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73화 (273/489)
  • ◈ 273화. 그것이 나다 (1)

    입이 아플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르카나 대륙에서 한시도 쉬지 못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겠지.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루라고, 단호하게 못 박아뒀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쿵─

    문을 닫자 보이는 광경.

    집무실 책상 위.

    하루 만에 수북하게 쌓인 업무들.

    그랬다.

    보름만에 현실에 복귀하던 날.

    내가 짊어진 짐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스럽게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사회인이자 자취생이었던 내가 아니던가.

    그 시절, 집안일을 미루지 않는 이들을 보고.

    사람이 맞느냐고 혀를 내둘렀던 나였거늘.

    스스슥.

    정작, 나는 현실로 복귀하자마자 깃털펜을 놀리고 있구나.

    그 사람들보다 몇 술은 더 뜨고 있겠지…….

    물론, 언제까지고 엄살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육체에 무리가 되지 않아 다행이다.’

    플레이어는 초인이라 불린다.

    단순하게 스탯이 상승하는 것만으로도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육체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 나는 그것도 모자라서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까지 있었으니까.

    ‘노화도 무시하는데 고작 피로?’

    덕분에 이렇게 꼿꼿한 자세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는 거지.

    멀쩡한 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마찬가지다.

    ‘효율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다행이다.’

    나, 이호열의 집중력이었다?

    이런 속도로 밀린 일을 해결할 수 없었겠지.

    덕분에 그랑펠이 찻잔에 담긴 녹차를 비우듯.

    책상 위의 서류들이 사라져갔다.

    ‘그나저나…….’

    현실에서 한숨을 돌리니까.

    이젠 아르카나 대륙에 생각이 닿는다.

    현실보다 시간의 흐름이 네 배나 빠르니까.

    다음 진입 때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군.

    ‘제국이야 알아서 잘하겠지.’

    노파심에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신경 쓸 게 없었다.

    내가 오지랖을 부리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황제답게 제국을 다스려야 한다.

    잠깐 대화를 나눠본 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황제에겐 그 정도의 자질은 있어 보였거든.

    “황제, 긍지를 알고 있는 자였지.”

    그랑펠어로 긍지의 싹수가 보였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제국을 관련해 생각할 건…….

    쌓아둔 기여도. 그리고 퀴른베르크 기계탑밖에 없었다.

    ‘……떠올리니까 아쉽네, 또.’

    스윽─

    나는 시선을 옮겨 어깻죽지에 걸친 재킷을 바라봤다.

    그래, 아직도 레벨이 부족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예상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태초 악의 부산물.

    그 덩어리가 경험치를 조금도 내뱉지 않은 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만. 본체를 쓰러트린 게 아니었으니까. 치사하다고 할 순 있어도 마냥 억울해하기는 또 그랬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믿는 구석이 있었거든.

    퀴른베르크 기계탑이라는 든든한 적금이!

    하지만 체인워커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된 게 원흉이었다.

    하이엘은 그렇게 말했다.

    -“모험가들이 전투에서 경험치를 쌓아 강해지듯. 퀴른베르크 기계탑도 마찬가지라고 드워프의 지도자, 체인워커가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닐 터.

    말했다시피 빨대를 꽂아 빨아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게 지금의 제국이었다.

    그런 제국에 파수병으로 세워둔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경험치와 명성을 거둬들인다면?

    제국의 전력은 크게 떨어지고 말겠지.

    ‘이런 식으로 뱉은 말을 지키게 되는구나.’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은 다시금 지껄인다.

    “멈추는 순간까지 악크샨의 긍지를 다하도록.”

    어쨌거나, 예상이 어긋난 만큼.

    나는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적정 레벨 :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제로 산맥이 존재하는 이상.

    노력만 한다면 경험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결국엔.

    ‘이번에도 나만 잘하면 된다는 거지.’

    드륵.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내가 짊어진 짐은 마탑에만 쌓여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성전 연합군 회의가 있는 날.

    ‘고작 하루.’

