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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61화 (261/489)

◈ 261화. 그대와 그것의 이름은 (1)

붉은 표식(√)에는 기억이 담긴다.

그림자 용병단의 입단식을 마친 자라면 표식에 담긴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 해당 의뢰가 어떻게 성공에 이르렀는지,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는 의미다.

“…….”

키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표식의 기억을 읽었던 게.

숨겨진 의뢰 장부는 오직 한 명밖에 들춰볼 수 없다.

그림자 용병단에 두 명의 단장이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서열전』이 존재하는 이상은 말이야.

단원들의 서열과 마찬가지로.

용병단의 단장의 자리 또한 오직 실력에 의해 가려진다.

단장 자리에 올라서고 싶다?

전임 단장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뜻이다.

키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빌어먹을 기분인걸.”

그 이유를 막론하고.

의뢰 장부에는 자신이 베었던 전 단장.

그의 의뢰들도 기록되어 있다.

……뭐랄까.

자신이 죽인 사람이 일기장을 들춰보는 기분이랄까.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그 기억까지 엿보는 건 역시나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후우.”

모든 것은 단장으로서 감내해야 할 무게.

의뢰 장부에 굳이 기억을 새겨넣는 이유도 그와 일맥상통한다.

기억을 남김으로써 차기 단장에게 경험과 지식을 승계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그림자 용병단이 『서열전』이라는, 잔혹한 제도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키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

클라우디 암살 √

──────

모험가들의 세계에 현현한 마왕.

그 악마가 부르짖던 이름.

클라우디.

의뢰의 기억을 읽기 위하여 표식에 손가락을 얹었다.

꾸물꾸물─

붉은 표식이 녹아내린다.

피처럼 붉은 액체가 되어 피부에 스며든다.

그와 동시에 키치의 눈앞에 환각이 떠올랐다.

.

.

.

-“악마의 의뢰라. 갈 데까지 갔군. 우리도.”

비아냥거리는 말투.

키치는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갓 그림자 용병단에 입단했을 무렵.

3석을 차지고 있던 베라미의 목소리였다.

그 얼굴이 노년이 아니라 풋풋한 걸로 봐선.

의뢰를 성공한 시기는 꽤나 이전인 듯싶었다.

-“흔한 악마가 아니다.”

-“엥? 악마는 다 똑같은 악마 아닌가요? 나약한 인간들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족속. 악명을 얼마나 떨쳤든, 악크샨이 뜨면 벌벌 떠는 새끼들이잖습니까?”

-“저도 베라미 말에 동감. 거악이니, 마왕이니 떠들어대는 건 악크샨밖에 없잖아요? 노친네들도 안 믿는 헛소리를 떠드는 이유가 뻔히 보인달까? 결국, 밥벌이 때문이라는 거죠!”

선배님들의 감은 영 별로였다.

‘지옥에서 아르카나 대륙 꼴을 보고 있다면…….’

부끄러워서 몸서리를 치고 계실지도?

뭐,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죽어버린 거겠지만.

하지만 단장만큼은 달랐다.

-“악마, 거악, 마왕. 그게 뭐가 중요하지?”

-“……대장?”

-“보수를 받았으면 해내라.”

표식을 새겨넣은 자.

기억은 단장의 시점으로 흘러갔다.

덕분에 베라미의 표정 변화가 선명하게 보였다.

평상시에 얼마나 세게 기강을 잡았던 걸까.

말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그 베라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이 나와 너. 우리 같은 쓰레기들이 대륙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목적? 감히 알려고 들지 마라. 우리가 살아있는 건 우리가 오직 돈에 움직이는 쓰레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림자 용병단이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올 수 있던 이유?

누군가는 그 실력을 꼽는다.

그러나 틀린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

오는 의뢰를 가리지 않고 수행하면서.

수많은 원한을 쌓고 다녔음에도.

그림자 용병단으로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이 오직 보수에 좌우되는 쓰레기들이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 암살도 마찬가지였겠지.

-“명심해라. 흔히 있는 기회가 아니다.”

단장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덕분에 키치도 흘러가는 장면에 조금 더 집중했다.

이윽고, 의뢰의 표적과 조우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키치는 흠칫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무언가.

그것은 은발의 머리칼이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똑같아.’

