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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67화 (267/489)

◈ 267화. 이것은 역사가 높게 평가 (2)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실체화합니다.]

안토니움.

그 상공을 가로지르는 흑암룡이 보인다.

전설 시스템의 정확한 효과와 한계야 앞으로 파악해 나가야겠지.

‘겉보기엔 흠잡을 게 없네.’

전설은 얼마나 널리 울려 퍼지느냐에 따라 더욱 강해진다.

전설이 시작된 장소에선 그 효과가 커지는 것도 당연하다.

황제의 입으로 공인되어 퍼져 나간 전설이었으니.

황제가 머무는 안토니움에서 흑암룡의 힘과 크기는 더욱 커질 수밖에. 그러니 하늘의 흑암룡은 지난번에 실체화했을 때보다도 거대했다.

특히 양 날개가 유달리 커서 펄럭거리는 게…….

정말로 어깨에 걸쳐둔 이놈의 재킷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구나. 그래서 어째서 전설을 발동한 거냐고 묻는다면 이유야 간단하다.

‘그랑펠 사전에 얌전한 등장이 있을 수 있겠냐.’

물론, 이유는 또 있다.

주변 악마들의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었거든.

게다가 제국이 언제까지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거슬리지 않게 그대로 엎드려 있거라.”

하르콘이 보면 얼마나 애통해하겠어?

언젠가 안토니움을 찾을 하르콘을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악마들의 기강을 잡아 둘 필요가 있다는 거지.

“자, 잠깐!”

성문으로 다가가자 흑암룡에 정신이 팔렸던 경비병이 멈칫한다.

당황하는 것도 이해한다.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을 떠도는 여행자치고는…….

내 차림새는 말끔하다 못해 화려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귀족이라 생각한 모양인지.

의심이 가득하면서도 경어로 말을 걸어온다.

“……소속과 신분을 밝혀주시겠습니까?”

근데, 우리 사이에 통성명은 필요 없지 않을까?

사실 그런 것보다는.

내 입으로, 내가 흑암룡이다.

외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거늘…….

이렇게 말하면 또 호기심 많은 누군가는 묻겠지.

정체를 밝히기 싫다면 그냥 안토니움 성벽 안으로 포탈을 열면 되는 것 아니었느냐고. 정말, 그랑펠의 절차 사랑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군.

“너그럽게 이해하겠다.”

하이엘, 그리고 체인워커를 통해서 황제와 소통을 해온 나였다만.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고.

게다가 꼿꼿하신 긍지께서 정문을 놔두고.

포탈이란 샛길로 안토니움에 입성하는 걸 달가워 하겠냐.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나의 팔자라는 것이다.

드디어 정신줄을 붙잡은 것인가.

나를 제대로 바라본 경비병들의 안색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서, 설마……!!”

그렇다.

그 설마가 설마다.

그래도 화려하게 저지른 덕분에.

자기소개는 생략할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내가 안도의 한숨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이내,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흑암룡이다아아아아!!”

아뿔싸.

“흑암룡께서 안토니움을 찾아오셨다아아!!”

간과하고 말았다.

전설이라는 게.

내가 입을 다문다고 울려 퍼지지 않는 게 아니었구나!!

.

.

.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국의 수도성, 안토니움에 진입하셨습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일 때도 내게는 낯설었던 안토니움이다. 그야 접점이 있어야지. 대륙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악크샨에서 허구한 날 노가다 퀘스트에 시달렸던 게 그 시절 기억의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또 한 번 간과하고 말았다.

크다!

제국의 수도이니 대도시 프로스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건 당연한 말이고, 무엇보다 악마에도 반군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안토니움이었다.

과거에 비할 순 없겠다만.

그 시절, 게임 속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만 빼고 말이지.’

또각─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는 내게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그래, 흑암룡의 실체화가 해제됐으니까.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자연스레 나를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수군거리는 대화가 들려온다.

“어디의 귀족이지?”

“……되게 높으신 분 같은데?”

“황족 아닐까?”

“대공님이라는 거야? 그래도 저런 얼굴은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어디서나 이놈의 복장이 문제구나.

귀족도 모자라서 황족이라니.

