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약속 (1)
고풍스러운 황제의 공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찻잔.
그리고 분위기를 깨는 찻잔 속 녹차 티백.
달칵─
그나저나, 눈앞의 광경 이상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로군.
나는 흠칫했지만, 내색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한 사정이 있었군.”
균열.
기이의 공간.
기이처럼 사기적인 효과를 지닌 전황의 서고였거늘.
역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전황의 서고, 사용의 대가는 수명이었다. 제국의 황제들은 전황의 서고에서 자신의 수명과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해답을 교환. 제국을 지켜온 것이었다.
“그러나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 두려워서 해서는 안 되겠지요. 조금이라도 겁을 먹는 순간,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 황제 폐하들과 마주할 자격이 없어질 테니 말입니다.”
황제는 아직 전황의 서고에 진입한 적이 없는 모양이니까.
전황의 서고, 내부가 어떤지는 물어도 알지 못하겠지.
쓰게 웃던 황제가 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이들에게 이 비밀을 함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황의 서고에 관해서는 다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만…….
그 대가가 무엇인지까진 모르는 거겠지.
그러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었던 거고.
“때가 되면 스스로 모든 걸 밝히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비밀은 지켜줘야지.
하지만 말이야.
그걸 밝히게 되는 날이 과연 올까?
‘명백하게 균열이었다.’
다시금 떠올려보자.
전황의 서고의 정보를.
[전황의 서고]
[적정 레벨 : 측정불가]
[붕괴 진행도 : 92.7%]
일단, 적정 레벨.
황제의 말에 따르면 전황의 서고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군주’의 자질을 가진 자뿐이었다. 입장하는 순간, 결정을 번복할 수도, 수명이 사라지는 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그를 위한 교육 또한 받았다고 했겠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다.
여러 번 질문을 던질 수 없다는 뜻.
덕분에 황제는 최소한의 질문으로, 최대한의 답변을 얻어낼 수 있도록 그와 관련된 훈련을 받아왔다고 했다. 흑암룡 전설을 퍼트린 웅변술도 그때 배운 모양이구나, 이거?
‘여기서도 냄새가 나네.’
지긋지긋한 콩가루 냄새가……!
아무리 왕관을 쓰고 태어났다고 해도.
어렸을 때부터 효율적으로 수명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는다니.
너무하잖아?
그 시절, 요상한 취향에 빠진 나조차도.
클라우디 가문에 이런 설정은 적어넣지 않았겠다, 진짜.
어쨌든, 세계수 가문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쪽도 충분히 콩가루로구나.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전황의 서고가 균열이라는 걸 간과해선 안 됐으니까.
‘만약에라도 붕괴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그동안 쌓아온 플레이어의 경험으로 추측해 보자면…….
그 힘을 빌릴 때마다 [전황의 서고]의 붕괴도가 상승하는 구조겠지.
나는 그쯤에서 선언했다.
“내가 그 사실을 밝힐 일은 없을 걸세.”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
“그대가 밝힐 일도 없을 걸세.”
“……그게 무슨 뜻이신지?”
“그대가 전황의 서고에 출입할 일은 없을 테니까.”
“……네?”
아르카나 대륙엔 균열이 흔치 않아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전황의 서고, 저게 붕괴하는 순간.
안토니움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니까?
‘지금이라도 막아야 한다.’
92.7퍼센트.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되도록 긍정적으로 사고하자. 앞으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0퍼센트와 다를 바 없다고.
사실 마음 같아선 말이야.
‘이쪽 세계에서 균열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건만.
마탑 크리스탈 홀 강단에서 떠들어봤던 나는 교훈을 얻었었다.
말로 백 번을 설명해 봤자.
완벽히 다른 세계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그랑펠이 기이한 거니까.’
덕분에 지금은 다른 이유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놈의 긍지가 아무리 선의라고 한들.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을 순 없으니까.
나는 언제나처럼 당당히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넘어서 아르카나 대륙에 더는 절체절명의 위기라 할 수 있는 상황은 도래하지 않을 테니.”
“……!”
“내가 그리할 것이다.”
진짜로 자신감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구나.
나의 말에 황제가 반응을 보인다.
……그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비웃는 건가?’
발끈하기보다는 심히 부끄러워진다.
그래, 내가 말해놓고도 건방지다 생각했는데.
황제가 듣기에도 얼마나 어이가 없겠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비웃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군요.”
이내,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경이 마치 저와 같은 짐을……. 아니, 저보다 더욱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덕분에 그 말씀이 진정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런가?
