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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55화 (255/489)
  • ◈ 255화. 전설이라 부르라 (2)

    호수 위의 백조는 언제나 고고하다.

    발버둥 치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묻는다면…….

    지금 내 모습이 딱 백조 꼴이었거든.

    집무실 책상으로 들이 쬐는 아침 햇살.

    나는 뻔뻔하게도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늦었군.”

    세상에.

    태양에게 게으르다고 핀잔을 주는 건 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보다 밤을 꼬박 새운 주제에.

    일찍 일어난 척하지 마라, 그랑펠.

    달칵─

    녹차로 하루를 시작하며 지난밤을 되돌아본다.

    잠시 숨 돌릴 틈조차 없었지.

    특히 새벽부터 시작된 단련 퀘스트는 유달리 고되게 느껴졌다.

    ‘서러워서 울 뻔했다, 진짜.’

    [집념 : 3]

    상승한 집념 1포인트.

    나의 개고생을 시스템조차 알아주지 않았으면.

    정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다 큰 놈이 엄살을 부린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직접 시달려 봐야 엄살이 아니란 걸 알 텐데.’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이 개고생이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고되더라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참을 수 없는 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이 뻔뻔함이다!

    억울하다.

    억울한 걸 넘어서 따져 묻고 싶어진다니까?

    아주 그냥 한결같은 것도 정도가 있지.

    “기대가 되는군.”

    이 정도면 성인군자 아니냐, 그랑펠?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시달리다가 억울해서 죽겠다.

    하지만 이런 절규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망설일 것은 없겠지.”

    나도 슬슬 체념의 단계다.

    아니, 체념이라기보다는…….

    앞서서 생각하게 된달까.

    ‘고집이 꺾이길 기대할 바에는.’

    나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굴려본다는 거다.

    내뱉었던 대로 보름치 일과를 하루 만에 끝난 나였다.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 지속 효과도 끝났겠다.

    망설일 것 없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해야겠지.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까 말이야.’

    이번엔 되도록 빠르게 현실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사실 지난번이 특이한 경우였다.

    차원의 틈과 절대영도의 효과가 겹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던 거였으니까.

    ‘아르카나 시간으로는 두 달인가.’

    보자, 시간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이번엔 아무리 늦어도 현실 시간으로 하루 내에 복귀할 계획이었다.

    밀렸던 일과를 처리하면서 확실하게 느꼈거든.

    “내겐 찰나조차 아쉬운 상황이니.”

    앞으론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되겠구나, 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라, 누구 때문인지 말은 안 하겠다만…….’

    아주 그냥 그놈의 긍지 때문에.

    나서서 떠맡은 일이 한가득이잖아? 특히나 접속기 사용 허가 심사까지 짊어진 시점에서 정해진 일과가 배로 늘어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드륵─

    그러니까 이렇게.

    집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을 열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몇 개 있다.

    그래,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가넷 홀.

    우선, 대여했던 마도구를 반납해야 한다.

    모든 마도구를 반납하겠다는 건 아니다.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만큼.

    시슬리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일부는 반납. 일부는 대여 기간을 연장하겠다.”

    그저 절차를 무시할 수 없는 깐깐한 긍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한 탓일까.

    숙련 마법사, 라란은 말꼬리를 더듬었다.

    “안녕하세요, 이호열 수석님! 건네주신 마도구들은 반납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마도구의 대여 기간을 연장하실 필요는 없으시지 않을까요……?”

    촤르륵─

    그러면서 양피지 책자를 펼치더니.

    내가 자필로 적어넣은 대여기간을 보여준다.

    확실히, 내 필적으로 틀림없이 적어놨구만.

    ──────

    대여기간 : 사망하는 순간까지.

    ──────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다.

    ……나, 이쯤 되면 귀찮은 일을 자처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나서서 남들이 착각할 거리를 뿌리고 다니는 수준이잖아, 이건.

    ‘전부 네 탓이다, 그랑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한 번 억울하구나.

    그러나 별수 있으랴.

    이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젊은 날의 과오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다. 대여기간이 다했으니 연장하겠다.”

    하나 마나 할 정도로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얼어 죽었다는 사실은 나밖에 모른다. 용의 신전에서 내 최후를 지켜봤던 드래곤들조차 내가 얼어 죽었는지는 몰랐거든.

    그저 쨍그랑─

    소리가 나더니만.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만 했지.

    드래곤도 몰랐던 죽음을.

