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62화 (262/489)

◈ 262화. 그대와 그것의 이름은 (2)

아젠트레스가 묻는다.

“템페스트 오버 더……. 그게 그대의 이름인가?”

아니, 끔찍한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진짜.

‘……내가 앓느니 수치사하지.’

이 해괴망측한 작명 센스는 나아지는 법이 없구나.

그나저나.

악크샨 늑대에게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도 되는 건가, 싶었거늘.

“아우우─”

일단, 기뻐하는 거 같으니까 넘어가자.

물론.

그랑펠은 무엇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니.

“지평선의 폭풍. 그보다 적합한 이름도 없지 않은가.”

혹시라도 아젠트레스가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서는.

아주 그냥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주시고 계신다.

덕분인가, 아젠트레스가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의미라면 이해가 되는군.”

이쯤 되면 긍지가 문제다.

이따위 이름을 납득해 버리는구나.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또 아니긴 하지.

‘악크샨 늑대의 등장을 떠올려보면…….’

진짜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게 템페스트 뭐시기라는 이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거든. 다만, 그 포장지가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게 문제라는 거지…….

그러니.

“이호열.”

이호열 클라우디라고 내뱉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하자, 진심으로.

아젠트레스는 내 이름을 기억하려는 듯.

이호열, 이호열, 몇 차례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호칭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군.”

호칭?

그래, 뭐 좋다.

같이 영차영차 하자고 다짐한 이상.

언제까지 딱딱하게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나이로 보나, 세계수의 족보로 보나.

내 쪽이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게 맞는데…….

‘잘도 가능하겠다, 그게.’

그랑펠 성격에 가능하겠느냐고.

그렇다고 대놓고 맞먹자고 할 명분도 없었기에.

여기선 적당히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호칭은 허울에 불과하다.”

“……그런가?”

“그대가 원하는 대로 나를 불러도 좋다.”

“그렇다면……. 알겠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대화였거늘.

언제나 이놈의 주둥이.

입방정이 문제였다.

“유낙서스가 내게 경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

누가 봐도 대놓고 눈치 주는 거잖아, 이거?!

진심으로 그 철면피 한번 두껍다, 우리 그랑펠 님.

아젠트레스는 짐짓 놀란 눈치였다.

“음…….”

다른 드래곤도 아니고 유낙서스가.

내게 존댓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란 게 확실하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겠지.

‘사이가 워낙 나빴어야지.’

그래도 꼬박꼬박 아우라 불러주는 유낙서스와 다르게.

아젠트레스는 유낙서스를 형님은커녕 도마뱀이라고 칭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였다.

아젠트레스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도 그리하겠습니다.”

엎드려서 절 받기가 딱 이런 모양이겠지……?

어딘가 굉장히 민망하구나.

하지만 역시나 내색은 할 수 없었으니.

또 입방정을 떨기 전에 서두르자.

─태초의 악을 추적하라. (진행 중)

그런 나의 뜻을 알아차린 건가.

그게 아니라면.

역시, 악크샨 이름값을 한다는 건가.

킁킁!

템페스트가 콧잔등을 움찔거리며 태초의 악.

그 자취를 신속히 좇았다.

새삼스럽지만…….

이럴 땐 아르카나 대륙에 보는 눈이.

플레이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야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내 모습…….

‘상당히 가관이지 않을까?’

빠르게 움직일수록.

어깨에 걸친 여명의 재킷이 더욱 펄럭거리는 것은 물리적인 상식. 그것도 모자라서 과거 악크샨의 얼굴마담이었던 악크샨 늑대 위에 타고 있는 나였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외관이니만큼.

웬만한 랭커들은 그 정체를 전부 알아보게 될 터.

만천하에 광고하는 꼴이겠지.

나, 이호열의 클래스가 악마 사냥꾼이었노라고……!

물론, 클래스를 숨길 이유 따윈 없다. 단지, 이런 거추창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나의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구나.

이런 내 꼬라지를 보고 있는 게 아젠트레스와 하늘의 마안(魔眼)밖에 없었으니 말이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내세워 애써 감사하려던 순간이었다.

“!”

자취를 좇는 동선.

마치 그 앞을 가로막으려는 듯.

지평선 너머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눈으로 정체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

기척이 먼저 피부로 와 닿았으니까.

틀림없었다.

악마다.

그것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다.

“으르르!”

마찬가지로 알아차린 모양이군.

템페스트가 곧바로 방향을 전환.

악마가 꿈틀거리는 곳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악마라면 두고 보지 않는 게 심히 악크샨답구나.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쿠드드득!

