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이것은 역사가 높게 평가 (1)
내가 사교계 설정에서부터 알아봤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 과거 사교계에서 그랑펠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와 같았다. 사교 자리를 즐기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거늘. 홀연히 등장하는 날에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으니…….』
그 시절.
내가 생각한 멋이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드러나지 않는 위대함이라니.
드러내지 않아도 감춰지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이라니.
기부를 해도 욕을 먹곤 하는.
현대 사회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개소리가 아닐 수 없구나.
‘근데 이름은 또 사천왕이라고 지어?!’
게다가 모순되는 작명 센스는 덤.
나는 살아 움직이는 네 개의 조각상을 바라봤다.
세 명의 사내와 하나의 여인.
그 이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황금의 막시마 가문]
[숲의 유그릭 가문]
[용맹의 캔설 가문]
[전율의 아카몬드 가문]
사천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아주 그냥 이름부터 거창하시다들.
네 가문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이 내게 머리를 숙인다.
나를 주인이라 부르면서!
부담스러워 하거나 민망해하거나.
사람이라면 응당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늘.
나의 철면피는 이 세상 두께가 아니었으니.
나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내가 그대들의 인사를 받았다.”
내뱉는 말투도 참 높으신 분, 가주답구나.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절차에 죽고 못 사는 성격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들라.
그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천왕…….
그러니까 석상들이 고개를 들지 않은 건.
인사 때문만이 아니었으니까.
저택 근처에 석상이 우뚝 솟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클라우디령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석상은 무너졌다.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고하듯 막시마의 석상이 말한다.
“저희에게 그럴 자격은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기는.
너희가 자격이 없으면 나는 뭐가 되냐.
‘누군 만회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려는데 말이야.’
너희가 나보다도 기운이 없으면 되겠냐고.
그러니까 고개를 들어라.
까칠한 성격상 세 번까지는 말하지 않을 거니까.
“그대들의 책임이 아니다.”
“……?”
“이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일 뿐.”
“……!!!!”
나의 과오요.
정말로 순수한 뜻에서 내뱉은 말이었거늘.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조각상들의 표정이 어째 석상답지 않게 참 풍부해 보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달까.
뭐, 아무래도 좋다.
[히든피스, 클라우디령]
태초의 악, 녀석이 위치를 알고 있는 지금.
언제, 다시, 어떤 개수작으로 클라우디령을 집어삼키려고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내가 클라우디령에 존재하는 이상. 클라우디령에서 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설정 덕분이지.
‘문제는 그렇다고 눌러살 수 없다는 거지만.’
내 공백을 채워줄 파수꾼이 필요하던 참.
드워프부터 드래곤, 이제는 엘프까지.
아르카나 대륙에 내 부탁이라면 나서서 떠맡아줄 세력들은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이놈의 긍지.
고귀하신 긍지께서 남에게 집안일을 떠맡길 수 있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사천왕…….’
아니, 4가문의 석상을 반전시킨 건 큰 수확이었다.
마법이 깃들어 있던 것은 물론.
심하게 훼손된 저택과 다르게.
그 잔해가 바닥에 온전히 널브러져 있던 덕분이겠지.
‘어쨌든, 할 일이 늘어났다.’
클라우디를 다시 위대하게.
크나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선.
클라우디령 또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할 터.
항상 달고 다니는 노가다 단련 클래스 퀘스트와 마찬가지로. 수시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와 클라우디령을 관리할 필요가 생긴 셈이다.
그나저나 영지 관리라.
‘사실 처음이 아니긴 하다만.’
유스라 왕국과 프로스트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나였다. 문제는 각각 하쿠나와 하르콘에게 대부분의 일 처리를 떠맡긴 탓에 막상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정 불안하면 조언을 받을 수 있긴 한데…….’
그런 일이 있긴 하려나?
불과 7세에 위대한 클라우디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그랑펠이다. 그 말인즉슨, 그랑펠은 일곱 살 때부터 각종 후계자 수업을 받았단 의미다.