    적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죽음을.

    내 입으로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게 될 줄이야.

    이쯤 되면 긍지가 아니라 긁어 부스럼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적잖이 당황스럽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이 성격이 또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할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스슥─

    나는 깃털펜으로 대여기간을 새롭게 명시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얌전하게 좀 적자구나.

    그랑펠.

    “하루면 충분하겠군.”

    “……네, 네!”

    보자, 이걸로 한 점의 마도구를 제외.

    반납 혹은 대여기간 연장을 끝마쳤다.

    누군가 나머지 한 점은 어디에 팔아먹었느냐고 물어본다면…….

    역시나 한 치 부끄럼 없이 당당히 말하는 수밖에 없다.

    “백색의 겉날개에 관해서는 절차에 따라 진행하지.”

    “아, 넵! 그런데 그……. 반출된 마도구가 분실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어서요! 절차상에 그 사유를 확실히 명시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서요…….”

    그렇게 어렵사리 말할 것 없다, 라란.

    어차피 자진 납세하려고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절차인 이상.

    “절차에 예외는 없어야 하는 법. 훌륭한 일 처리군, 라란 숙련 마법사.”

    내가 거절할 수 있겠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라란에게 곧장 말을 이었다.

    “나보다도 날개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나보다도 날개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백색의 겉날개를 건네주고 왔다.”

    “……네?”

    어째 육하원칙을 지키는 법이 없구나, 그랑펠.

    맞는 말도 참 거창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있어.

    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마법부여학 숙련 마법사 주제에 수석님께 주제넘은 참견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백색의 겉날개를 이호열 수석님만큼 적절히 활용하실 수 있는 분은 아르카나 대륙, 전역을 샅샅이 뒤져도 있지 않을 거라고. 마르셀로 수석님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민망하게도 그런 고평가를 해줬구나, 마르셀로.

    사실 백색의 겉날개의 효과야, 나한테는 맞춤 수준이지.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마력에 시달릴 필요가 적어진 지금.

    내겐 그리 간절한 마도구까지는 아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나보다는.

    날개를 상실한 유낙서스에게 절실한 마도구라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그러한 사정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허나, 날개는 날개를 잃은 이가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할 터.”

    “……날개를 잃은 이라면?”

    “날개를 잃은 노룡을 말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드래곤.

    노룡이란 단어에 라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놀라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역시나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용마대전의 앙금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이번만큼은 그 입방정을 칭찬한다, 그랑펠.

    마탑과 드래곤.

    이제부터라도 사이좋게 지내야지, 같은 편인데.

    왜, 백색의 겉날개가 그 화해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명분이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마도구를 분실한 책임도 무마할 수 있을 터.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확실히, 단순한 분실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있어 보이기도 하고?

    ‘뭐, 넘어갈 수 없다고 해도.’

    청렴결백.

    개처럼 벌어서 쓰지도 않는 내가 아니던가.

    억 소리 나는 마도구라고 하더라도 배상금을 걱정할 이유는 없겠지.

    이내, 나는 한층 가벼운 걸음으로 가넷 홀을 빠져나왔다.

    ‘이제 하르콘만 기다리면 되겠네.’

    어째서 마탑에서 하르콘을 기다리느냐 묻는다면.

    접속기가 마탑, 크리스탈 홀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게 처음으로 접속기 사용 허가를 받은 건.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었으니까.

    *

    하르콘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의 뜻은 알아들었네.”

    인자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 눈빛에는 맹수의 기세가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과 마주한 여인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알아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검게 늘어진 긴 머리칼.

    간혹가다 시선이 마주치기는 하지만.

    이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하하…….”

    그것도 모자라 멋쩍은 듯 웃는다.

    누군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여인이 자신 앞에서 잔뜩 위축됐다고 평가하겠지.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훌륭한 시선 처리로군.’

    상대는 제국 역사상 최흉의 죄인.

    그림자 용병단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하르콘은 침묵한 채 키치를 바라보았다.

    저 목에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있다.

    무려 작은 왕국 몇 개나 사들일 수 있을 정도의 거액.

    일개 용병 단장 목에 그런 현상금이 붙을 수 있었느냐, 묻는다면.

    ‘굵직한 사건만 나열해도 충분하다.’

    귀족 암살, 청부살인, 보물 강탈…….

    그런 건 그림자 용병단 기준에서 악행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

    전국시대부터 그림자 용병단은 뒷세계의 거물이었으니까.