    현실에 별일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느냐 싶지만.

    내게 절차를 생략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나는 포탈 너머 유스라 왕국으로 향했다.

    .

    .

    .

    그러나 별일이 있었다.

    천하통일.

    너네, 어떻게 이름값 좀 해주면 안 되는 거냐……?

    나는 읊조렸다.

    “정반대의 뜻을 밝혔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속기를 쟁취하겠다니.

    아주 그냥 레이먼 션의 노림수에 대놓고 걸려준 수준이잖아.

    이해가 되지 않는 판단은 아니다.

    얼마 전부터.

    샤이닝을 제치고 길드 랭킹 1위를 사수하고 있는 천하통일이다.

    ‘능력을 썩히지 않겠다는 거겠지.’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이 있다는 거겠고.

    그러나 이해가 되었다고 한들.

    그 행동을 용납하겠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도 그럴 게.

    “그렇다면 친히 그 뜻을 꺾어줄 수밖에 없겠군.”

    레이먼 션은 악마와 다를 것 없다.

    나도, 그랑펠도 결론을 내렸던 참이거든.

    나의 선언에 자리에 모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로 산맥에서 충돌이 있었던 모양인가.

    남태민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사기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통일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도덕을 넘어서 그들은 더 이상 일개 플레이어, 길드로 볼 수 없습니다. 국가와 한 몸이죠.”

    실눈이 무섭게 번뜩이는 게 이나즈마 때부터 맺힌 게 많은 모양이군. 히사기만 유별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남태민도, 레오니도, 슈레이그도 한마디씩 거들었거든.

    다만, 남태민은 덧붙였다.

    “……하지만 모든 갈등이 원인은 류오쥔춘이겠죠. 우연히 천하통일 길드원과 만난 적이 있는데. 거기 플레이어들도 좋아서 류오쥔춘을 따르는 게 아닌 눈치더라고요.”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가 그 소식에 발끈했다.

    “지도자의 자격이 없군, 그 사내는!”

    류오쥔춘의 독단적인 행동이야, 전부터 악명이 자자했다.

    다만, 길드원들이 그에게 저항할 수 없는 데엔 이유가 있겠지.

    [군주]라는 류오쥔춘의 희귀 클래스부터.

    중국이라는 어쩔 수 없는 조국까지.

    ‘밖에선 알 수 없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도 얽혀있는 거야.’

    여태까진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천하통일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된 이상.

    천하통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불공평하잖아?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에 공개되고 있는 나와 다르게.

    나는 저쪽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거든.

    그럼에도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제로 산맥이라면 저들과 조우할 수 있겠지.”

    천하통일이라면 접속기를 수소문하는 와중에도 레벨 업에 소홀히 하지 않을 거다.

    펄럭거리는 재킷에 팔을 끼우기 위해서 제로 산맥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천하통일과도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거든.

    “……!”

    제로 산맥을 찾는다는 나의 말에 남태민들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진다. 단순하게 반가워서 그런 건가, 싶다기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하르콘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에게 말씀을 드릴 참이었습니다. 경께서 아르카나 대륙을 부지런히 누비시던 순간. 모험가 제군들도 제로 산맥에서 분전하며 얻어낸 성과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총대장의 위치.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선 경어를 사용하겠다고 했던 하르콘이지만……. 역시 하르콘에게 듣는 존댓말은 낯설구나. 물론, 나는 내색하지 않고 하르콘이 건넨 양피지를 받아 든다.

    양피지엔 그 성과라는 게 적혀있었다.

    남의 고생을 가볍게 여기는 건 긍지롭지 못한 일.

    천천히 양피지를 정독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과연, 분전했다는 게 과언이 아니군.”

    이게 몇 개야?

    제로 산맥에 존재하는 십만 동굴.

    [던전], [미궁], [전장] 등등…….

    그 타입은 물론.

    개수도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

    수많은 동굴의 정보가 양피지에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플레이어들과 함께 제로 산맥에서 활동하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다. 덕분에 하르콘은 플레이어들이 무엇 때문에 망설였는지도 아는 눈치였다.

