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내게 맡겨라
새롭게 개방된 시스템, [전설].
그 효과는 습득한 전설을 실체화하는 것.
실체화라고 해서 내가 진짜 흑암룡으로 변신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랑펠식 화법은 주어를 밥 먹듯 생략해도.
나는 주어를 똑바로 보고 있다고.
그렇다.
흑암룡으로 실체화하는 건 내가 아니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전설’이다.
내 의지로 실체화시킨 전설이어서인가.
굳이 뒤를 돌아서 확인하지 않아도.
확실하게 느껴진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아젠트레스의 동공이 거울처럼 나의 모습을 비춘다.
잔잔하게 펄럭거리는 여명의 재킷.
그 뒤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검은 형체.
저게 바로 실체화한 나의 전설, 흑암룡이다.
‘이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백 번 설명한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겠어?
한 번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하지만 막상 전설을 실체화한 나도 흠칫할 정도였다.
그게 흑암룡이라는 게 커도 너무 컸거든……!
‘……뭔데?’
솔직하게 말하겠다.
‘흑암룡 이호열’이란 전설을 습득했다는 메시지를 목격한 나는 기쁘지 않았다. 수치심을 떠나서 그 전설이란 걸. 내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나, 의구심이 앞섰거든.
‘그야 또 겉만 그럴싸할 것 같았으니까.’
언제나 말하지만 내 특기는 주제 파악이다.
더 나아가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에서 프로즈낙스와 사투를……. 아니, 훈육을 하며 드래곤과 인간의 체급 차이를 여실히 실감했던 나였다.
‘아마 [천적관계]가 발동됐어도 졌을 거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유낙서스와 협공해도 프로즈낙스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한 나였으니까. 막말로 세니오스의 공략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몇 합 만에 황천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전투력만이 아니야.’
다른 관점으로 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드래곤들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것과 다르게.
나는 포탈을 발현하는 데 마력 탈진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심지어 접속기의 구조를 모방하지 않았다면 그조차도 불가능했겠지.
그러니까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단 것이다.
겉만 그럴싸한 내가.
흑암룡 전설을 실체화해 봤자.
겉만 더더욱 그럴싸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거, 예상이랑 조금 다르다.’
우선,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겉이 그럴싸하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실체화한 흑암룡은 거대했다.
유낙서스보다는 물론, 프로즈낙스.
아니, 전룡을 통틀어도.
지금 내 뒤에 실체화한 흑암룡보다는 그 덩치가 작았다.
그러니 유낙서스를 도마뱀이라 부르는 아젠트레스도 놀란 거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거대한 덩치만큼 시선 또한 높디높을 터.
과연, 모든 것을 내려다 살펴보는 흑암룡답구나.
‘진짜…….’
흑암룡 이호열 전설,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저런 도마뱀은 보고 들은 적이 없단 말이다!!”
어째, 이젠 잔머리 굴릴 여유조차 없어졌나 본데.
여태까지 고분고분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아젠트레스가 노골적인 적의를 띠고 말해온다.
대답이야 어렵지 않지만, 굳이 하고 싶지 않군.
‘아무리 그래도 내 입으로…….’
저게 나의 전설.
흑암룡이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 쫌……!
그러니까 나는 그랑펠식 화법을 빌려 왔다.
태연하게 지껄였다는 것이다.
“보고 있지 않은가.”
“……!”
“그대들이 보고 있는 그 자체다.”
나의 말에 화답하듯.
실체화한 흑암룡이 움직인다.
유달리 거대한 날개를 한 차례 들썩인다.
그것만으로 엄청난 풍압이 일어난다.
‘……깜짝이야.’
다시금 말하지만, 내가 흑암룡이 된 게 아니다.
내게서 비롯된 전설이 흑암룡이 된 것이다.
그런 흑암룡의 통제권은 내게 있지만.
일거수일투족까지 신경을 쓸 순 없다는 뜻.
쉽게 비유하자면…….
‘충직한 분신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인 거지.’
하이엘, 디엔드, 귀철과 다르게.
실체화시킨 이상.
누구라도 알아차리게 되는.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거대한 분신이 말이야.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
내가 이렇게 수치심을 무릅쓰고 친절하게 보여줬으니까.