    하르콘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악마가 등장하기 이전. 가장 악마에 가까웠던 존재들.’

    과거, 그림자 용병단의 악행은 악마와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순간, 하르콘이 키치와 말을 섞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르콘은 방금의 대화를 곱씹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네, 얼마든지요!”

    -“그대는 과거를 후회하는가?”

    -“갑자기요? 으음, 후회하느냐고 물으신다면…….”

    키치는 더없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후회하고 있습니다. 더없이요.”

    하르콘은 호열을 떠올렸다.

    ‘경이라면 분명…….’

    저들의 과거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겠지.

    악마에게는 자비가 없지만.

    인간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경이니까.

    왜, 그림자 용병단을 성전 연합군에 합류시킨 결정만 봐도.

    호열은 저들을 신뢰한다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하르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기회를 그대에게 양보하지, 키치.”

    “……진심이신가요?”

    “물론.”

    “와아!”

    키치는 그제야 하르콘과 눈을 마주쳤다.

    “누구보다 제국과 황제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셨을 텐데…….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르콘 단장님!”

    “아니, 안토니움과 폐하가 무사하다는 것은 경을 통해 확인한 참이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건 단순한 욕심일지도 모르지.”

    “하르콘 단장님의 배려 때문이라도 반드시 되찾아오겠습니다!”

    하르콘이 키치에게 아르카나 대륙 진입 기회를 양보한 이유는 간단했다. 키치의 진입 목적이 호열과 성전 연합군에 도움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르콘이 키치에게 덧붙였다.

    “부디, 그 의뢰서를 되찾길 바라겠네.”

    .

    .

    .

    “명백한 절차 위반이군.”

    나는 하르콘 대신 크리스탈 홀에 나타난 키치를 바라봤다.

    평상시의 그랑펠 성질머리였다면.

    곧장 키치를 돌려보냈겠지.

    “……기한을 지키지 못한 점 송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치의 목적은 확실히 타당했다.

    ──────

    목적 : 그림자 용병단 아지트 접근 / 의뢰 장부 습득

    ──────

    왜, 의뢰 장부에서 냄새가 풍겨왔으니까.

    ‘거악의 의뢰라.’

    짙은 악마 냄새가 말이지.

    절차만 지켰다면.

    하르콘의 신청서보다 먼저 채택했을 정도로 말이다.

    키치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의뢰는 오래전부터 장부에 적혀있던 의뢰라고 했다.

    키치가 멋쩍게 웃었다.

    “선대 단장님들께서 워낙 많이 받아드신 모양인지라……. 상시 최우선으로 수행 중인 의뢰였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성공하진 못했지만요.”

    그 의뢰 장부라는 걸 확인한다면.

    거악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하르콘이 양보를 했으니.

    아무리 절차가 중요해도 참자, 그랑펠.

    때론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도 있다고.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하르콘의 긍지를 저버릴 수 없겠지.”

    넙죽 고개를 숙이는 키치에게 말을 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아르카나 기준으로 나흘이다.”

    늦어도 24시간 내에는 다시 현실로 복귀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때는 마력을 쥐어짜 내서라도 2인용 포탈을 발현해 내야 한다.

    ‘레이먼 션, 속이 시커먼 자식.’

    편도행이 뭐냐, 쪼잔하게.

    접속기엔 로그아웃 기능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명심해라, 키치.

    그랑펠 성격에 약속시각에 늦으면 두고 가고도 남을 테니까.

    재회할 장소는 안토니움 정문.

    나는 키치가 접속기에 몸을 눕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내, 접속기에선 포탈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키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도 곧장 마력을 쥐어짜서 포탈을 발현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좀 익숙해지네.’

    나는 곧장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메시지들과.

    [전설이 요동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진입 메시지가 바뀌었다?

    멸망을 향해가는 대륙에서.

    전설이 요동치는 대륙으로.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사건이라도 벌어졌나 싶었거늘.

    나는 곧 깨달았다.

    [전설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설마, 요동친다는 전설이 내 이야기였어?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흑암룡 이호오오오여여여열?!

    ……대체 누가 내가 흑암룡이라는 걸 말한 거냐?!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 여기서 뒤통수를……!!

    아니, 그것보다…….

    [당신의 전설이 실체화합니다.]

    그 해괴한 전설이 실체화한다니, 이건 또 무슨 끔찍한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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