유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쪽의 군주는 모험가란 신분을 제대로 활용한 모양이야. 대격변 이전의 모험가들에겐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축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군주로서 싹부터 짓밟힐 일이 없었다는 거지.”
“……!”
유지오는 눈을 부릅떴다.
순간 발끈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주군께서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엔 타 랭커들과 다르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셨으니. 하지만 그건 과거에 불과하다.
지금은…….
“물론, 대격변 이후에도 역시나 모험가의 이점을 잘 살리고 있지. 이쪽 세계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이야. 효율적이고, 냉철해. 이런 건 다른 모험가들도 배워야겠는데?”
울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어깻죽지를 바라봤다.
총상, 팔뚝에선 적잖은 출혈이 발생했다.
기껏해야 마력 화살 정도의 속도를 예상했더니.
총탄이 그보다 훨씬 빠른 탓이었다.
그나마 나는 싼값에 배운 거지.
“빌어먹게 따끔하네, 거!”
락키드의 육체는 총상으로 가득했다.
유지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런 총알받이가 되고도 멀쩡히 살아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건 철저하단 거야.”
“……?”
“자신의 부하조차 속일 정도로.”
꾸욱!
유지오는 검을 쥐었다.
자존심을 긁는 도발 정도는 얼마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주군을 헐뜯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분노에 몸이 움찔거릴 때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의 충성심은 진짜 네 감정일까?”
“그게 무슨……!”
“이걸로 몇 명째라고 생각해?”
“……?”
“우리가 쓰러트린 오성이 몇이나 될 것 같아?”
돼지와 늑대.
다섯 중 둘이 아니던가.
유지오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때였다.
“토끼 가면, 그쪽을 제외하고 열이다.”
“……뭐라고?”
“앞으로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몰라도 다섯은 진작에 넘었지.”
순간, 유지오는 사칭범들을 떠올렸다.
머저리 같은 것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글세.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일까.”
“……?”
“아니, 애초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울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대들의 주군만 알고 있겠군.”
툭.
순간 울프의 손에서 내던져지는 가면들.
얼핏 봐도 다섯이 훨씬 넘는다.
‘……설마.’
유지오의 머릿속에 의심이 싹 트였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유지오가 오성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자신이 오성이라는 것.
그뿐이었으니까.
‘녀석의 말이 전부……?’
유지오는 주군의 행동을 돌아봤다.
그러자 의심은 더욱더 커졌다.
충성심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찌릿─
격한 편두통이 두뇌를 훑었다.
[상태이상, ‘세뇌’에 저항합니다.]
“……!”
클래스, [군주]의 고유 스킬 효과가 사라짐과 동시에.
유지오의 주군.
아니, 류오쥔춘에 관한 충성심도 거품처럼 사라졌다.
‘어느 틈이지?’
유지오는 머릿속이 혼란했다.
언제부터 나의 자발적인 충성심이 상태이상으로 대체된 것인가? 아니, 애초에 나한테 류오쥔춘을 향한 충성심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했나……?
철컥!
그 순간 다시금 들려오는 석궁의 장전 소리.
상태이상이 사라진 지금에야.
전신의 감각이 온전하게 경고했다.
이대로는 죽고 만다고.
훽!
유지오는 빌어먹을 토끼 가면을 내던진 채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세요!”
비굴하기 짝이 없더라도 목숨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유지오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간절한 애원에 돌아온 건.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핫핫. 그것도 간만에 듣는 대사로군.”
얼굴이 피로 뒤덮인 핸더슨은 즐겁게 웃었다.
툭투둑─
락키드가 근육을 비틀어 육체에 박힌 총탄을 뽑아내며 투덜거렸다.
“빌어먹게 식상한 구걸이란 거지, 젠장 할.”
“…….”
무미건조한 말투에선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그림자 용병단.
흔한 목숨 구걸에 흔들리기에는.
그들이 겪어온 수라장은 더럽고 추악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울프는 그 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단장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키치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울프는 알지 못한다.
의뢰를 수행 중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그러니까 비수를 쥐었을 때의 키치와 황금 송아지 주점에서 주정을 부릴 때의 키치의 간격은……. 긴 시간 그녀를 지켜본 자신조차도 낯설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확실한 건 키치는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손을 더럽힐지언정.
단원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혼자서 그림자 용병단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춘 것이다.
물론, 울프는 그따위 단장 명령에 따를 생각은 없었다.
항명이 아니꼽다면 단장의 자리를.
『그림자 신의 낙인』도 넘기지 않았어야지.
게다가.
‘단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거든.’
울프는 피식 웃었다.
‘그게 당신의 도움을 거절한 이유입니다.’
모험가들의 세계.
어찌 보면 자신들은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보고, 듣고, 체감하며 느낄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의 당신, 이호열의 영향력을.
그렇기에 키치를 찾기 위해선.
호열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절했다.
‘저희와 엮여서 당신께 좋을 게 없을 테니.’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다.
호열은 어째서 그림자 용병단을 포용한 걸까?
누군가는 묻겠지.
호열과 그림자 용병단은 단순한 고용 관계.
서로 주고받을 뿐만이 아니었느냐고.
글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당신께 도움이라니.’
호열에게 타인의 도움 따윈 필요치 않다.
개인이 아닌 세력으로 봐도 그렇다.
