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약속 (2)
하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림자 용병단 부단장.
울프는 작업대에 앉았다.
예전 같았으면 술에 취해 침대를 뒹굴고 있었을 시간이었지만.
철컥─
울프는 석궁을 손질했다.
보자, 장비를 손질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새삼스럽게 자신의 감각이 얼마나 무뎌져 있었는지 자각하게 된다.
“이런 상태로 의뢰를 수행한 거냐, 나란 놈은.”
부단장 자격 실격이군.
그 타고난 재능 덕분에 적은 물론, 동료들조차 울프의 무뎌짐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나의 전력은 전성기에 비하면 더없이 볼품이 없을 거라고.
“우리 동료분들께서 자비로워서 다행이야.”
그동안 부단장 자리를 탐내주지 않아서 고마울 따름이군.
게다가 이렇게나 무뎌진 자신을 일깨워준 이가 있었다.
그렇다, 다름 아닌 호열이었다.
살다 살다 고용주에게 도움이 받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이런 식의 도움이라니.”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손해였다. 호열에게 과거, 자신이 애용하던 석궁을 건네준 울프였으니까. 울프가 호열에게 받은 건 강렬한 감정이었다.
“……정확하게는 쫓기는 위기감이랄까.”
가만히 손을 놓고 있다가는.
그나마 자신할 수 있는 사격조차 호열에게 뒷덜미를 잡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단 것이다. 호열의 재능은 다시 떠올려도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다.
검술.
마법.
그리고 사격까지.
호열은 여러 방면에서 정점에 다다를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 재능을 꽃피우는 데에 걸리는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울프는 장담할 수 있었다.
“언젠간 저를 뛰어넘으시겠죠.”
자신을 넘어서.
어쩌면 아르카나 대륙 역사상 최고의 명사수로 기록될지도 모르겠지. 그런 훗날을 생각하면……. 그런 호열에게 작게나마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렇다고 해도…….”
제아무리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호열이라고 한들.
그쪽으론 우리 단장을 능가할 순 없겠지.
그림자 용병단의 현 단장.
그 말인즉.
키치는 그림자 용병단 역사상 최강의 단장이라는 뜻이었으니.
“물론, 두 분께서 충돌할 일은 있지도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요.”
울프는 후─ 먼지를 불어냈다.
“어쨌거나, 두 분 다 무사히 복귀하시길.”
역시나, 하루는 길지 않았다.
이곳의 하루가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나흘이라고 했던가?
울프는 손가락을 접어보다가 한숨을 뱉었다.
“그럼 적어도 사흘은 시끄럽겠군, 우리 단장님.”
하지만 예상은 언제나 예상에 불과한 법이었다.
“……?”
화아아아악─!
순간, 전신을 휘감는 작열감.
“!”
울프는 신속하게 감각을 곤두세웠다.
기민한 시선으로 문틈, 창틀, 창밖을 살폈다.
그 틈으로 마력 혹은 맹독이 유입됐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러나 이상한 낌새는 포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두로 살갗을 지지는 듯한 이 통증은 무엇이란 말인가?
울프는 지체하지 않고 윗옷을 벗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치지지지직!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정말로 자신의 피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상체를 휘감는 거대한 화상(火傷).
“……!”
언제나 나른했던 울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틀림없었다.
이건 『그림자 신의 낙인』이었다.
그림자 용병단, 단장의 상징이었다.
단장의 상징이 자신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키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
*
결과만 말하자면 키치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푸드덕─
그녀 대신 약속 자리에 나타난 건 웬 까마귀 한 마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갑자기 웬 까마귀냐고 영락없이 속았을 것 같았는데.
‘이래서 사람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니까?’
악크샨의 수호령.
악크샨 늑대.
템페스트를 목격한 덕분에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악크샨에 악크샨 늑대가 있듯 그림자 용병단에도 그와 비슷한 구실을 하는 까마귀가 있는 모양이군.
찌릿─
까마귀의 적안을 바라보자 텔레파시처럼.
키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딱히 요약이 필요할 정도로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에 관한 책임과 이전의 일에 관한 책임도 오롯이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인 제가 짊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책임을 지겠다라.
딱히 반박하지는 않겠다.
