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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56화 (256/489)
  • ◈ 256화. 부탁이 아니다 명령이다 (1)

    [심미]나 [집념]을 습득.

    혹은 [칭호] 시스템을 개방했을 때처럼.

    [전설]에 관한 지식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거 말로 설명하기가 좀 그렇다……?

    앞서 언급한 스탯들과 다르게 효과가 명확하지 않았다.

    왜, 전설 이름값을 한달까.

    흔히 들을 수 있는 전설들이 전부 두루뭉술한 것처럼.

    [전설]의 효과도 쉽사리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건 확실히 성장형 시스템이었다.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 효과가 배가 되는…….’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이쯤에서 기뻐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됐는데.

    그게 일회성도 아니고, 성장형이란다.

    무엇보다 그 명칭도 [전설]로 더없이 거창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순간,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전설의 이름이 흑암룡 이호열이라니……!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선.

    그 끔찍한 전설을 더욱더 널리 퍼트려야 한다니……!

    심정 같아서는 이대로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진다.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현실에서의 개고생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내가 바로 흑암룡이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그런데 그 고생이 무색하게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이미 전설이 될 정도로 소문이 났을 줄이야.

    ‘누구냐, 대체!’

    나는 하이엘을 불렀다.

    하급 정령 시절부터 아르카나 대륙 소식에 정통했던 하이엘이다.

    전설이 될 정도로 회자된 내 소식이라면 그 근원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지.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이엘이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여왔다.

    “하이엘이 주군, 흑암룡을 뵈옵니다.”

    ……하이엘, 너까지 그러기야?!

    주군만으로도 매우 수치스럽거늘.

    거추장스러운 이명까지 덧붙이지 말아주라, 제발.

    그런데 그 호칭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유낙서스, 드워프, 그리고 황제……?’

    흑암룡 이호열 전설.

    그건 드래곤, 정령, 드워프, 인간이 연합해서 만들어 낸 합작 전설이었으니까! 하이엘이 말을 끝마친 순간, 나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누구한테 따져 물을 수도 없다.’

    하도 관련자가 많아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따져 물을 수 없다는 의미다.

    게다가 의도.

    그 의도가 그랑펠의 기준에 더없이 흡족했다.

    “현명한 판단이로군.”

    흑암룡 전설로 악마들의 기세를 억누르겠다니.

    짬밥을 괜히 먹은 게 아니구나, 다들.

    나는 상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아르카나 대륙의 기세를 반전시킬 줄이야.

    ‘결국, 이쪽도 호의였다는 건가.’

    탑주의 고양이 일 처리도 너그럽게 용납했던 그랑펠이 아니던가?

    호의에서 비롯된 사태이니만큼.

    나, 이호열의 심정은 어찌 됐든.

    나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낙서스와 체인워커, 하이엘은 그렇다고 치자.

    셋은 내 편이니까.

    그것도 모자라 콩깍지가 씌어서는.

    나를 지나치게 고평가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황제, 당신은 대체 왜 그런 거야……?

    ‘우상화 작업에 왜 동참한 건데?’

    하이엘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무려 안토니움 백성 앞에서 정식으로 선포했단다.

    모험가, 이호열이 바로 그 흑암룡이었다고.

    ‘……그 자리에 없던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의 이름으로 공언을 해버렸으니.

    아르카나 대륙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면…….

    내 행적이 전설로 거듭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구나.

    그보다.

    “덕분에 전부 보기 좋게 엎드려 있는 모양이니.”

    전설의 약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새롭게 개방한 시스템, [전설]의 효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악마 사냥꾼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악마의 기척.

    바로 직전,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을 때에 비해서.

    악마들의 그 기척이 확실히 누그러졌다는 의미다.

    ‘이러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어쩌겠냐, 결국 이것도 내 팔자겠지.

    하지만 이걸로.

    나는 현실도 모자라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필사적이어야만 한다.

    왜, 아르카나 대륙에서 떠도는 이놈의 전설이.

