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63화 (263/489)

◈ 263화. 우연 따위 믿지 않는다 (1)

귀철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형태를 바꾼다.

‘대단하긴 하지만…….’

살 구멍을 셀 수 없이 많이 파놓은 덕분.

상황 대부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나와 유사한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내가 볼 때는 그저.

나를 쏙 빼닮은 분신이 아닐 수 없건만.

모든 것은 포장하기 나름이었으니.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긍지의 검로 (현재 해방된 길 : 제1길) / 없음 / 없음…….]

덕분에 ‘긍지의 검로’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었었지.

문제가 되는 건 역시 포장지의 화려함이었다.

레이먼 션의 아지트를 지키던 프로토타입들.

그걸 두부 썰듯 잘라냈던 귀철의 첫 번째 형태.

[허상을 베는 검 :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진짜 얼굴을 들 수 없다, 내가.’

왜, 따로따로 들을 땐.

그래도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흑암룡부터 시작해서 템페스트에 화룡점정으로 일루젼 브레이커까지……. 한데 모아놓고 보니까. 이거, 누가 들어도 고개를 갸웃거릴 이름들이 아닐 수 없구나.

그런 상황에서 귀철의 이름을 물어오다니.

심히 난감한 상황이었거늘.

나를 대신해서 귀철이 입을 열었다.

-이름? 고작 하나의 이름으로 내게 한계에 두려 하지 마라.

……정말, 너다운 대답이구나, 귀철아.

하지만 잘했다.

그 해괴한 이름을 내뱉을 바에는 차라리 알려주지 않는 게 낫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꾸드득─

태초 악의 부산물.

저게 언제까지고 꿈틀거리게 놔둘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필드를 변형시킨다던 메시지처럼.

부산물의 살점이 점차 일대를 뒤덮어 가기 시작한다.

나는 입을 열었다.

“추악하구나.”

웬만하면 이라면 목격하는 것만으로 위축될 만한 외관.

그러나 내가 주눅이 들 리가 있냐.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독설을 이어 뱉는다.

“그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더없이 악마답다.”

하긴 심미안이 용납할 수 없는 광경이긴 하지.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템페스트와 아젠트레스.

둘의 공격이 유효타를 입힐 수 없다는 걸 확인한 지금.

우선, 탐색해 보자.

추측했던 대로.

내 공격이 먹혀드는지를!

귀철의 검신이 검게 물들고 은빛의 기가 뿜어져 흐른다.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나는 귀철로 허공을 갈랐다.

울컥!

그러자 부산물의 살점에서 피가 튀었다.

태초 악의 부산물이든, 찌꺼기든 악마는 악마.

[천적관계]를 피해 갈 순 없다.

거기에 [첫 세계수의 축복]까지 추가.

이번에는 검을 치켜들어 베며 반응을 살핀다.

푸욱!

같은 부위 살점이 더욱더 깊게 파여나간다.

깊게 드러난 살점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건 틀림없이 치명타였다고.

과연, 정답이군.

[악마, ‘태초 악의 부산물’에게 치명타가 발생합니다.]

귀철이 차갑게 말한다.

-그깟 살덩이로 주인의 검강을 막아낼 수 있다 생각했나?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귀철아.

‘긍지의 검로’를 발동시키지도 않았다.

귀철을 가볍게, 두 차례 휘둘렀을 뿐.

객관적인 파괴력을 비교하자면……. 맹렬하게 달려들었던 템페스트나 아젠트레스의 마력 화살 쪽이 절대적인 위력만큼은 더욱 뛰어났겠지.

그러니까.

‘여기엔 다 이유가, 사정이 있는 건데.’

순전 버프빨이었거늘.

귀철아, 네가 나서서 내 얼굴에 금칠을 해대니.

이래서야 대륙에서도 편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겠구나.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태초의 악.

세계수에서 비롯된 악이니만큼.

세계수에서 비롯된 [첫 세계수의 축복]을 가진 나만이.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게.

역시나 메시지가 떠오른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태초 악의 부산물의 ‘재생’을 거절합니다.]

아젠트레스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과연, 말씀이 옳았군요.”

“그대도 목격했나.”

“그렇습니다.”

시스템.

그리고 아젠트레스까지 공인한 상황이라.

이거, 새삼스럽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데.

‘가능하겠냐, 호열아……?’