“내게는 익숙한 일이니.”
영재 교육을 받은 그랑펠에게 클라우디령 재건이라.
나와 달리 그랑펠의 총명한 머리를 고려하면.
어쩌면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르지.
그보다.
‘4가문이라.’
다시금 거창한 설정을 떠올려보자.
확신할 순 없다만.
아르카나 대륙이 쑥대밭이 됐어도 그들은 아마 멀쩡할 거다. 지금까지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클라우디와 마찬가지로 설정에 충실하게 실존하는 모양이니까.
‘……그런데 조금도 반갑지가 않구나.’
그저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다.
이유야 간단하다.
사천왕에게 주인이라 불리고 싶은 생각 따윈 죽어도 없으니까!
지금만 하더라도 충분하단 말이다.
당장의 행선지부터 걱정된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가야 되긴 하는데.’
시슬리와 클라우디의 영지 방문.
완벽하게 끝난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긴 했다만…….
두 가지 목적, 모두 일단락을 지었으니까.
이번에도 절차에 따라 안토니움에 들를 차례였다.
‘만나야지, 키치랑.’
그렇다.
제국의 수도.
흑암룡 이호열 전설이 울려 퍼지고 있을.
그 안토니움에……!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은 다르다.
유낙서스가 우렁차게 드래곤 피어를 내질러 준 덕분에 황제를 비롯한 아르카나인들은 알고 있겠지. 이호열, 내가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라는 것부터. 전설의 흑암룡이라는 것까지!
그러니까.
“곧 다시 찾아오겠다.”
나는 석상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클라우디령을 떠나는 첫걸음부터.
우려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수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
소식이 들려온다.
“폐하, 원정군이 생존자를 발견했다 합니다!”
“홀덤우드를 수복했습니다!”
“지난밤 동쪽의 마왕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옵니다!”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제국을 건져낸 건 대륙에 떠도는 전설이었다. 드래곤들이 울부짖었던 흑암룡. 그 흑암룡이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였다는 믿지 못할 소식 덕분이었다.
황제는 웃었다.
‘나도 조금은 보람을 느껴도 되겠나?’
태자 시절.
그토록 배우기 싫어했던 웅변술이었거늘.
이런 식으로 빛을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안토니움.
결코, 평화롭다고 할 순 없었다.
조금 전 복귀한 병사들만 하더라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백성들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마계의 악마들이 대륙에 나타난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황제는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위대한 전설이라고 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게다가 상대는 악마였다.
타고난 잔혹성을 고려하면 언제 두려움에 질렸었느냐는 듯.
활동을 재개할지도 모른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게 최우선이겠군. 내쉬 윌리엄은 들어라. 그대에게 제국 마법사의 통솔권을 하사하겠다. 안토니움의 마법사들을 운용해 탈환한 지역에 성벽을 쌓아올리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또한 황궁 지하 보고의 접근을 허가하겠다.”
“……!”
지하 보고.
그 말에 듣고 있던 신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궁 지하 보고에 보관된 물건들은 제국에서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최상의 보물들이다.
“임무를 수행하며 필요한 포션과 마도구를 얼마든 사용해도 좋다.”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야 할 제국의 보루라는 것.
안토니움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열리지 않았던 지하 보고였다.
그런 지하 보고를 개방했다는 뜻은 간단하다.
밑천을 꺼내서라도 살려야 하는 기회라는 뜻이다.
내쉬가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말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 내겠습니다, 폐하!”
존경하는 형님보다 먼저 출궁에 성공한 내쉬였거늘.
내쉬에게 벤쉬를 떠올릴 정신은 없었다.
그저 두 다리가 근질거렸다.
내쉬가 충동을 억누르던 순간이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송구합니다만, 폐하.”
“말해보게나.”
“그 판단을 재고해 주십시오.”
“……!”
순간 경직된 내쉬의 얼굴.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설마 나의 출궁을 막으려고 하는 건가?