그래,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고용인인 호열과 같은 머리카락 색이었다.

순간,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떠돌던 소문이 떠올랐다.

호열이라면.

클라우디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갖가지 추측을 쏟아내던 이들.

키치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

총대장, 그는 클라우디의 관련자였다.

표적, 클라우디와 같은 머리색을 가졌을 정도로 깊은 관련이 있는.

어쩌면 클라우디의 혈통일지도 모르는…….

키치가 추측을 이어가던 순간이었다.

멈칫─

-“!”

은발의 여인이 그림자 용병단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화려한 귀족 차림새에 무기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걸로 보아선 무(武)에 식견이 있어 보이진 않았거늘.

-“우리의 은신을 간파해 낸 건가?”

-“역시, 위대한 혈통이 좋긴 좋군.”

-“쫓아라.”

단순히 타고난 감각으로 그림자 용병단의 은신을 감지한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표식의 기억을 읽는 건 개 같은 경험이었다.

키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 죽인 건데.’

키치가 새로운 단장으로 취임한 뒤.

그림자 용병단의 활동은 이전과 다르게 줄어들었다.

서열전과 장부가 존재하는 이상.

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력의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그림자 용병단이다.

그런 그들의 활동이 뜸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단장, 키치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라면 이런 의뢰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키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림자 용병단에 몸을 담은 이상.

이 또한 단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였기에.

키치는 표적의 최후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템페스트!”

표적이 이름을 외친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사냥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고상한 외관, 개의 이름치고는 거창한 이름에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게 티가 나는 사냥개였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일까?

-“빌어먹을 개새끼가……!!”

은혜를 갚으려드는 듯.

사냥개는 육신이 갈가리 찢겨나가서도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그림자 용병단에게 달려들었다. 말석에게는 치명상을 입히고, 베라미의 팔뚝에도 상처를 남겼다.

‘저 상처가 이때 생긴 거였구나.’

훗날 키치가 알아볼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하지만.

그뿐이었다.

-“위대한 가문의 영애여. 도움을, 기적을 바라지 마라.”

거악의 의뢰.

오래전부터 그림자 용병단에 내려오던 의뢰였다.

그것이 베라미의 대에서 행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적절한 시기였으니까.

-“그대들을 노리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짐작하고 있었다.

멸문도 아닌 고작 한 명의 암살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귀족 영애.

그림자 용병단에겐 숨쉬기와도 다를 바 없는 목표가 어째서 오랫동안 완료되지 않았는지를.

그건 분명 클라우디 가문, 물불 가리지 않는 그림자 용병단조차 주제 파악을 하게 하는 그 이름값 때문이었겠지.

‘……잠깐.’

대륙의 뒷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키치였다.

하지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림자 용병단에게 고작 영애 하나를 맡겼다면.

같은 시각.

‘그 가주나 후계자는…….’

대체 어떤 세력에게 노려지고 있단 말인가?

당연하게도.

키치는 그에 관한 답을 알 수 없었다.

스스스─

흐려지는 환각.

가차 없이 표적을 제거한 덕분에.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는 그걸로 끝이 났으니까.

.

.

.

“…….”

다시금 시야에 들어온 건 장부.

붉은 성공 표식(√).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인 아지트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키치는 입을 열었다.

“정말.”

문득, 하르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대는 과거를 후회하는가?”

“정말로요.”

그와 동시에 호열을 떠올렸다.

‘……얽혀도 이렇게 얽힐 줄은 몰랐는데.’

잊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자신들은 쓰레기라는 사실을.

쓰레기처럼 살아왔기에.

결국 이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거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제가 짊어지면 괜찮은 거잖아요?”

키치는 그 과오를 온전히 홀로 짊어질 생각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유스라에서의 일상.

주점에서 온종일 주정을 부리고, 평범하게 사람들과 섞여 사는 삶이라니. 그 녀석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다들 즐거워하고 있었으니까.

“혼자서 온전하게 말이죠.”

그림자 용병단의 원죄.

짊어지는 건은 단장, 자신의 역할이었다.

물론, 그것을 호열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만.

키치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당신께서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요.”

거창하게 ‘긍지’라 표현할 생각은 없었다.

쓰레기와 다를 것 없는 자신에게 그런 고귀한 단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 뭐가 적당할까…….