황폐한 아르카나 대륙의 평야.

지면에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겨오는 악취.

출처를 알 수 없는 살점들이 어지럽게 엉겨 붙은 외관.

크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현실도, 균열도 아니기에.

업데이트 내역 같은 건 존재하지도 확인할 수도 없다.

그러나 떠오르는 메시지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짜 보통이 아니구나, 너?

[악마, ‘태초 악의 부산물’이 출현합니다.]

출현 메시지.

해당 지역에 출몰하는 몬스터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몬스터가 나타날 때 출력되는 메시지였다.

‘주변에 비교 대상 같은 건 없지만.’

그 대신 악마 사냥꾼의 감이 있었다.

웬만한 진명의 악마.

아니, 저 녀석은 마왕보다도 강하다.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가 그걸 증명한다.

[악마, ‘태초 악의 부산물’이 필드를 변형시킵니다.]

빙룡, 프로즈낙스가 그랬던 것처럼.

등장만으로 주변 일대가 변화되기 시작한다.

녀석의 살점이 빠른 속도로 지면을 뒤덮기 시작한다.

그 광경에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우연찮게 마주한 몬스터가 아니느냐고.

그런 게 어떻게 마왕보다 강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야.

하지만 간과하지 마라.

나는 평범한 목적으로 대륙을 가로지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태초의 악을 쫓고 있단 말이다.

태초의 악.

세계수와 드래곤, 엘프 사이를 이간질한 것도 모자라서.

선악과에 수작을 부리고 결국엔 세계수를 무너트린 존재였다.

그런 녀석이 얌전히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게 놔둘 리 있겠냐.

어때?

정답이지?

대답하듯 퀘스트 목표가 갱신된다.

─태초의 악을 추적하라. (진행 중)

●태초 악의 부산물을 처치하라. (진행 중)

클래스 고유 스킬을 보상으로 지급하고.

그걸 활용해 몬스터를 처치하고.

경험을 통해서 더욱 강해지고.

뭐, 이제야 좀 클래스 퀘스트다운 진행이긴 하군.

그래, 다 좋은데…….

‘이건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크지 않냐?!’

오죽했으면 아젠트레스가 말했겠냐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세계수의 축복을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엘프는 강하다. 엘시도어가 플레이어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악마족 몬스터를 순식간에 도륙 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곧장 뒤따르겠습니다.”

아젠트레스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나를 먼저 보내야 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거겠지.

그러니까 스케일이, 난이도가 너무하다고 한 거다.

아니, 이름부터 태초 악의 ‘부산물’이라면서?

‘저게 어딜 봐서 부산물이냐, 진짜.’

다르다.

악마는 물론, 마왕과도 느껴지는 기척부터가.

무엇보다 그 움직임에서 감정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순수하게.

악의에 의해 움직이는 느낌.

나는 입을 열었다.

“밑바닥 중 밑바닥이라는 건가.”

더욱 강한 악마일수록.

더욱 업신여기는 그랑펠의 주둥이다.

최악 중 최악이라는 건 굉장히 강하다는 의미겠지.

머리를 써보자, 호열아.

‘일단, 협공이다.’

그리고 견적을 내보자.

태초의 악, 그 부산물이라고 했나.

그 강함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왜, 추적하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부산물과 만나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으니까.

‘전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어.’

템페스트, 아젠트레스와 협공.

부산물을 빠르게 처치하고.

함께 태초의 악을 쫓는 게 어떻게 봐도 나은 판단이겠지.

물론, 그런 나의 철저한 계산 속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나는 물 흐르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템페스트 위에서 내려와서는 아젠트레스 옆에 섰다.

그리고 읊조렸다.

“그렇다면 그 밑바닥 너머, 지옥에 처박아 주마.”

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우우우!”

템페스트가 땅을 박차고 부산물에게 달려들었다.

과연, 지어준 이름에 걸맞은 속도다.

어느새 코앞.

콰직!

날카로운 이빨로 부산물의 촉수 하나를 물어서는 그대로 뜯어내 버린다. 감정이 없어서 그런가, 움츠러드는 기색은 없다. 그저 변함없이 살덩이를 꿈틀거릴 뿐.

‘고통도 느끼지 않는 건가.’

하긴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흑암룡 전설이 요동치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에 겁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거겠지. 지켜보던 내게 아젠트레스가 말했다.

“합세하겠습니다.”

이윽고 손아귀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력의 활.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깨우치는 그랑펠의 재능이다.

그렇기에 아젠트레스의 마력 활용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탐색, 간섭, 발현.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평범한 마법사가 갖가지 수식과 도구를 활용해 계산해 낸다면.

