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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64화 (264/489)

◈ 264화. 우연 따위 믿지 않는다 (2)

애석하게도.

듣고야 말았구나.

아젠트레스가 중얼거린다.

“다크니스. 다크니스. 다크니스…….”

그걸 넘어서 곱씹는 중이다.

디엔드의 풀네임이 워낙 길어야 말이지.

애써 외워보려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읊조리고 있다.

아젠트레스를 원망할 순 없겠지.

잘못한 건 아젠트레스가 아니라.

저딴 이름을 붙여버린 나의 작명 센스였으니.

그보다.

‘……내 이명을 외울 정신까진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말해도 좋다, 디엔드.”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디엔드를 소환하지 않았다.

저 부산물 찌꺼기를 상대하기 벅찼더라면 또 모를까.

보다시피 그러지 않았거든.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디엔드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거겠지.

스스스─

디엔드가 어둠이 되어 한 차례 주변을 훑는다.

아젠트레스 쪽을 유심히 바라보는 게.

제삼자가 들어도 되나, 그런 눈치다.

물론, 괜찮다.

내가 엘프 관상까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곁에서 지켜봐 온 경험이 있잖아?

엘시도어만 해도 그렇다.

‘위계질서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거든.

한마디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면 죽어도 하지 못하는 게 엘프란 족속이었다. 타고난 성질이 더러운 만큼 연기나 가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지.

“그럼, 주군께 전하겠습니다.”

좋다, 들어보자.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갖가지 이명을 부르짖으면서 나타난 건지 말이야.

귀를 기울이자 진지해진 디엔드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

그 첫마디부터 흠칫하고 말았다.

뉘앙스가 조금 그렇다만…….

내가, 내 입으로 말했던 단어이기에 모를 수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

그건 클라우디의 영지를 일컫는.

그랑펠식 표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곳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쪽이 심상치 않다고?

그거 다르게 말하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잖아?

시슬리에서 뜻하지 않게 태초의 악을 추적하게 되었다고 한들.

클라우디의 흔적을 찾는 것 또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전에 계획한 일이었다.

고작 악마 따위에 휘둘려 일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

그랑펠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

‘이쪽 퀘스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당연히 디엔드의 안내를 받아서.

그놈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방문하려고 했단 말이다.

흑역사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실존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조차 써먹어야 하는 게 나의 애석한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고?’

상황 참 얄궂다.

뭐가 이렇게 겹쳐서 터지냐, 진짜.

일단,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심상치 않은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을 테니까.

‘영 상황이 꼬였다 싶으면.’

템페스트, 아젠트레스에게 추적을 맡길 것까지 염두에 둬야겠지.

곧 나는 디엔드에게 물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주군……?”

디엔드는 대답 대신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도 대답하기 곤란한 건가, 싶었거늘.

그런 게 아니었다.

디엔드는 주위를 둘러봤다.

정확히는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물어왔다.

“송구합니다만, 주군의 목적지가 혹여나……?”

스스스─

디엔드의 어둠이 지평선 너머를 가리킨다.

방향을 묻는 것 같다만, 그렇게 물어도 난 모른다?

나는 그저 템페스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것뿐이거든.

내가 템페스트를 바라보자 곧 울음소리가 울렸다.

“아우우우!”

아젠트레스가 해석을 덧붙인다.

“가리킨 방향이 옳다고 합니다.”

“……!”

디엔드가 움찔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그쯤에서 나도 눈치를 챘다.

이거, 아무래도 겹치는 것 같군.

“주군……!”

태초의 악.

아무래도 녀석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

클라우디 가문의 영지로 향한 모양이었다.

디엔드의 목소리엔 우려가 가득하다.

“미천한 저로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우연일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주군, 결례를 무릅쓰고 아뢰옵겠습니다. 부디, 저의 기우를 해소시켜 주십시오……!”

……아니, 그렇게 극진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왜냐고 묻는다면.

내가, 그랑펠이 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말로 답해주리라.

나는 고개를 숙인 디엔드에게 말했다.

“나는 운명 따위 믿지 않는다.”

그렇다.

운명조차 믿지 않는데.

이게 단순한 우연이라는 걸 믿겠냐.

그러니 확신할 수 있었다.

태초의 악.

놈이 클라우디의 영지로 향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런 관점으로 생각을 해보니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런 확실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부산물을 통해 내 발목을 붙잡으려던 거겠지.

그 속셈을 알게 된 이상.

수작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당장 가야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

클라우디의 영지로.

누군가는 우려할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부산물을 어떻게 처치할 생각이냐고.

나밖에 쓰러트릴 수 없는 살점들이.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퍼져가는 건 아니냐고.

과연, 충분히 걱정할 만하군.

그러나 간과하지 마라.

듣는 정령 섭섭하거든.

[첫 세계수의 축복]을 거머쥔 건 나만이 아니니까.

“하이엘.”

하이엘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아젠트레스가 헛기침한다.

“크흠.”

그러고 보니까 둘, 구면이지?

천운이 요동치던 그날.

유낙서스의 콧잔등에 올라탔던 하이엘이었으니까.

“하이엘, 주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역시 나의 1호 분신이다.

말하지 않아도 용케 알아차렸구나.

템페스트와 아젠트레스.

거기에 세계수의 축복을 보유한 하이엘이라면.

부산물 정도야,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겠지.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뜻이다.

