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부탁이 아니다 명령이다 (2)
클라우디 가문의 설정.
드래곤에 관한 설정도 끄적거렸던 나였는데.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치는 건 몰라도.
내가 엘프를 그냥 지나쳤겠냐고.
심지어 엘프에 관한 설정은 드래곤보다도 구체적이었다.
그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엘프에 관한 소문은 드래곤보다 많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싸가지 없기로.’
시슬리에서 대부분을 보냈다는 엘프였다만.
드래곤과 다르게 엘프는 시스템상의 이유로 구속되지 않았다.
왜, AAU의 정보에서도 그에 관해 명시되어 있었지.
‘몬스터가 아닌 NPC 역할이었으니까.’
실제로 엘프는 대격변 이전.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몇 차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러니까 싸가지 없다는 소문도 떠돌았던 거고.
그 무성한 소문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왜, 엘시도어의 첫 등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악마를 가차없이 썰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까지 문답무용으로 공격했던 엘시도어였으니까. 뭐, 지금이야 화원의 잡초나 썰고 있지만…….
‘엘프가 만만치 않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이호열.
나의 치기가 가만히 있었겠냐고……!
『클라우디와 엘프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엘프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상.
좋은 건 다 때려 박으려는.
중2병 감성이 도지는 건 당연한 일.
『엘프는 클라우디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분명 하찮은 인간이거늘. 그 어떤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도 부족한 구석이 없는 클라우디의 존재를.』
진짜 중증이었다, 호열아!
‘설명하기도 싫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직접 적어서 그런가 알량한 의도가 훤히 보인다. 아마도 그랑펠의 수려한 외모에 관한 추가 설정이 필요했던 거겠지, 과거의 나란 놈은…….
그러니까.
‘엘프도 질투할 정도의 외모 설정이라니.’
지독하게 부끄럽다, 과거의 나야……!
디엔드가 흑역사를 일깨워 준 덕분에.
그 뒤로 이어지는 설정들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찬란하게 빛나는 클라우디의 상징.
은빛 머리칼은 엘프조차 가지지 못한 것이었으며.
아름다움을 찾아 살피는 심미안 또한 엘프에 뒤처지지 않았고.
더 나아가 드높은 품위는 엘프조차 주눅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런 전적이 있는 나였기에.
지금 내게 쏟아지는 적대적인 시선이 이해가 간다.
정말로 물이 기름을 밀어내듯.
‘……눈빛 한번 살벌하다, 다들.’
일백(一百)의 엘프가.
나를 향해 거친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곧장 [축복의 위계질서]를 내세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들이군.
왜, 한 명만 빼고 말이야.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엘프의 지도자, 아젠트레스.
그의 표정은 다른 엘프들과는 사뭇 달랐다.
적대적이기보다는 경악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역시, 너는 알고 있는 거구나.’
클라우디 가문의 존재를.
그러니까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란 거겠지.
물론, 처지를 바꿔 생각해 봐도 놀랄만할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이 시기할 정도로 거슬리는 인간들이 있었는데.
그런 인간 중 하나가.
난데없이 어머니의 축복을 드러내며 나타난 꼴이니까.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까 흉신악살처럼 인상을 구겨도 이해한다.
근데, 말했다시피 그렇게 노골적으로 협박해도.
내가 겁먹을 이유는 없어서 말이야.
아까도 말했잖아.
‘격’이 다르다고.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착각하고 있군, 아젠트레스.”
“……?”
“그대는 무언가를 용납하는 위치에 있지 않지 않은가?”
“……!!!”
어떠냐, 자존심을 박박 긁는 그랑펠의 화법이.
근데, 어째 아젠트레스 당사자보다도.
나머지 엘프들이 더 충격을 받은 눈치다.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저런 모욕을 듣고만 계시는 거지?”
“조용히 해. 다 생각이 있으실 거다.”
“그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얘네,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봤구나?
‘진짜 오냐오냐 자란 모양인데.’
하긴 시슬리라는 온실에서 제대로 나온 적이 없을 테니까.
어리둥절한 반응도 이해가 된다.
아마도 모든 게 처음이겠지.
그탓에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어떠한 입장인지.
어째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어째서 아젠트레스가 상황을 보고만 있는지를.
사실 말로 설명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너희 현행범이라고.
아무리 마왕을 사냥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 의도가 더없이 불순했다고.
나는 역시나 속을 박박 긁는 화법으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우습지 않은가, 아젠트레스?”
아젠트레스가 빠득─ 이를 갈았다.
“……우습다?”
“고작 영생을 위해서 악마의 힘을 빌겠다니. 그대들은 그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족속이었나. 그러면서 격을 운운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심히 유감이군.”
“닥쳐라.”
당연하게도.
나는 닥치지 않는다.
아니, 그걸 넘어서 한술 더 뜰 거거든?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말이지.
“과거에도, 지금도 주제를 알지 못하는 자존감에 유감을 표하겠다.”
“……!”
갑자기 웬, 자존감 타령이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
다른 엘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건 이해한다.
이건 클라우디와 엘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아젠트레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모욕이었으니까.
특히 ‘과거에도’가 포인트라고.
‘클리우디 가문, 자존감 참 대단하다…….’
역시 알아들은 거겠지.
아젠트레스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러나 마냥 말대꾸를 듣고 있을 정도로.
‘나도, 그랑펠도 친절한 편은 아니라서 말이야.’
심지어 그냥 악마도 아니고.
거악과 거래를 하려고 한 시점에서.