아젠트레스, 너도 이해가 됐겠지?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이로써 그대들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믿겠다.”
“…….”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흑암룡에 놀라서인가.
아젠트레스는 분한 듯 입을 다물고 반박하지 않았다.
‘드래곤과 엘프, 강제 화해 성공인가.’
어째 아젠트레스의 표정에서 어린 시절.
치고받고 싸우던 나와 웬수가 겹쳐 보이는군.
나도 그땐 억지로 포옹하고, 강제로 화해하곤 했었지.
‘덕분에 그 감정을 이해한다만.’
어쩔 수 없다.
막말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감정의 골이다.
그 깊은 골을 천천히 회복시킬 자신은 없다.
이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나중 가면 이런 것도 다 추억 아니겠냐?
내가 웬수랑 싸운 걸 추억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젠트레스는 몰라도, 유낙서스는 기뻐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내가 신경 쓸 건 등 뒤의 흑암룡이다.
우선 마력의 잔량을 확인해 보자.
완전히 새롭게 개방된 독자적인 시스템이라 그런가.
‘일단, 마력 소모는 없다.’
기왕 실체화했으니.
효과의 한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무엇보다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하다.
어째서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닌.
진짜 드래곤 못지않은.
아니, 진짜 드래곤을 능가하는.
흑암룡이 튀어나온 건지 알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사실 짐작되는 바가 있기는 하다.
‘전설은 나의 강함에 비례하는 게 아니야.’
널리 울려 퍼질수록 해당 전설이 강해진다고 했겠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고.
흑암룡 이호열 전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울려 퍼졌는지를.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이거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드래곤의 주둥이…….’
그것도 보통 드래곤의 입이 아니다.
유낙서스와 동시대를 살아온 대지룡.
쿠드하낙스의 드래곤 피어로부터였다.
그 우렁찬 목소리 덕분에.
전룡 앞에서 흑암룡이라는 이명(異名)이 알려졌고.
그게 하이엘을 통해서 드워프들에게.
드워프를 통해서 황제에게.
황제를 통해 제국에, 아르카나 대륙에 울려 퍼졌겠지.
충분히 끔찍한 일이거늘, 거기서 끝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
모험가들의 세계이자 나의 고향.
현실에서도 흑암룡에 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아르카나 대륙보다 더하지 않을까.
현실은 악마에 의해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 비하면 무사하다. 그것도 모자라 현실에는 어떤 소식이든, 순식간에 세계로 전달할 수 있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던가.
예를 들자면 뉴스 속보나 SNS처럼……! 덕분에 흑암룡에 관한 떡밥이 최소 수억, 수십억 번씩은 떠돈다는 의미다.
그러니 [전설] 시스템이 개방된 시점에서.
흑암룡은 실시간으로.
한계 없이 강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다른 두 세계에서 회자되는 전설이다.
그래, ‘흑암룡 이호열’ 전설은.
그 이름만큼이나 [『기이』]한 전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했어.’
한 줄 요약하자면.
흑암룡은 나를 둘러싼 갖가지 과대평가와 소문들이 실체화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진짜 드래곤과 비교하더라도 밀리지 않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다.
‘나, 정말 엄청난 걸 개방했구나.’
[전설] 시스템, 장난이 아니잖아?
물론, 효과가 상당한 만큼.
지속시간이 길 리가 없었다.
[‘흑암룡 이호열’이 전설이 되어 흩어집니다.]
그저 지속시간이 다한 것뿐이었거늘.
진짜, 입만 살아서는.
나는 그랑펠식 표현으로 감상을 내뱉었다.
“전설은 세상을 떠돌 때 비로소 전설인 법.”
하루라도 허세를 자제하면 덧이라도 나는 거냐, 그랑펠.
어쨌든, 이걸로 확실하게 알게 됐다.
[전설]은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능력이란 걸.
‘기껏 개방한 거 하나에 만족할 순 없지.’
지금이야 ‘흑암룡 이호열’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훗날 또 다른 전설을 습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한마디로 써먹을 구석이 많은 능력이라는 뜻.
어디보자.
새로운 능력에 관한 파악도 끝났겠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아젠트레스를 바라봤다.
그럼 슬슬 목적지, 시슬리로 출발할까?
*
시슬리.