낯 뜨거워서 얼굴을 들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다.

‘멀리까지 퍼지진 않은 모양인데.’

제국이 대단해도 경비병이 텔레파시를 발현할 순 없다. 덕분에 소리를 질렀어도, 흑암룡에 소란스러웠을 안토니움에 경비병의 함성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툭─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고.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

소리가 난 곳에는 나를 바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 눈빛들이 아무리 봐도 내 정체를 바로 알고 있는 눈치들이다. 안토니움에서 나를 알고 있을 이들이라면…….

역시, ‘그들’밖에 없겠지.

그렇다, 드레드센.

아이언 캐슬 호에 머물면서 하이엘과 디엔드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나에 관한 묘사를 잘한 모양이구나.

‘보자마자 나인 걸 알아보는 걸 보면 말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안토니움에서의 생활은 익숙해졌는가?”

“……?!”

“드레드센의 생존자들이여.”

“여, 역시……!!!”

내가 말하자 그제야 확신한 듯싶었다.

바닥에 떨어트린 물건을 주울 정신도 없이 눈물을 글썽인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드레드센만큼은 확실하게 구원하긴 했지.

그러니까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되는데…….

“한없이 깊은 어둠이시여!”

많고 많은 이명 중에 하필이면……?

여기 보고 듣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미 황제를 통해 충분히 울려 퍼졌을 이명이었지만.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의 충격은 비교조차 할 수 없구나.

나는 저 멀리 우뚝 솟은 안토니움 본성을 바라봤다.

‘보자…….’

이런 막대한 관심과 환대 속에서.

앞으로 수 시간은 꼬박 걸어야 본성에 도달할 수 있겠구나.

진지하게 우려가 된다.

나는 그때까지 수치사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

안토니움은 광활하다.

그 때문에 빠른 소식 전달을 위해 일정 거리마다 제국 소속 마법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보다 빠른 게 다리 없는 말이었으며, 다리 없는 말보다 빠른 게 텔레파시였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제국 마법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니까?!

방금까지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안토니움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드래곤이 상공을 가로지르더니 구름 너머에서 사라진 걸.

굳이 텔레파시로 전해 듣지 않아도 눈치챘단 말이다.

-그러니까 흑암룡밖에 없겠지, 저런 드래곤은!

아르카나 대륙에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십여 마리의 드래곤을 목격했던 마법사들이었다.

비교 대상이 있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거대한 드래곤이야말로.

그들이 울부짖던 흑암룡이 확실하다고.

-그 흑암룡이 나타났다고!

-아니, 나도 봤다니까?

-하씨, 진짜 답답해 미치겠네!

-뭐 답답? 내가 더 답답하다!

안토니움의 모두가 저 흑암룡을 목격했을 터.

폐하께서도 어련히 알고 계실 텐데.

유별나지도 않은 소식에 뭣 하러 마력을 소모하란 말인가?

하지만 마법사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거리.

텔레파시에 역정을 내던 마법사가 흠칫했다.

아르카나인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낯선 차림새.

피부에 와 닿는 압도적인 마력량.

그런 존재가 흑암룡과 함께 나타났다……?

“잠깐만…….”

그쪽 흑암룡을 말한 게 아니라 이쪽 흑암룡을 말한 거였나!

“아니, 설명을 제대로 해야지!”

그러나 투덜거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빠르게 이 소식을 폐하께 알려야 했다. 황궁에 있을 내쉬 마법사님께 곧장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나의 미천한 마력이 원망스럽구나.”

그러기엔 발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본성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법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건만.

되돌아온 것은 어째서인가.

익숙한 질문이었다.

-뭡니까, 뻔한 소리를 텔레파시로 전하는 이유가?

그렇다.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 탓에 호열은 인파를 몰고 다니고, 갖가지 환대를 받으며, 수많은 이명까지 들어가면서 안토니움 거리를 거닐은 다음에야 본성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

때로는 극한의 경험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하던가?

나는 그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수치스럽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지는 않는구나……!

‘내가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다들…….’

태초의 악과 푸닥거리를 하는 것보다 안토니움에 발을 들인 후 몇 시간이 더 기운이 빠질 줄이야. 각오는 했다만, 정말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잠잠하던 입방정이 그 점을 상기시켜 준다.