그대들에겐 더더욱 자비는 필요하지 않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꿇어라.”
“!!!”
확실하게 깨닫게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세계수, 드래곤, 선악과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엘프들의 태도가 불순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렇다.
훈육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털썩!
내 말에 아젠트레스를 비롯한 엘프.
전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고개가 저절로 땅으로 떨어졌다.
심히 부담스러운 광경 속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거창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짓밟은 마왕성이다.”
“……?”
“자신들의 행동에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전까지.”
쉽게 말하자면.
“일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무릎 꿇고 반성 좀 하라는 소리야.
.
.
.
부들부들.
‘내가,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다고……?’
태어나 세 번째로 느껴보는 굴욕감이었다.
아젠트레스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러고는 굴욕감을 곱씹었다.
첫 번째로 느꼈던 굴욕은 도마뱀을 향한 열등감이었다.
드래곤, 그들은 더없이 완벽한 족속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축복이 있었기에.
태생적인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느꼈던 굴욕은 아르카나 대륙에서였다.
인간, 그 하찮은 족속에게 굴욕을 느끼게 될 줄은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꽃처럼 만발했다고 한들 금세 시들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세 번째, 지금 느낀 굴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두 번째 굴욕을 맛보게 했던 은빛 머리칼, 클라우디. 대륙에 돌아왔다는 그가 어머니의 축복을 앗아간 존재였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빌어먹을.’
치미는 분노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들은 저 사내의 말에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무릎에 느껴지는 차디찬 바닥이 그 증거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였다면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았겠지.
그러나 동족들이 있었다.
시슬리의 품에서 아무런 위해 없이 지내온 탓일까.
기본적인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는 가엾은 동족들이 말이다.
아젠트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굽히겠다.’
허나 영영 굽히겠다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재차 굴욕을 선사했다고 한들, 인간에 불과했다.
아젠트레스는 자신이 있었다.
놈의 의식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그 목을 취할 자신이.
제아무리 어머니의 축복을 거머쥐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치고 대단한 육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살아온 세월에서 비롯된 경험은 비교되지 않을 테니.
아젠트레스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협조하겠다.”
“……!!!”
순간, 동족들의 동요가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다.
아젠트레스는 생각했다.
‘녀석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의식의 허점을 유도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 첫걸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가치를 깨달았는가?”
아까부터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인가?
아젠트레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깨닫지 못했다.
마왕성이 보였기에 쳐부쉈을 뿐이다.
물음에 답하지 못했기에 쳐죽였을 뿐이다.
그 행동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아젠트레스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해를 바란다.”
그러자 대답이 이어졌다.
“과연, 기대대로군.”
“……?”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대로라는 의미다.”
……저건 마왕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아닌가?
그 말인즉.
사내의 시선이 악마를 바라보던 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동족을 위해.
어떤 치욕도 참겠다던 아젠트레스의 인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그러니 이해하지. 그것만으로도 발전이라 할 수 있으니.”
“…….”
이유야 어찌 됐든.
아젠트레스는 곧 고개를 들 수 있었으니까.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기 무섭게 사내가 말해온다.
“내가 그대들을 찾은 목적은 간단하다.”
“협조하겠다. 말해라.”
“나는 시슬리에 진입하길 원한다.”
시슬리라니.
고작 인간이 시슬리에 어떤 목적이 있단 말인가?
아젠트레스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시슬리는 자신들의 고향이었다.
더 나아가.
‘놈에게는 낯선 장소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실수와 방심은 잦아지는 법.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신이 거악, 식탐의 행적을 놓쳤던 것처럼.
시슬리에서라면 사내도 분명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알아서 일이 풀리는구나.’
그 틈을 노려 놈의 숨통을 거둘 수 있다면.
어머니의 축복 또한 자신들에게 돌아올 터.
번거롭게 시슬리로 복귀할 수고까지 던 셈이 아닌가.
아젠트레스는 기쁜 내색을 숨기고 말했다.
“약속한 대로, 협조하겠다.”
그러니 당장 제약을 풀어라, 건방진 인간.
아젠트레스가 그런 심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던 때였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뭐든 좋았다.
놈을 시슬리로 데려갈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이 이어진다.
“그대들은 드래곤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갑자기 도마뱀을 언급한다고?
끝까지 나의 심기를 건드는구나, 인간.
아젠트레스는 화를 억누르고 되물었다.
“묻는 의도가 무엇이지?”
그러자 기어코 화를 돋구려는 말이 돌아온다.
“그대들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작 인간이.
드래곤과 엘프의 사이에 관여하겠다는 것인가?
엘프인 자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만하신 만물의 왕.
도마뱀들께서도 이런 발언은 들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그러니 대답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의심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아젠트레스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뱉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나쁠 것은 없겠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만물의 왕께선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그때부터였다.
의아한 일이 벌어진 것은.
사내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말했다.
“그렇다면 이로써 관계는 회복되었다, 믿겠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단 말인가?
자신들에게 달린 게 아니다.
드래곤의 생각에 달린 일이다.
분명하게 말했거늘.
마치 도마뱀들의 의사를 확인한 것처럼…….
‘확신을 한다……?’
의문을 가진 와중이었다.
“……?!”
아젠트레스의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뒤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형상.
틀림없었다.
아젠트레스가 말을 더듬었다.
저건……!
“드, 드래곤……!”
.
.
.
아젠트레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런데, 방금은 확실하게 실수했군.
감히 ‘흑암룡’ 앞에서 드래곤의 의사를 묻다니 말이야.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실체화합니다.]
자,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