아니, 반박할 수 없겠지.
‘까칠하긴 하지.’
사전에 약속하지 않은 만남은 가지지 않는 그랑펠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사전에 약속했던 만남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때.
그랑펠의 뒤끝이 얼마나 지독할지를……!
‘나 같아도 당장 사과부터 했을 거야.’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전의 일에 관한 책임이라.’
키치와의 첫 만남부터 골똘히 생각해 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키치도, 그림자 용병단도 내게 책임을 질 정도로 잘못한 일은 없단 말이지? 물론, 키치가 그런 뜻을 전해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
‘물가에 내놓은 자식이나 미아도 아니고…….’
다짜고짜 찾아 나서는 것도 지나친 대응이었다.
무엇보다 키치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무려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이라고.
‘단순하게는 장부를 찾지 못한 걸 수도 있고.’
클라우디령을 발견한 지금.
앞으로 나는 아르카나 대륙 진입 빈도가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라도 키치와 조우하게 된다면 그때 그 책임을 묻고, 필요에 따라 함께 현실로 복귀하면 되는 일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포탈을 발현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마탑에 불청객이 찾아왔다라.
그 불청객의 정체가 그림자 용병단이라.
아무래도 내 손님이 확실한 것 같았으니까.
다짜고짜 외쳤다.
유그위드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랜만이군.”
일단, 불청객과 나는 구면이었다.
아니, 구면을 넘어서 사제 관계라고 할 수 있으려나.
부단장, 울프.
나는 그에게 사격에 관한 가르침과 석궁을 선물로 받았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안면이 있다고 한들.
그랑펠이 절차를 생략할 수 있으랴.
마탑의 지하, 무간(無間).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그렇고.
‘……어째 지하를 찾는 일이 잦은 것 같다만.’
별수 없다.
그 이유를 막론하고 울프는 마탑의 불청객이었으니.
사유를 듣기 전까진 무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자.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거든.
“그대의 상황을 이해한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나, 이 또한 절차이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죽지 않은 것에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그림자 용병단이다.
숙련 마법사의 포위 마법을 뚫고 크리스탈 홀에 근접하는 데까지 성공했다니. 현실은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게 몇 명이나 되겠어?
‘이름값 확실히 하네.’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부터.
얼마 전까지 이어진 십 년이 훌쩍 넘는 공백기.
덕분에 나는 그림자 용병단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AAU가 있었다.
덕분에 그림자 용병단에 관한 설정을 살펴본 적이 있었지.
‘스토리 최후반까지 영향을 끼친다.’
만약, 아르카나 대륙 전기가 게임으로 정상적으로 서비스됐다면. 그림자 용병단은 아르카나의 스토리가 종반으로 향할 때까지 아르카나 대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속칭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다만, 그 영향력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어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뭐,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걸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
스윽─
울프가 힘겹게 나를 바라본다.
나야 어디서나 흔들리지 않는 항상심 덕분에 무간에서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으어어으…….”
한때 원로 마법사였던 악마 숭배자들.
반신(半神)이라 칭송받던 이들조차.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것만 보아도 그렇다.
울프도 무간의 특수성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제겐 부단장으로서의 행동이 필요했습니다. 총대장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단장, 키치의 신변에 위협이 생겼다는 것을 단원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가 사람은 잘 본다니까?
역시, 울프는 섣부른 행동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설령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한들, 이유가 없이 감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마탑을 습격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 녀석들은 분명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을 겁니다.”
한마디로 총대를 멘 거구나, 울프.
나 또한 온갖 총대를 메어본 사람으로서.
그런 고충은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하나 있군.
키치의 신변에 위협이 생겼다니……?
이건 아무래도 서로 말을 맞춰볼 필요가 있겠는데.
“키치는 까마귀를 통해 전언을 보내왔다.”
“까마귀라면…….”
울프가 힘겹게 말을 잇는다.
“단장께선 아지트에 무사히 도달하신 모양이군요.”
까마귀는 아지트에서만 불러낼 수 있는 수호령인 모양이군.
스윽─
울프가 천천히 자신의 윗옷을 걷어 올렸다.
곧 상반신을 뒤덮은 화상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의문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째서 그림자 용병단 단장의 상징, 『그림자 신의 낙인』이 제게 넘어온 것일까요?”