“조화롭군.”

입구부터 멋대로 남의 집을 평가하지 마라, 그랑펠.

그것도 황제의 황궁을!

그나저나 내 팔자에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싶다.

악마 사냥꾼이란 보잘것없는 클래스는 제쳐두고 생각하더라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할 땐 플레이어들의 수준 자체가 낮았으니까. 제국과 접점이 생길 수 없었다.

대격변 이후엔 더더욱 그렇다.

나부터도 이렇게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오갈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거든. 내가 제국을 구원하게 되리란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고.

덕분에 뒤늦게 실감했다.

“사실이었나…….”

나를 보고 왕좌에서 일어나는 황제를 보는 순간.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래,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여기서 고민했을 거다.

‘어떻게 첫 마디를 떼어야 할까, 하고는.’

왜, 천하의 제시 하인네스도 그랬다고 했지.

-“그때도 엄청 눈치 보였거든요!”

황제의 앞에서 혹시라도 말실수하는 건 아닐까, 고심했었다고.

나만큼은 아니겠다만.

남 눈치를 살피지 않는 제시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지나치게 화려하다.

황궁이라는 황제의 뒷배경은 굉장히 으리으리했으니까.

물론,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웅장함이었다. 그랑펠의 심미안을 떠나서 유스라 황금 궁전이 이것보다 더 으리으리하면 으리했지, 절대 못 하진 않았거든.

그러니까 내 고민은 플레이어들과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황제를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가?

황제보다도 지고한 존재인 유낙서스와 아젠트레스에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던 나였으니까.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올 거란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뭣보다 클라우디 설정을 생각하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않을 정도.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전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째 나보다 신하들이 더 놀란 표정들이다.

황제가 이렇게 극진하게 나를 대접해 줄 줄은 몰랐는데.

신하들이 멈칫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아니려나.

클라우디의 후광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축적된 [명성치]가 보통이 아니긴 할 테니까. 제국이 온전하던 시절이었다면 어떤 도시를 방문해도 귀빈 대접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여기서는 또 적절하게 사회인의 지혜를 발휘할 때로군.

무엇보다 내겐 제국과 깊게 엮일 생각 따윈 없었다.

말했다시피 이미 충분히 벅차다니까?

‘클라우디 영지 재건만 하더라도 심란한데.’

제국까지 떠맡을 생각?

유감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다만 조금도 없다!

그러니까 제국의 권한은 언제까지나 황제에게 있어야 한다.

황제는 황제답게 위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랑펠의 긍지를 꺾고 존댓말을 내뱉을 순 없으니…….

‘적어도 여럿이 같이 있을 때만이라도.’

황제를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상황은 피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곧장 본론으로 돌입하는 게 좋겠군.

아르카나 대륙을 가로지르며 주변 상황을 파악해 둔 나였다.

‘시간은 충분해.’

키치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까진 아직 여유가 있다.

그러니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황제에게 말을 이었다.

“사담은 후에 나누도록 하지.”

“혹 급하신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황제라면, 제국의 수장이라면 당연히 고민하고 있었겠지?

악마의 손아귀에서 되찾아온 안토니움 인근 도시들을.

대체 어떻게 복구해야 할지 말이야.

‘본의 아니게 클라우디 후광으로 날로 먹은 덕분에.’

내겐 마력이 남아돌던 참이었다.

게다가 그 탐색 대상이 광물이잖아?

단순한 성벽 같은 건 쥐뿔도 없던 시절부터.

능숙하게 바로 세울 수 있었던 나란 말이다.

그러니까 더는 우려할 것 없다.

특히 거기 마법사처럼 보이는 양반.

‘어째 얼굴이 누굴 닮은 것 같은데…….’

[메인 퀘스트]도 수행할 겸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만에 편하게 쉬라고.

황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야.

*

마탑.

“에에에엣취!”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은 재채기를 뱉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아까부터 자꾸만 귀가 가려웠다.

그러나 집중하자, 벤쉬 윌리엄.

“이제부턴 쉴 새 없는 경쟁이다. 모험가들과 경쟁……!”

최근 마탑에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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