주마등처럼 그동안 나의 행적이 떠오른다.

우리 잘나신 그랑펠 님께선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만.

주제 파악이 특기인 나, 이호열은 알고 있다.

혼자였다면 나는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는 걸.

왜, 뻔뻔함과 긍지를 내세워 포섭한 아군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아르카나 대륙에서 난다긴다하는 세력들은 물론이요.

천하통일을 제외한 최상위권 길드들.

랭커 플레이어 전원이 성전 연합군에 참여한 상황이었으니까.

‘알게 모르게 도움 많이 받았지.’

그런 의미에서…….

나밖에 쓰러트릴 수 없는.

나 혼자서 쓰러트려야만 하는 적을 앞에 둔 기분?

달가울 리가 있겠냐.

그야 내 모습을 봐라.

700레벨짜리 재킷에 팔 한번 끼워보지 못해서.

아직도 이렇게 어깨에 걸쳐놓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거추장스러운 축복에 이런 안배를 담은 것인가.”

다른 누구 앞도 아니고 악마의 앞이었다.

내가, 그랑펠이 부족함을 인정할 리가 있겠냐.

나는 아젠트레스를 바라봤다.

“대화가 필요한 건 그대들만이 아니었군.”

“……!”

아젠트레스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내 발언은 세계수의 안배가 틀렸다는 뜻이었으니까.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만, 방금 건 더없이 진심이다.

정말 틀려도 한참 틀렸다, 세계수……!

‘이런 막중한 임무를 나한테 떠넘기면 어떡하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 말이 이토록 와닿는 순간이 또 없구나.

하지만 세계수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대화는 생략하지.”

“……?”

“그 대신 지켜보도록.”

세계수를 향한 뒤끝 표출은 그쯤에서 끝.

입방정도 거기서 끝이 났다.

오직 나만이 쓰러트릴 수 있는 태초의 악.

그 사실이 밝혀진 지금.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

사냥감과 더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간 수많은 악마를 사냥하며 깨달은 건.

악마 사냥꾼의 전투만큼.

대 악마전에서 효율적인 전투가 없다는 것이다.

비로소 노가다 퀘스트의 의미를 깨달았단 거지.

“템페스트.”

“우우?”

“지켜보고 있거라.”

“아우우!”

악마 사냥꾼.

클래스 스킬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추가로 습득한 고유 스킬들을 제외하면.

내 스킬창에 있는 스킬 목록은…….

《Skill》

천적관계

구마의식

은 마스터리 (Master)

사격 마스터리 (Master)

동시 사격 (Master)

고작 다섯 개가 전부.

그게 일반적인 악마 사냥꾼의 스킬 목록이라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봐도 봐도 헛웃음만 스킬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봐도.

다른 클래스랑 비교했을 때도.

단출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오죽했으면 비전투 클래스들보다도 전투 스킬이 적었지, 아마?

하지만 그 간결함이야말로 악마 사냥꾼의 정신이었다.

“고작 악마.”

그렇다.

악마 사냥꾼에게 있어서.

악마 사냥은 거창한 게 아니니까.

“고작 사냥감에게 동요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

악마 사냥꾼에게 악마 사냥이란.

마다치 않는 일상과도 같은 행위였으니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사냥 기술 같은 게 아니다.

필요한 건 악마 사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체력.

그리고 그런 체력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보다 굳건해지는 정신력뿐.

악마 사냥에서 그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역시나 누군가는 말하겠지.

이번에도 말만 번지르르 내뱉는 게 아니냐고.

그렇다면 언제나처럼 보여주겠다.

실현해 내겠다.

나는 부산물의 영역, 살점으로 뒤덮인 필드로 나아갔다.

이미 필드의 변형이 끝났다는 건가.

메시지가 떠오른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출혈’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화상’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감염’을 거절합니다.]…….

한 걸음.

그저 영역에 들어선 것만으로.

까다로운 상태이상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한다.

그중엔 최상위 상태이상 ‘공포’도 존재하겠지.

그러나 공포를 거절했다는 메시지만큼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유야 간단하다.

또각─

첫 세계수의 축복 같은 게 없어도.

나는, 그랑펠은.

악마 앞에서 공포에 떨 이유가 없으니까.

슥─

그런 의미에서 이전과는 다를 거다.

탐색전은 아까 끝난 참이거든.