그런 설정이 있었구나.
괜히 같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던 나보다도 먼저 키치의 이상을 알아차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할 게 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림자 용병단은 자진탈퇴가 가능한 조직인가?
나의 물음에 울프는 잠시 침묵하고는 답했다.
“탈퇴와 처분에 관한 규율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야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다고 한들.
그림자 용병단이 그 꼴을 보고만 있을까.
울프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림자는 그림자에 파묻혀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니까요. 쫓겨났을지언정 자신의 발로 그림자 용병단을 나간 이에 관해선 저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키치는 단장이었다.
그림자 용병단에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가 존재한다면.
웬만해선 자신이 뜯어고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 키치가 남긴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울프가 물어왔다.
“단장이 어떤 전언을 남기셨는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가감 없이 답했다.
“오늘과 과거에 관한 책임을 지겠다, 키치는 그리 전해왔다.”
내가 아무리 뒤끝이 길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고작 시간 약속 하나를 못 지켰다고, 키치가 제 손으로 단장 자리를 내려놓을 정도로 압박감을 주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나는 알지 못하는 과거에 관한 책임.’
키치는 과거에 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단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취를 감춘 것일 터.
그렇다면 과거의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부단장인 울프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과거에 관한 책임이라…….”
울프조차도 영 모르는 눈치로군.
부단장인 울프가 알지 못하는데.
다른 단원들이 그 뜻을 알고 있으리란 기대는 할 수 없겠지.
“유감스럽게도 절차에 오류가 있군.”
뭔진 몰라도 책임을 지겠다는 거?
아주 긍지로운 행동이지.
그런데 그게 뭔지는 알려주고 사라져야 할 거 아냐!
나는 그렇다고 쳐도.
동료에게도 말하지 않고 잠수 타는 건 너무하잖아.
울프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건은……. 아무래도 단장에게 직접 따져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저희 그림자 용병단의 규율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디 보자…….
접속기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도.
추가로 한 명 정도는.
내가 발현한 포탈을 통해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있을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랑펠의 재능이다. 마력량에는 발전이 없을지라도, 숙련도가 무섭게 쌓인다는 거지.
“그와 관련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를 찾아도 좋네.”
언제든 환영.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그랑펠 입장에선 엄청난 배려였다.
그러나 울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단장의 판단을 믿습니다.”
울프의 음성은 더없이 진지했다.
단호함이 깃든 눈빛이 나를 응시한다.
“그녀가 그렇게 판단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부족한 저는 알지 못하는……. 그림자 용병단과 총대장님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그렇기에 도움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
사실 과거에 ‘무언가’가 있어봤자 흑역사에 관련된 일밖에 더 되겠느냐만……. 울프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성격에 계속 권유할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절차에 따라서 석방이다, 울프.
*
커뮤니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마탑 뭐냐??? 내가 알던 마탑이 맞냐ㅋㅋㅋㅋ
-그림자 용병단 통수칠 줄 알았다 내가ㅋㅋㅋㅋ
-왜 누가 사고침?? 그거 보나 마나 락키드지? 그거?
-아니 울프라는데?
-엥……? 락키드 새끼가 아니고?
-새끼라고 하는 거 보니까 너 혹시 락키드한테 맞았냐?
-……너 누구냐? 어캐 알았냐?!
이전과 다르게 마탑엔 보는 눈이 많았다.
울프의 돌발 행동은 전파를 타고 실시간으로 대중에게 전해졌다.
수많은 추측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화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건 타이밍이었으니까.
AAU.
어나더 스페이스 호.
하루 만에 다시금 포착된 거대 에너지 반응.
“이, 이번에도 마탑입니다!”
그렇다.
호열이 현실에 복귀하는 순간.
마탑 상공에 떠오른 차원의 틈.
그 광경을 목격한 플레이어들에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업적 : 흑암룡의 귀환을 목격하다]
“……흑암룡의 귀환이라고?”
“그럼 저 마탑에 떠오른 저걸로 흑암룡이……?”
“자, 잠깐만. 그럼 흑암룡이라는 게 설마……?!”
흑암룡의 정체를 추측게 하는 메시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