고민하던 키치가 입을 연다.

“……고용인을 위한 자발적인 행동?”

그와 동시에 클라우디에 관한 속죄.

생각을 마친 키치는 장부를 덮고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할 일은 간단하다.

“이래 봬도 전문이거든. 이런 쪽으로는.”

클라우디.

위대한 가문.

그들이 역사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의뢰에 착수한 그날.

클라우디의 멸문에 어떤 세력들이 가담했는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호열에게 자신이 알아낸 모든 것을 고하는 것.

“……벌써 춥다.”

그 차가운 얼굴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키치는 벌써부터 혀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안토니움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

*

RPG 게임의 약속이자 상식.

나중에 습득하는 스킬일수록 그 성능이 뛰어나다.

그런 관점에서 [악크샨의 수호령]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스와아악!

드래곤, 유낙서스의 등에도 올라타 봤던 나였거늘.

악크샨 늑대, 유낙서스 못지않게 빠르다.

아니, 애초에 빠르다의 기준이 조금 다르다.

비유하자면 공간을 내달리는 기분이랄까?

왜, 그 등장도 단순한 소환이 아니었다.

정말로 내 부름을 듣고.

하울링으로 화답까지 한 뒤에.

시슬리까지 달려온 모양이었으니까.

‘확실히 비범하다.’

악크샨의 얼굴마담.

그 능력을 칭찬해줄 법도 하거늘.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아직 가르칠 것이 많구나.”

거, 클라우디 기준 한번 깐깐하네.

빠른 기동력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다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성격에는 만족이라는 법이 없다.

듣는 늑대로선 서운할 법도 했건만.

“아우우─”

……오히려 좋아하고 있잖아?

고양이, 탑주처럼 얄밉게 꼬리를 살랑거리는 게 아니다.

정말로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건지 엉덩이까지 들썩이고 있다.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러워진다.

‘그 정도로 사람이 그리웠던 건가.’

악크샨이 전멸한 후.

사람과의 조우는 이게 처음일 테니까.

그저 뭐든 반가운 거겠지.

물론, 나의 감정적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나는 곧 깨달았다.

무려 악크샨의 수호령이었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과 마찬가지로.

노가다 퀘스트, 단련에 환장한 족속이라는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건 아젠트레스 덕분이었다.

엘프.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

덕분에 늑대의 말을 알아듣고는 내게 말했다.

“무언가를 굉장히 고대하고 있군.”

순간, 늑대에게 겹쳐 보이는 악크샨 선배님들의 얼굴.

그래, 근질거리는 몸과 마음은 알겠다만.

우리, 단련은 잠시 나중으로 미뤄두는 게 어떨까?

왜, ‘태초의 악 추적’이라는 막중한 퀘스트 목표가 있잖아?

시슬리에서 다시 아르카나 대륙으로.

[전설이 요동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이놈의 메시지는 봐도 봐도 거창하다.

하여튼, 흑암룡 전설이 요동치고 있는 덕분에 악마들의 기척은 여전히 미약했다. 하지만 [천적관계]는 어김없이 발동. 게다가 이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악마를 향한 증오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악크샨 늑대가 함께였으니.

“아우우우우─!!”

대륙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호령, 악크샨 늑대가 ‘천적관계’를 발동합니다.]

너, 진짜 뼛속까지 악크샨이었구나!

[천적관계]의 효과.

악마와 전투 시, 전투력 대폭 상승.

그 효과를 증명하듯.

악크샨 늑대의 기세가 맹렬하게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오죽했으면.

아젠트레스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걸어왔겠냐고.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공손한 질문이다.

답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굉장히 흡족하다.

왜냐니, 당연한 거 아냐?

[전설, 흑암룡]도 모자라서.

[수호령, 악크샨 늑대]까지 습득하게 된 지금.

이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대의 이름을.”

내 정신 좀 봐.

내 소개조차 잊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대가 올라탄 늑대의 이름을.”

악크샨 늑대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뿔싸.

내가 멈칫하기도 전에 그랑펠이 먼저 입을 연다.

늑대의 이름을 뱉는다.

“템페스트 오버 더 호라이즌(Tempest over the horizon).”

아니, 진짜.

정말로.

우리 애들 이름 좀 상의도 없이 짓지 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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