고오오─
아젠트레스가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로 호열이 발을 내디뎠다.
분명, 계획했던 대로다.
시슬리에 건방진 인간을 데려왔거늘.
아젠트레스는 기쁘지도, 마음이 놓이지도 않았다.
그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참을 수 있었다.’
클라우디.
그리고 어머니의 축복.
두 번의 굴욕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도마뱀이……?’
그러나 세 번째 굴욕.
놈의 뒤에서 드래곤이 나타날 줄이야.
아젠트레스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드래곤은 마력으로 빚어낸 환상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진짜 드래곤도 아니었다.
어찌 확신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토록 검고 거대한 도마뱀은 본 적이 없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커다란 날개는, 한 번이라도 목격했다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가 걸렸다.
만물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은 분명 드래곤의 그것과 비슷했다.
빠득─
자신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 시선과.
아젠트레스는 호열을 흘겨봤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사내와 도마뱀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와 동족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폭발 직전의 아젠트레스.
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건 동족들의 반응이었다.
‘기뻐하다니, 미련하다.’
나약하다.
전부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기뻐한단 말이냐.
동족들은 그저 시슬리로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축복이 코앞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잘근─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도 나의 실책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완전한 시슬리에 머문 것이 오히려 동족들에게 독이 되었단 말인가? 아젠트레스가 좀처럼 동요를 진정시키지 못하던 때였다.
호열이 입을 열었다.
“과연, 기대대로군.”
아젠트레스는 속으로 대꾸했다.
‘네놈이라면 알아보겠지.’
시슬리가 얼마나 완벽한 땅인지를.
시슬리는 하찮은 아르카나 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어머니, 세계수가 선택한 땅이니까. 그 기대치가 얼마나 높았건 시슬리는 그것보다…….
“기대하지 않은 그대로다.”
……발끈!
“!”
아젠트레스의 머리가 말했다.
이 순간, 적대심을 드러내 봤자.
어머니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과 동족들은 놈에게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경계심을 키울 수 있는 불필요한 행동이다.’
그러나 가슴이 소리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모욕은 참을 수 있을지라도.
자신들이 택하고, 어머니가 뿌리를 내렸던 시슬리였다.
그런 시슬리를 모욕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다고.
결국, 아젠트레스는 참지 못했다.
“그 건방진 혀로 시슬리를 모욕하지 마라.”
설령 자신들이 어머니의 기대를 져버렸을지언정.
어머니가 시슬리에 뿌리를 내리고.
묻혔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으니까.
“네놈은 시슬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젠트레스가 맹렬하게 호열을 노려본 순간이었다.
호열의 시선이.
시슬리의 풍경에서 아젠트레스로 옮겨졌다.
이내,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모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뭐라고?”
“그대에게는 들리지 않는가.”
대체 무엇이 들린단 말이냐?
“악마의 비웃음이.”
“……!”
비웃음?
그보다 시슬리에 악마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슬리는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땅이다.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자신과 동족.
그리고 도마뱀들뿐.
열등한 악마가 어찌 시슬리에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심정으로 호열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호열이 말을 이었다.
“착각이었군.”
“착각이라니, 무슨 의미지?”
“시슬리는 그대들의 땅이 아니다.”
더없이 충격적인 말을.
“애초부터 악마의 땅이었다.”
.
.
.
[히든피스, 시슬리에 진입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전신으로 와 닿는 악마의 기척.
악마 사냥꾼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시슬리의 악마는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그 증거가 메시지로 떠올랐다.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절멸의 위기에서 세계수는 씨앗을 뿌리기 위한 열매를 맺었다. 허나,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열매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고 나뉘어 맺히게 되었으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선과 악을 분리한 죄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성공)
─시슬리에 뿌리내린 태초의 악과 조우하라. (진행 중)
그래.
선악과가 시작이 아니었구나.
태초의 존재, 세계수부터 악에 물든 거였어.
‘태초의 악이라니. 이름부터 요란하구나.’
그러나 상관없다.
뿌리가 잘못되었다면.
뿌리부터 바로잡으면 되는 일.
‘내가 누군데.’
그렇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
세계수를 포함한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의 소유자.
마지막으로 [히든피스, 품격의 화원]의 주인.
이 복잡한 상황에 더없는 전문가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