    현실로 범람하지 않게 최대한 막아내야 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키치를 입단속 시키는 게 최선이겠군.

    당연한 말이지만, 키치가 아르카나 대륙.

    어떤 장소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잘하겠지.’

    다만, 키치가 내가 걱정할 만큼 나약한 인물은 아니니까.

    약속장소와 기한도 정해놨겠다.

    키치를 걱정할 시간에 내 앞날이나 걱정하자, 호열아.

    나는 하이엘에게 물었다.

    “엘프에 관한 소식은 들은 것이 있나, 하이엘.”

    “송구하게도 답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과할 것 없다. 그 또한 그들의 능력일 테니.”

    하이엘의 정보 수집은 자연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나뭇잎의 기억을 읽는다든가.

    마찬가지로 흩날리는 꽃가루의 목소리를 듣는다는가.

    그러나 엘프 또한 유사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셨군.’

    얼마나 뒤가 구린 짓을 하고 다니길래.

    자연에까지 입단속을 시키는 건지.

    겸사겸사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

    그런 의미에선 아젠트레스와 그가 이끄는 엘프들의 위치를 특정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도 인벤토리를 보여주리라.

    아르카나 대륙에서 보는 [마안(魔眼)의 망원경]이다.

    왜, 현실에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보이지 않겠어?

    *

    콰득─!

    아젠트레스는 돌무더기를 짓밟았다.

    흔히 굴러다니는 돌부리가 아니다.

    웬만한 공성 병기로도 무너트릴 수 없는 성벽의 잔해였다.

    “부디 목숨만 부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콰직─

    머리를 바닥에 세차게 박는 건 악마였다.

    급으로 나뉘는 악마도, 진명의 악마도 아니다.

    그는 왕이라 불리는 악마들의 왕, 마왕이다.

    서열 30위.

    마왕, 샬키라위는 머릿속이 혼란했다.

    주륵!

    어찌나 머리를 세게 바닥에 처박았는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흠뻑 뒤덮는다.

    그러나 혼탁한 시야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고 있다.

    ‘전멸이다.’

    널브러진 시체들.

    대략 일만(一萬)의 정예 마왕군과 삼십의 악마 군단장.

    자신을 제외한 전군이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나절.

    ‘고작 백 명에게……!’

    마왕과 평범한 악마 사이에도 벽이 존재하듯.

    엘프와 자신 사이에서도 벽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벽의 두께는…….

    ‘나와 하급 악마의 차이보다 두껍다.’

    그런 벽을 이르는 말은 따로 있다.

    그래, 이건 ‘격’의 차이였다.

    샬키라위는 체감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왕의 체면 따윈 내던지고 머리를 박았다.

    격이 다른 존재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아젠트레스는 그런 샬키라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악마들의 왕이여.”

    “왕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어르신!”

    “마왕에게 어르신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아젠트레스가 비웃음을 뱉었다.

    “너는 다른 왕과 달리 대화를 나눌 태도를 갖췄구나.”

    인간 못지않게 저열한 족속, 악마.

    아젠트레스가 그와 말을 섞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젠트레스가 싸늘하게 말을 잇는다.

    “내게 거악, 식탐의 행적을 말해라.”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지고 있다.

    반나절 만에 무너진 마왕성은 그 증거였다.

    어머니의 축복이 온전하던 때였다면 말 그대로.

    찰나에 함락시켰을 테니.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

    자신과 동족, 모두.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자신이었다.

    태초의 엘프인 자신은 동족보다도 훨씬 긴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그렇기에 아젠트레스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부터 식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고.

    한데 유감스럽게도 일이 틀어졌다.

    “너희는 어디에 숨겼는가, 그 거악을.”

    그날 이후, 식탐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아젠트레스는 축복의 행방을 쫓는 동시에 식탐 또한 쫓았다.

    그러던 중 마주치게 되었다.

    어쩌면 식탐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왕, 샬키라위를.

    “저는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르신……!!”

    그러나 대답이 기대 이하였다.

    아니, 저열한 족속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예상했던 그대로라고 해야 하나.