제국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그렇다 치더라고, 무려 마탑을 배후에서 움직인다. 모험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는 물론이요, 최근에는 전설 속의 드래곤들이 호열의 이명을 부르짖었으니.
울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당신 방식의 배려였던 거겠죠.’
배려라.
한동안 잊고 있던 대접이었다.
그렇기에 울프는 결심했다.
그림자 용병단은 당신에게 은혜를 입은 만큼.
이제부터는 더욱더 철저하게.
당신과 선을 긋겠다고.
결심한 울프에게 유지오가 다급히 외쳤다.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세요! 혹시 천하통일의 내부 정보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를 이용하세요! 저는 더 이상 류오쥔춘의 꼭두각시 따위가 아닙니다……!”
“뭐야. 정신이 돌아왔나. 귀찮게.”
“히, 히익!”
목소리가 들려온 쪽.
뒤로 고개를 돌리자 연신 하품하는 9석, 드쉐브가 있었다.
그 손가락 사이마다 끼워진 건 철침(鐵針).
“부단장, 어떻게 할까?”
철침이 명령만을 기다리는 듯 반짝거린다.
“글쎄.”
목적은 이 세계와 아르카나 대륙을 잇는 『접속기』라는 마도구였다. 천하통일에 잠입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3대에 이르는 접속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세상에 퍼졌기 때문.
“고작 몇 명을 죽인다고 알아낼 순 없을 거야.”
아마도 천하통일을 몰살하는 게 아닌 이상.
접속기의 행방을 찾긴 어려울 터.
“이들의 군주께서는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흥, 부하 뒤통수를 치는 걸 보면 피도 눈물도 없긴 하군.”
“락키드, 그건 우리 단장도 마찬가지인데?”
“하!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님께 피와 눈물이 남아있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소름 돋는 일이지! 세상에 미친놈도 그런 미친놈이 어디에 있겠어?”
“그 말은 꼭 단장에게 전해줘야겠군.”
“……크흠, 방금은 실언이었다.”
울프와 락키드의 대화에 유지오는 움찔했다.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자신에게 쓰임새가 생긴 것 같았으니까.
빌어먹을, 류오쥔춘.
그 녀석이 보통내기가 아닌 덕분이었다.
찰나의 순간, 유지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디에 붙어야 하지?’
상태이상 메시지를 보고 깨달았다.
류오쥔춘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유지오는 그림자 용병단을 바라봤다.
‘……지금은 협조하는 게 옳아.’
설령 자신의 부하들에게 칼을 꽂은 적이라고 한들.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유지오가 마른침을 삼키자 울프가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군. 계획대로 하자.”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푹!
드쉐브의 철침이 유지오의 점혈을 꿰뚫었다.
계획에 더없이 적합한 드쉐브의 방식이다.
대상을 즉사시키지만, 외상은 남지 않았으니까.
이윽고.
저벅.
상황을 지켜보던 6석, 이자벨마를이 움직였다.
그녀가 마력을 발산하자 꼬꾸라졌던 유지오가 다시금 기립했다.
슥─
울프는 그제야 까마귀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류오쥔춘, 그 정도 되는 군주 앞에서 속내를 숨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지. 우리에게 내부 정보를 전달하기 이전에 다시 군주의 권능에 잠식될 가능성이 다분해.”
하지만 시체에 속내는 존재하지 않는 법.
네크로멘서.
이자벨마를의 능력으로 되살린 언데드 쪽이 훨씬 더 이용가치가 높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언데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공허한 초점일 터.
7석, 알카리가 클클 웃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군주님의 알량한 속셈이 부하들이 스스로 가면을 쓰게 만들었지! 이 가면극이 자신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게야!”
그게 바로 애송이 군주라 평가한 이유였다.
류오쥔춘.
그는 군주로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으니까.
“태풍의 눈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어찌 모르는가?”
그에 반해서.
“호열 경과는 정반대로군.”
호열은 태풍의 눈을 넘어서.
스스로를 극한의 극한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그 방대한 재능에 군주의 자질까지 품고있다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의 행보였다는 것이다.
덕분에 호열은 자신의 안위는 물론.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 또한 지켜내고 있었으니까.
알카리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용군주라는 호칭 또한 결코 과언이 아니시겠지요.”
*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라고 했던가.
진짜 대단하구나, 그랑펠.
어떻게 낯짝 한번 안 바꾸고 자화자찬을 할 수 있는 거냐……?
나는 화면 속에서 재생되는 나의 기자회견을 바라보았다.
-“흑암룡. 그 또한 나의 ‘일부’에 불과하니.”
왜, 가끔은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곤 하는 게 인간이거늘…….
화면 속에서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
어깨에 걸친 재킷.
그리고 더없이 뻔뻔한 철면피까지.
그 꼴을 지켜보고 있자니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이럴 때가 아니다.’
이 수치심을 잊기 위해선.
한시라도 빠르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정신이 힘든 것보단 몸이 힘든 게 나을 테니까.
나는 곧장 제로 산맥으로 향하는 포탈을 발현하려다가 멈칫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인터뷰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느긋하게 기울여지는 찻잔.
“기이에 관한 탐구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이지.”
그래서.
기어코 이 끔찍한 인터뷰를 다 보고 말겠다고?!
진짜 내게는 눈곱만큼도 자비가 없구나, 그랑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