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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54화 (254/489)

◈ 254화. 전설이라 부르라 (1)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치고 해는 쨍쨍했건만, 아직도 몸은 으슬으슬 떨렸다.

역시,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모자란 아우는 형님을 흉내 낼 수 없나 봅니다…….”

드래곤의 출현.

계란으로 바위 치기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쉬는 신속히 움직였다.

혹시 모를 드래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하지만 드래곤과 마주하는 순간.

내쉬는 얼어붙었다.

황궁 마법사란 칭호가 무색하게도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래서야 황제 폐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형님…….

“분명, 형님이셨더라면…….”

언제나 화룡을 넘어서겠다고 다짐하시던 형님이셨더라면……!

드래곤 앞에서도.

그 불같은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으셨을 텐데.

물론, 그 화룡이 진짜 드래곤이 아니었거늘.

누군가 그 점을 지적해도.

낙담한 내쉬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

자책하던 내쉬를 일깨운 건.

그의 주군, 황제였다.

황제의 음성에 내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다짜고짜 면목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송구하게도 소인은 황궁 마법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드래곤에 위축되어 본분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내쉬에게 다가갔다.

“……?”

그러고는 어리둥절해하는 내쉬의 어깨를 두들겼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내쉬. 진정한 왕 앞에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게 되는 것은. 내게 용서를 구할 것 없네. 애초에 나부터도 똑바로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으니.”

황제의 시선이 내쉬에게서 창밖, 안토니움의 전경으로 옮겨간다.

악마에 이어 반군마저 막아냈던 한 수도성.

덕분에 돌았던 활기가 무색하게도.

안토니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황제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용서를 구할 것도, 자책할 것도 없네. 지금은 그저 감사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물러간 것에 기뻐하게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물론, 쉽지 않으리란 걸 안다.

이 순간, 안토니움이 고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드래곤이 자취를 감춘 원인.

그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흑암룡.’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는 제국에서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대다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책으로 엮어낸 것뿐.

그러니 진실이라고 칭할 만한 것은…….

‘역시, 용마대전밖에 없겠지.’

마탑과 드래곤의 전쟁.

황궁에 남겨진 몇 장 남짓한 기록은 선대 황제들이 마탑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받아온 유일한 답례품이었다.

수백 가지의 마도구를 마탑에 내어주고 받아온 게 고작 몇 장의 종잇장이라니.

누군가는 제국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나조차도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

하지만 드래곤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

몇 장 남짓한 용마대전의 기록은 제국에게 귀중한 지표가 될 터였다. 그리 생각하고 조금 전까지, 자신도 그 기록들을 살펴보고 왔으니까.

그러나.

‘마탑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라.’

용마대전의 기록에도 흑암룡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고뇌 중이었다.

아득히 먼 과거, 용마대전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흑암룡이다.

그런 존재가 어찌 드래곤들에게 이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심히 의문이구나.”

문득, 황제가 황궁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바닥 너머, 황궁의 지하를 바라보았다.

『전황의 서고』

지하에는 그것이 있다.

질문에 관한 해답이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한다면, 그 해답을 알려주는 『전황의 서고』가 있다. 흑암룡의 존재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당장에라도 의문을 해결할 수 있겠지.

허나.

“…….”

황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진정으로 그것을 사용할 때가 맞는가?’

『전황의 서고』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많다.

내쉬를 비롯한 대신들은 물론이요, 지금은 모험가들의 세계에 있는 하르콘도 그 존재에 관해서는 알고 있을 터.

그러나 그 답변을 듣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 황제, 자신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여태껏.

그것을 사용해 온 이들은 선대 황제들밖에 없었으니.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르콘.’

황제가 고개를 떨군 채 고뇌하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황궁에 내리쬐던 따사로운 햇살이 사라졌다.

황제와 내쉬는 순간 흠칫했다.

“……?”

혹,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다시금 드래곤이 나타난 건가.

재차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폐하?”

내쉬가 말꼬리를 흐린다.

태양을 가린 건 드래곤도, 소나기를 품은 먹구름도 아니었다.

익숙한 비행정.

드워프들의 아이언 캐슬 호였다.

그렇기에 황제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드워프들이 어찌하여 다시……?”

당분간 안토니움에 들를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혹시, 무언가 위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황제는 내쉬에게 명했다.