사실 짐은 객관적으로 봐도 지나치게 많이 들고 있긴 하지.
아무래도 거기서 진정성이 느껴진 모양이군.
“그렇기에 모든 말씀이 제게 위로로 다가옵니다.”
황제는 이번에도 작게 웃었다.
그러나 직전에 웃는 걸 봐서 그런가, 구분이 되었다.
이번 건 씁쓸한 감정을 머금은 쓴웃음이라는 게.
‘나를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황제로서의 짐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거겠지.
뭐, 나를 믿지 못한다고 화를 낼 입장은 아니다.
저게 바로 황제의 긍지일 테니까.
그러나 이거 하나만큼은 믿어도 좋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지금은 허풍처럼 들릴지라도.
나는, 그랑펠은 실현하고 말 테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실현할 때까지 발버둥 칠 테니까.
그러니 지켜봐도 좋다, 황제여.
될 수 있으면 오래오래 살아서 말이야.
*
약속의 날이 왔다.
마탑의 최상층.
탑주는 혓바닥으로 털을 핥았다.
“심히 거창하지 않은가, 마르셀로 수석.”
“무엇이 말입니까, 탑주님?”
“약속의 날이라고 하니, 이 순간을 심히 고대하고 있던 것 같지 않은가? 고작 하루거늘. 이런 환대는 너무 과한 게 아니냐 묻는 것이다.”
현실의 시간으로 하루요.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으로도 나흘에 불과했다.
그런데, 마탑 최상층에 집결한 인원을 보아라.
탑주, 원로, 수석에 선임 마법사 전원 소집이라니.
“나의 복귀 때보다도 호사스럽구나.”
“혹시 질투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어쩔 것이냐?”
“꼬리가 흔들립니다, 탑주님. 역시, 거짓말에 서툴러지셨군요.”
“쯧. 이놈의 짐승 몸뚱이만 아니었어도.”
마르셀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과하지 않습니다. 경께서야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게 처음이 아니시지만, 이번에는 동행인이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무사귀환의 축하를 떠나 주의를 기울 필요가 있겠지요.”
마탑이 총출동하듯.
최상층에서 호열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호열을 제외하면 최초라 할 수 있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왕복을 기념하기 위해서.
동시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치유마법.
순수마법.
흑마법…….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는 각 분야에 전문가였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오가며 동행인, 키치에게 혹시 모를 이상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방면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이 소근거렸다.
“……근데, 꼭 저희가 필요할까요?”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가 속삭임이 무색하게 받아쳤다.
“또 또. 그렇게 자신 없는 소리 할 겁니까?”
“그게 아니라……. 이 수석님이 계시잖아요?”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다니요, 뱅그릿 선임.”
“네……?”
벤쉬는 간만에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럴 수밖에.
이런 자리에서 벤쉬가 가슴을 당당히 펼 수 있는 상대는 자신보다는 어리며 그 성품이 어리숙한 뱅그릿밖에 없었다. 벤쉬가 동생, 내쉬에게 한 수를 일러주던 때처럼 속삭였다.
“이런 게 다 친목 도모라는 겁니다……!”
“……친목 도모요?”
“그렇습니다. 사실 이 자리의 모두가 알지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다면 이 수석님께서 어련히 해결하시리라는 걸요. 그렇지만 의도보다도, 눈에 보이는 성의가 매우 중요하다.”
“보이는 성의가 중요하다……?”
“왜, 귀족의 사교계에선…….”
벤쉬는 말을 이으려다가 아차 싶어서 덧붙였다.
“아, 뱅그릿 그대가 평민 출신이라고 얕보는 건 절대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윌리엄 가문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저 이해를 돕기 위함입니다.”
“……하하. 당연하죠.”
평소 가벼운 언행으로 오해를 받곤 하는 벤쉬였지만,
뱅그릿은 그의 진심을 알고 있다.
평민이라 차별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자신과 대화조차 섞지 않았겠지, 벤쉬 선임은.
“굉장히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것 같은 행동거지들에도 전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만찬 자리에 놓인 식기에 사용 순서가 존재하는 것부터 말입니다!”
“아아……!”
친절한 예시를 듣자마자 이해가 됐다.
“저도 익숙하지 않아서 고생 꽤나 했었죠.”
마탑에 입성하고 한동안 얼마나 고뇌했는지 모른다.