아젠트레스는 찰나의 암산으로 계산을 끝내는 수준.

게다가 엘프의 마법과 인간의 마법은 서로 다르게 발전했을 터.

이거, 신기하게 볼 게 아니었군.

“훌륭한 발현이군.”

그럼에도 그랑펠이 흡족하다 여길 정도였다.

히든피스, 시슬리로 향하는 포탈을 괜히 발현할 수 있던 게 아니란 거겠지. 그런 아젠트레스의 손아귀에서 떠난 화살이 부산물을 향해 뻗어 나갔다.

슈슉!

템페스트의 근접전.

아젠트레스의 원거리 지원.

완벽한 협공.

마왕은 물론, 거악이라고 할지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는 맹공이었다.

악크샨의 영물, 템페스트는 악마를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고.

아젠트레스의 공격은 치명타를 터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떠오르는 메시지는 없었다.

템페스트는 물론, 아젠트레스의 지휘권도 내게 주어진 만큼.

상태이상이 발생했다면 그에 관한 메시지가 떠올라야 할 터.

그럼에도 잠잠하다는 건 간단하다.

상태이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거기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군.”

나랑 비슷한 걸 가지고 있구나, 너도?

“축복이 있다면, 축복의 그림자도 있는 법이겠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수.

[첫 세계수의 축복]과도 대척점에 서 있는 ‘무언가’가 존재할 터.

아무래도 그게 상태이상을 상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한 번 괘씸하네?

진짜 깨라고 준 클래스 퀘스트 맞냐, 이거?

[첫 세계수의 축복]이 있어야 비벼볼 수 있는 악마라는 거잖아?

그 말인즉, 어쩌면 저건.

그리고 저거의 주인인 태초의 악을 쓰러트릴 수 있는 건.

[첫 세계수의 축복]을 독식한 나뿐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내게 주어진 짐이란 뜻이었다.

‘징징거리고 싶다만.’

사실 그랑펠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

어디 그랑펠이 악마를 지옥에 처박아 넣는 일을 마다할 위인인가?

그러니 망설임은 없었다.

“물러나거라, 템페스트.”

“크르르…….”

내 말에도 템페스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악크샨을 그런 꼴로 만든 악마를 용서할 수 없는 거겠지.

그러나 말했던 것처럼 이제 괜찮다.

나는 너그럽게 말했다.

“네 심정을 내가 안다.”

“으르르…….”

“나의 심정도 다를 것이 없으니.”

“……르?”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깊고 어두울지 모른다.

템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악크샨을 짊어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클라우디의 과거까지 얹고 있는 나와 그랑펠이었으니까.

그래, 악마에 관한 적대심을 따지자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배경을 가진 나였다.

하지만 말이야.

“알고 있지 않은가.”

“……?”

“부정적인 감정은 악마의 힘이 된다는 것을.”

“……!”

“설령 잊었다고 한들, 하나씩 일깨우면 되는 것이다.”

항상의 자세에는 이유가 있는 법.

템페스트는 그제야 부산물에게서 거리를 벌려 내 곁으로 돌아왔다.

아젠트레스가 부산물을 응시한 채 물어왔다.

“혼자서 상대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무래도 [첫 세계수의 축복]이 있는 내가 아니면.

저거한테 제대로 된 피해조차 입히지 못하는 모양이니까.

물론,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다.

나는 아젠트레스에게 대답했다.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겠군.”

“이런…….”

“허나, 훗날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겠지.”

“……?”

부디 그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주라, 아젠트레스.

나와 부산물의 전투에서.

녀석의 약점을!

나는 곧장 허리춤의 귀철에 손을 뻗었다.

검을 쥐기 전부터 느껴져 온다.

귀철의 고동이.

안달이 났던 모양이구나.

손에 쥐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여!

어우, 귀청이야.

그나저나…….

뭘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단 거냐, 불안하게?

-비로소 나의 전설을 펼칠 시간이로군!

뭐? 전설?

귀철, 너 설마…….

내심 흑암룡 전설을 신경 쓰고 있던 거냐.

뭐, 경쟁의식 그런 거라도 느끼고 있는 거야 설마?

그런 거라면 제발 그만둬라.

‘지금만 해도 충분히 벅차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아젠트레스의 예리한 눈이.

귀철의 비범함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으니.

내게 연거푸 정중하게 물어왔다는 것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 이름?

허상을 베는 검, 일루젼 브레이커, 그거?!

실례고 뭐고, 나 진짜 여러모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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