    저벅.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샬키라위는 직감했다.

    아젠트레스가 완전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은 그대로 화살받이가 되어 숨통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샬키라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

    아젠트레스가 몸을 절반가량 돌린 상태에서 멈춰 섰다.

    내뱉는 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다.

    샬키라위가 말을 이었다.

    “저를 비롯한 마왕들을 수소문하셔도 절대 거악의 행적을 찾아내지 못하실 겁니다. 절대 그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악마는 자신밖에 생각지 못하는 저열한 족속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젠트레스가 묻는다.

    “이유는?”

    “거악과 저희는 근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근본이 다르다?”

    “그렇습니다.”

    거악.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과 마계가 연결되기 전부터.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던 악이었다.

    샬키라위는 여전히 머리를 납작 엎드린 채 말을 이었다.

    “저희 미천한 마왕들과 거악은 협력 관계 같은 게 아닙니다. 언제라도 서로의 목덜미를, 세력을 물어뜯길 원하는 경쟁 관계입니다!”

    꿀꺽─

    극도로 긴장한 탓인가.

    거기까지 말을 끝마치자 목이 타들어 갔다.

    샬키라위는 흐르는 피로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머리를 굴렸다.

    ‘……거악을 팔면 살 수 있다.’

    엘프가 속을 꿰뚫어 보아도 상관없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샬키라위는 더없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어르신! 거악, 그 녀석 때문에 어르신에게 죽는다는 것이 억울합니다. 그러나 알아주십시오. 이 억울함은 어르신을 향한 게 아닌 거악, 식탐을 향한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샬키라위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몇 안 되는 주제 파악을 할 수 있는 악마였다.

    그것이 특출나지 않은 샬키라위를.

    서열 30위 마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게 한 힘이었다.

    그러나.

    휙─

    상대를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아젠트레스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더니만.

    “미천한 것들의 사연 따윈 궁금하지 않다.”

    결국, 물었던 것에 관한 답변은 없지 않은가?

    아젠트레스가 완전히 돌아선 순간.

    팽!

    활시위가 놓이고.

    쌔액!

    뻗어져 나간 화살이.

    푹!

    그대로 샬키라위를 관통했다.

    즉사였다.

    서열 30위 마왕의 최후라고 하기엔 더없이 보잘것없었다.

    “진정으로 격이 떨어지는 대화였다.”

    아젠트레스가 손짓했다.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

    그러자 엘프들이 정렬하여 움직일 채비를 마쳤다.

    허나 그들의 발걸음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종족보다 뛰어난 오감.

    그를 바탕으로 한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멀리서 일렁거리는 마력의 빛 무리.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더없이 위험하다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활을 치켜드는 이가 없었다.

    정확히는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전신이 돌처럼 굳어서 발이 떨어지지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심지어는 시선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저 간신히 입을 여는 게 고작이었다.

    “아젠트레스 님……?”

    아젠트레스 님이라면 분명.

    원인을 알아내시고 해결해 주실 터.

    엘프들은 아젠트레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사내에게도.

    적대의 시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이 순간.

    ‘……믿을 수 없다.’

    자신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아젠트레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찌푸려짐을 넘어선 일그러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보아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찬란한 은빛.

    그것은 클라우디의 것이 확실했으며.

    느껴지는 기척은.

    어머니의 축복이 확실했다.

    아젠트레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단 말이다!”

    .

    .

    .

    마왕성을 무너트렸다고 칭찬해 줄 생각은 없다.

    너희들의 불순한 의도는.

    [마안(魔眼)의 망원경]을 통해서 전부 확인한 참이니까.

    그러니까 현장을 떠날 생각은 하지 마라.

    너희, 전부 현행범이거든.

    [첫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나와 엘프의 관계는.

    악마 사냥꾼과 악마 이상의 천적관계.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뱉을 말에 책임을 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랑펠의 발언이 얼마나 오만하다고 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격을 운운하지 말거라.”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니까.

    [엘프, 아젠트레스 및 엘프들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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