찌릿─
내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명백한 오해였다.
애초에 안토니움이 지금껏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가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제국을 위한 다른 관점의 의견이라는 의미였다.
목소리를 낸 사내도 황제의 뜻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해야 했다.
제국은 언제까지나 명백한 열세였다.
“폐하, 전방위적인 탈환과 수복은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이 순간에야 흑암룡 전설이 울려 퍼진 덕분에 악마들이 일절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안(魔眼)이 다시금 눈을 뜨지 않았습니까?”
사실이었다.
한동안 밤하늘에서 사라졌던 악마의 눈이 하나둘 떠올랐다.
이전과 다르게 깔보는 듯한 눈빛은 아니었지만.
눈알을 굴리는 게 눈치를 보는 듯했다.
“저의 심정 또한 폐하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한시라도 빠르게 제국과 백성을 구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안토니움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안토니움은 결사항전으로 이미 많은 자원을 소모했다. 병사의 머릿수도 온전하던 때의 십분의 일조차 되지 않았고, 생존한 병사들도 정예라고 부를 수 없었다.
“마법으로 성벽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성벽을 지킬 병력이 없다면 쓸모가 없는 일이겠지요. 그렇다고 안토니움의 병력을 탈환한 도시에 배치하게 되면, 안토니움은 정작 작은 공격에도 크게 휘청거리고 말 것입니다.”
“흐음.”
황제가 턱을 매만졌다.
내쉬가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쐐기가 박혔다.
“전설은 언제까지나 전설에 불과합니다, 폐하.”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능력 부족을 탓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제국의 은인과도 같은 호열을 트집 잡는 것이라면.
가만히 듣고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신하가 고개를 숙인다.
“모험가 흑암룡 이호열, 그의 위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나 이방인입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입니다……!”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호열이 아니었다면 제국은 무너져도 진작에 무너졌으리라는 것을 사내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자는 것뿐.
“흑암룡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날 이후, 드래곤들은 다시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선포를 엿들었을 악마들이니, 지금도 그들은 그들답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인가?”
“보아라, 전설도 결국 뜬 소문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
그렇다.
드래곤과 드워프가 공언하고, 황제, 자신이 선포했을지언정.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떠도는, 조금 더 소란스러운 소문에 불과하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모험가인 호열 경이 대륙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한정적입니다. 그 또한 전설이 잊히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겠지요.”
물론, 그럼에도 흑암룡 전설은 더없이 위대한 전설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악마라는 것이 문제였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덕분에 공포 또한 망각하는 족속들.
“…….”
내쉬도 황제도 침묵하던 순간이었다.
목소리를 내던 사내가 결단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굳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전설을 부정하려는 것도 제국을 재건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작은 보폭일지라도, 확실히 내디디는 게 어떨지 폐하께 아뢰옵는 바입니다.”
내쉬는 탄식을 삼켰다.
아쉬운 일이지만 일리가 없는 말이 아니다.
아니, 어찌 보면 지극히 냉철한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황제의 마음을 돌리게 할 의견까지 이어졌다.
“폐하, 드레드센 주민을 안토니움에 들인 것처럼. 구출한 백성부터 안토니움에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극악한 상황에서도 지금껏 살아남은 이들이니, 낯선 환경에도 빠르게 적응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침묵.
‘……과연, 나는 섣불렀던 것인가.’
황제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
황궁에 어둠이 드리웠다.
한낮.
그리고 안토니움 황궁의 유리창 개수를 생각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쉬가 흠칫하여 중얼거렸다.
“……혹시 그들이 다시?”
드워프들의 아이언 캐슬 호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이었거늘.
곧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워프의 비행선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태양을 완전히 가릴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하늘의 태양을 완전히 가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질문에 관한 대답은 이내,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날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알아달라 말하지 않아도.
울부짖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
“폐, 폐하 저건……!!”
그렇다.
전설.
아니, 살아 움직이는 전설.
“이럴 수가.”
흑암룡이 안토니움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