나는 검게 물든 귀철을 세워 들었다.

-주인이여, 나는 오늘 무엇을 베는 것인가?

사뭇 멋지게 들릴 법도 하거늘.

그랑펠을 빼닮은 작명 센스로 어떤 이름을 외칠지.

나는 악마보다 네가 더 두렵구나, 귀철아…….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다.

“부산물이다.”

-부산물이라……?

“의미를 부여할 가치조차 없는 찌꺼기란 의미다.”

복잡하고도 드높으신 긍지.

그랑펠어를 번역하자면.

진짜 태초의 악도 아니고.

그 부산물 따위를 상대하면서.

귀철에게 거창할 이름을 붙일 이유는 없다는 거겠지.

변함없이 고귀하신 이유시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다.

이번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으니까.

꾸욱─

그것이 고귀한 긍지 때문이든.

악크샨의 기본소양 때문이든.

뭐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단련을 빼먹지 않은 나였으니까.

그것도 매일같이 한계에 다다르는 단련을.

나의 ‘집념’을.

시스템은 외면하지 않았단 말이다.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집념의 효과는 나의 정신력에 비례한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력이라면.

시스템 기준으로도 고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서.

살점에 뒤덮인 필드는 내게 후광과도 같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대다수의 상태이상을 거절하고.

그랑펠의 긍지가 공포를 업신여기는 지금.

나의 모습은.

[집념이 근력으로 환산됩니다.]

[집념이 민첩으로 환산됩니다.]

[꺾이지 않는 집념으로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시스템조차도 착각하게 하기에 충분할 테니까.

[집념 : 5]

다섯 개의 포인트가 각각 근력과 민첩으로 환산된다.

전신의 근육이 움찔거린다.

누구한테는 숫자에 불과할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나는 눈으로 확인해야 와닿을 것 같아서 말이야.

슬쩍 상태창을 확인해 본다.

[근력 : 462]

[민첩 : 358]

이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총합 500포인트가량 상승한 스탯 포인트.

이 정도면 웬만한 전투계 랭커 플레이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스탯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악마 앞에서 전투력을 몇 배나 상승하게 하는 [천적관계].

슥─

그런 내가 휘두르는 검격은 간결했다.

평소와 다르게 화려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그럴 가치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숭덩─

잘려나가는 살점.

그 순간, 처음으로 주춤한 살점의 확장 반경.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초의 악이라.”

부산물 따위에 전하는 말이 아니다.

태초의 악쯤 된다면 어떻게든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 아냐?

살점을 통해서든 하늘의 마안을 통해서든.

그러니까 본체, 태초의 악, 너한테 하는 말이라는 거야.

“쓸데없이 거창한 수식어로군.”

그것은 도발도 기만도 아닌 진심.

“애써 부정하려 들지 말거라.”

그렇다.

빛이 어둠을 불사르고.

선이 악을 이겨내는 것처럼.

“태생부터 각인된 천적관계를.”

태초의 악이고 뭐고.

악마로 태어난 이상.

무슨 수를 써도.

악마 사냥꾼과의 천적관계를 피해 갈 순 없으니 말이다.

펄럭─

이번엔 재킷이 나부낄 정도로 귀철을 휘두른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 따위가 아니다.

우연이 겹치고 겹친 행운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적이고, 단순하고, 효율적인 악마 사냥꾼의 악마 사냥.

나는 절반으로 갈라진 부산물을 향해 읊조렸다.

“악크샨을.”

[악마, 태초 악의 부산물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움찔!

.

.

.

거기까진 악마 사냥꾼다웠다.

정말로 그럴싸한 그림이었다.

……그래, 허공에서 디엔드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

어떻게 이름 하나.

“디엔드가 한없이 깊으신 어둠. 동시에 한 줄기 빛. 동시에…….”

말 몇 마디로.

분위기가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단 말이냐?

애써 잡은 악크샨의 무게가 흩어질 수 있단 말이냐?

‘그놈의 다크니스만 아니었어도…….’

빌어먹을 내 팔자야.

……그래서 용건이 뭐냐, 디엔드?

아젠트레스가 듣기 전에 되도록 빨리 말해주라.

“드레드센. 그리고 제국의 구원자. 동시에 흑암룡. 동시에…….”

제발, 그놈의 이명은 적당히 좀 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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