    “대부분이 총대장님께서 보름간 자리를 비우셨을 때 발견한 동굴들입니다. 빠르게 보고하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혹여라도 총대장님의 시간을 빼앗게 될까, 모험가들이 우려하였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얼마 만이냐, 이게?’

    나를 향한 호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게. 하르콘이 말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이놈의 긍지는 좋다고 곧장 십만 동굴 공략을 일과에 추가했겠지.

    ‘지금보다 더한 개고생을 하게 될 뻔했구나.’

    하지만 배려 덕분에 이렇게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일석이조도 아니고 일석삼조가 된 셈이었으니까.

    나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나를 우려할 필요는 없거늘.”

    그놈의 격식이 뭐길래, 솔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이렇게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이게 된다니까?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건만.

    단순하게 기뻐하는 눈치들이라 다행이구만.

    ‘뭐, 제로 산맥의 수준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양피지에 적힌 적정 레벨을 다시 살펴본다.

    ──────

    [적정 레벨 : Lv.800]

    [적정 레벨 : Lv.850]

    [적정 레벨 : Lv.750]…….

    ──────

    하나같이 현재 플레이어들만으로 공략할 수 없는 수준의 동굴들이다. 그러나 내가 합류한다면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진짜 거품도 언제 한번 걷어내긴 해야 하는데…….’

    아르카나 대륙에서 전설이 퍼져 나가는 꼴을 보고 절실히 느꼈다.

    불필요한 착각은 되도록 빠르게 바로 잡는 게 옳다는 것을.

    왜, 그게 어떤 식으로 되돌아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으니까.

    [레벨 : 681]

    노가다 클래스 퀘스트로 상승한 스탯까지.

    총합만 따지자면 레벨 이상의 강함을 지닌 나였거늘.

    역시나 나사가 빠진 클래스, 악마 사냥꾼이라는 게 문제다.

    물론, 그동안 쌓아둔 꼼수와 새롭게 획득하게 된 [전설], [클래스 고유 스킬]을 생각하면……. 적정 레벨 800레벨 정도는,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겠지만.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거든.’

    악크샨의 수호령인 템페스트를 악마가 아닌 일반 몬스터 앞에 불러내는 건 악마 사냥꾼의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흑암룡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무엇보다 나는 고생을 할 필요가 있었다.

    대뜸 고생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묻겠지만.

    그동안 날로 먹어도 너무나도 날로 먹어왔다는 뜻이다.

    ‘앞으로는 근본적인 실력이 필요해.’

    꼼수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실력 위에 꼼수를 더해야.

    꼼수조차도 비장의 한 수처럼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는 없을 터.”

    어차피 내 팔자에 휴식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바로 제로 산맥으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슬슬 성전 연합군 회의를 정리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호열 씨……. 아니, 총대장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아직 무언가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모양인데.

    듣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태민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입에서 상상치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흑암룡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흑암룡이라고?

    순간, 현기증이 찾아왔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정신을 다잡았다.

    단순하게 흑암룡이 궁금한 걸 수도 있잖아?

    아르카나 대륙과는 다르다.

    현실에는 내가 흑암룡이라는 사실이 퍼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호열아. 괜히 찔려서 위축될 거 없다.’

    내가 뻔뻔하게 마음을 다스리던 순간이었다.

    더욱더 믿지 못할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히사기의 입에서.

    “총대장님께서 흑암룡이셨을 줄이야. 저는 미련하게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미친?!

    그,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아니, 그보다 왜 놀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플레이어.

    아니, 아르카니인들까지도.

    이 자리의 모두가.

    내가 흑암룡이란 소리에 놀라지 않고 있다.

    그 순간이 돼서야 나는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지이잉─

    전부터 안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부재중 통화 : 웬수]

    이거, 아무래도 현실 모두가 알아버린 모양이다.

    내가.

    드래곤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울부짖던.

    흑암룡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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