“템페스트. 아젠트레스. 마찬가지로 뒤를 맡기겠다.”

“신속하게 뒤따르겠습니다.”

“아우우!”

“디엔드.”

“주군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머릿속에 대략적인 설정이 있기는 하다만.

그 설정이 추상적이기도 하고.

포탈을 발현하기 위해선 정확한 좌표가 필요하다.

이내, 디엔드가 텔레파시로 좌표를 전달.

나는 텔레파시에서 좌표를 추출했다.

좌표를 간섭 과정에 더해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어째…….’

반짝이는 포탈이 평소와 다르게 보인다.

이 포탈 너머에.

나의 가장 큰 흑역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정말로 여러 의미로 두렵다만…….’

또각─

망설임은 없었다.

망설이고 싶어도 악마가 끼어든 이상.

드높은 긍지가 그걸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걸음을 떼었다.

이윽고.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

.

.

보이는 것은 살점.

살점.

그리고 더욱 비대한 살점이었다.

“……감히.”

디엔드의 이질적인 기운이 요동쳤다.

거기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살점 아래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긴 했던 모양이구나.

나는 퀘스트 목표를 확인했다.

─태초의 악을 추적하라. (진행 중)

혹시나 했는데 말이야.

그것참 부지런하시기도 하셔라.

벌써 부산물만 남긴 채 꽁무니를 내빼셨군.

나는 입을 열었다.

“동요할 것 없다, 디엔드.”

“송구합니다, 주군. 제가 보다 신속했어야 했습니다.”

“내게 사죄를 구할 것도 없다.”

단순하게 알아차린 시점이 늦었던 것뿐이겠지.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애초에 헤아리기도 힘든 과거.

태초부터.

태초의 악, 놈이 계획한 일 중 하나였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여기선 오히려 뻔뻔해져도 된다.

“괜찮다.”

괜찮다고 담담히 말했지만…….

사실 나, 이호열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흑역사, 클라우디 가문이 살점에 뒤덮여 버려서?

아니, 이번만큼은 그런 사사로운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건 증거를 포착한 기쁨이다.

쉬이이익─

쉭─

쉬이이이─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심호흡하며 일대를 뒤덮어 가는 살점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우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닌 저들이니.”

그렇다.

나는 태초의 악.

녀석이 여태까지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퀘스트를 통해서.

드래곤을 통해서.

엘프를 통해서.

그리고 세계수가 남긴 안배를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선 모든 게 놈의 계획대로였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드래곤과 엘프를 완벽하게 속여넘기고, 족쇄 같던 세계수에서도 탈출한 시점에선 정말 모든 게 완벽했겠지.

하지만 그 대단하신 태초의 악께서.

세계수의 그늘에서 벗어난 뒤.

처음으로 향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의 영지를.

완벽하게 뒤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클라우디 가문이 어떤 수준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실현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이 고개를 조아려도. 아젠트레스가 내가 클라우디라는 것을 알아봤어도.

‘내 설정에는 그보다 더한 게 많았거든.’

그러니 눈앞의 광경은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애써 감추고 싶은 모양이구나.”

천적, 악크샨을 대륙에서 절멸시킨 것처럼.

남겨진 클라우디의 흔적마저도 지워버리려는 거겠지.

클라우디가 두려우니까.

그런데, 유감이다.

“허나, 소용없다.”

왜, 나도 한때 같은 생각을 했었거든?

그래, 흑역사를 감추고 싶어서 발버둥을 쳐봤다는 의미다.

그런데 안 되더라고.

덮으려고 하면 할수록 역류하는 게……!

과거라는 게.

함부로 덮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걸 그랑펠식 화법으로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어둠이 빛을 덮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흑역사에 수치사한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정신승리 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직면하기로 했다는 소리다.

그런 비장한 각오를 무의미하게 할 생각은 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클라우디의 배경.

『클라우디의 영지가 대륙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클라우디가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지에서 클라우디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으니…….』

이 순간만큼은 수치심 따위 고려하지 않겠다.

클라우디의 영지가 기다렸던 건.

흑역사에 고통받는 가련한 이호열이 아닐 테니까.

클라우디 최후의 생존자이자 후계자.

그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고 되돌아온.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음성일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뻔뻔하고도 완벽하게 그 목소리를 내어주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의 이름으로 명한다.”

『설령 황제라고 할지언정. 드래곤이라 할지언정. 엘프라고 할지언정. 클라우디의 영지에서 클라우디의 정한 규율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추악하게 꿈틀거리는 살점에 고했다.

“나의 영지에서 허락 없이 숨을 내뱉지 마라.”

그러자 살점들이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나의 영지를 더럽히지 마라.”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지옥에 처박혀라.”

순식간에 타올라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현실의 잣대로도.

아르카나 대륙의 잣대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

그것이야말로 클라우디의 규율.

이윽고, 살점에 가려져 있던 클라우디의 영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외면하고자 했던 나의 흑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젠장.’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까지 하고도 부정한다면.

방금까지 영지를 뒤덮고 있던 태초의 악하고.

내가 다를 게 뭐가 있겠냐.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책임져야 할.

어른의 긍지를 발휘해야 할 때다, 호열아.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나를 반겨주듯 바람이 불어온다.

재킷이 펄럭거리고.

은빛 머리카락이 눈앞에 흩날린다.

“맞이하라.”

나는 무너진 저택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너의 주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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