기념일마다 열리는 마탑의 연회에서 귀족들은 손이 여러 개 달린 거냐며, 그래서 숟가락과 포크도 여러 개를 쓰는 거냐며 구시렁댔던 뱅그릿이었으니까.
“그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 말씀이신 거죠?”
“그렇습니다! 이거야말로 격식 아니겠습니까?”
“으음…….”
뱅그릿은 말꼬리를 흐렸다.
벤쉬 덕분에 이해는 됐지만, 무언가 묘하게 걸렸다.
이 수석님께서 격식을 중시하시긴 하지만, 허례허식을 중요하게 여기시진 않으시는데…….
왜, 호열이 막 공동 수석의 자리를 인정받았을 무렵.
‘내가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지, 그건.’
그런 호열에게 호의를 사기 위해.
집무실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뱅그릿이었으니까.
그런 자신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쉬는 후후 웃음까지 뱉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부지런히 서적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왜, 귀족의 글쓰기란 서적을 아십니까? 그 페이지만 해도 수천 장인데…….”
거기서 뱅그릿은 확신했다.
‘또 헛다리를 짚으셨네요, 벤쉬 선임.’
그의 출탑 신청서가 어김없이 반려되는 건 인사말 때문이 아니었거늘. 핵심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뱅그릿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순간, 머릿속에 텔레파시가 울렸으니까.
그건 비단 뱅그릿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었다.
흠칫하는 선임 마법사들.
“……!”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 알게 되었다.
이건 선임 마법사 전원에게 전해진 텔레파시였다.
마르셀로와 원로, 유그위드, 그리고 탑주도 눈치를 챘다.
유그위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우리한테는 뭐가 없나 보군요.”
선임 이상의 마법사가 전부 마탑 최상층에 집결한 지금.
텔레파시를 보내온 건 기껏해야 숙련 마법사일 터.
선임 마법사가 수석, 원로, 탑주에게 텔레파시를 전할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탑주가 무심히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들.”
마탑, 내부에서 내부로 텔레파시라.
흔치 않은 일이다.
이내, 선임 마법사들이 입을 열었다.
워낙 믿지 못한 소식이었기에.
확신이 없어 그 말꼬리를 흐리면서.
“……마탑에 불청객이 진입했다고 합니다.”
“?”
그것은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다.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의 위용은 지금보다 과거에 더욱 드높을 정도였으니.
유그위드와 탑주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거 흥미가 생기시지 않습니까, 탑주님?”
그러나 마르셀로가 그들의 호기심을 사전에 차단했다.
“불청객의 정체는 특정되었습니까?”
마티스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 바로 묻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마르셀로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과거와 다르게 마탑은 개방되었다. 그 로비에는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포탈을 통해서 쉴 새 없이 워프하는 플레이어들도 존재했다.
‘혹 상층으로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숙련 마법사들이라면 능히 그 상황을 정리할 테니까.
우려하지 않았단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순간.
마르셀로는 직감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침입자가 숙련 마법사의 포위를 돌파.”
“……!!!”
“크리스탈 홀에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르셀로는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 정체는?”
“모험가가 아닌 아르카나인으로…….”
마티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림자 용병단의 단원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그림자 용병단.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유그위드가 정색했다.
“빌어먹을 그림자 용병단이라…….”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없는 거인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그위드는 그림자 용병단과 작은 악연이 있었으니.
유그위드가 입을 열었다.
“불청객은 제가 맡도록 하지요.”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마탑에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유그위드가 작게 읊조렸다.
“애초에 고쳐 쓸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곧장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
슈오오오오─!
최상층.
허공에 떠오르는 찬란한 마력의 빛 무리.
자리의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다.
“!!!”
저것은 일반적인 포탈이 아니다.
경지에 오른 이만이 발현할 수 있는.
차원과 차원을 잇는 포탈.
이내, 포탈의 빛 무리 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수석 마법사,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청객이 아니다.”
호열은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의미?
모두가 그 말을 곱씹던 순간이었다.
“이 또한 예상하고 있었으니.”
……예상이라고?
아르카나 대륙에 있던 이 수석이 어떻게 이곳의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의문에 빠지기도 잠깐, 포탈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들은 알아차렸다.
접속기를 통해서.
호열과 함께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했던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
키치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호열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입을 연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단장을 대신하겠다는 것인가.”
차가운 목소리가 유그위드를 향했다.
“자리를 양보해 주겠나, 유그위드 원로 마법사.”
“양보 말인가요, 이 수석……?”
“저들의 긍지는 내가 ‘엄격히’ 확인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