“저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내쉬.”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러고는 곧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와 마주했다.

황제의 추측은 절반 정도 맞았다.

체인워커가 다급히 입을 열었으니까.

“긴히 전할 소식이 있어 제국을 다시 찾아왔소.”

그래, 소식은 다른 의미로 급한 소식이었으니까.

“제국, 그대들에게는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을 시간조차 부족하오. 한시라도 빠르게 움직여 제국의 세력을 복구하고 과거의 영광을 수복하시게!”

“……그게 무슨 말인가, 드워프여? 그대들도 보아서 알고 있지 않은가? 드래곤이 나타났네. 백성들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겐가?”

“충격에 빠질 일이 아니니까.”

“……무어라?”

“그건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니 말일세.”

“두려워할 게 아니라니, 대체 무엇이 말인가?”

되묻는 황제에게 체인워커가 말을 잇는다.

“흑암룡.”

.

.

.

체인워커에겐 확신이 있었다.

“경이라면 대륙이 두려움에 떠는 걸 원치 않겠지.”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부정적인 감정이 악마들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호열이니까.

지금이야 인간과 악마, 모두가 드래곤 앞에 벌벌 떨고 있지만…….

“악마는 주제 파악이란 걸 알지 못하는 족속이니.”

미련한 악마는 두려움조차 망각하는 족속.

이 평화는 절대 오래갈 수 없으리라.

체인워커는 결단을 내렸다.

“맹약이라는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이를 기회로, 대륙에 깔린 부정적인 감정을 반전시키겠다고.

그걸 가능케 하는 데에는 많은 게 필요치 않았다.

그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안토니움 본성 위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

안토니움의 백성들이 우려가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본다.

체인워커는 다시금 아이언 캐슬 호에 올라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월스와일이 물어왔다.

“체인워커 자네, 제대로 전달한 게 맞는가?”

드래곤들이 울부짖던 흑암룡.

그가 바로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호열이다.

그런 사실을 전해 들은 것치고는…….

백성들은 물론.

황제의 표정 또한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가?

그 우려에 체인워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월스와일, 자네라면 알고 있지 않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전설이 어떻게 전해져 내려오는지를.”

“……?”

수수께끼 같은 말에 월스와일은 인상을 구겼다.

뜨거운 용광로 앞에 붙어사는 만큼 다른 일 앞에서는 인내심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월스와일이었으니. 체인워커는 곧장 핵심을 말했다.

“제아무리 전설적인 사건과 존재라고 해도 결국, 인간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전설이라 불릴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무언가를 전설로 격상시키는 건 인간들의 몫이라는 것을.”

“……!”

그랬다.

아무리 대단할지언정 널리 알려지지 않으면 전설로 거듭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널리 알리는 건 오로지 인간들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렇구만…….”

은둔이 일상인 자신들은 물론.

드래곤 혹은 엘프가 무언가를 널리 퍼트릴 이들은 아니었으니까.

체인워커가 흡족한 눈빛으로 안토니움을 지켜본다.

“우리 성전 연합군에게 필요한 건 반전. 그것도 극적인 반전이네, 월스와일. 두려움에 뒤덮인 아르카나 대륙을 뒤집을 수 있는, 큰 거 한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길세.”

월스와일이 물었다.

“그걸 위한 담금질이라는 건가?”

체인워커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것도 보통 공을 들인 담금질이 아니겠지.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느냐에 따라 그 전설이 가지는 무게감 또한 달라질 테니까.”

체인워커가 껄껄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보다 더한 적임자도 없지 않겠는가!”

.

.

.

황제가 말한다.

“그대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뱉으면서도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도 겁먹지 않았던 것처럼 내뱉고 있거늘.

악마 앞에서.

반군 앞에서.

그리고 드래곤 앞에서.

누구보다 두려움에 떨었던 자신이었으니까.

“…….”

그러니 지금의 침묵이 조금도 야속하지 않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성의 시선에서.

존경심이나 경외 따위를 기대하기에는.

황제로서 증명한 게 무엇 하나 없었으니.

‘부끄럽지 않다면, 내가 바로 악마일 터.’

광활했던 제국의 영토.

그러나 현시점에서 영토라고 할 수 있는 건 수도성, 안토니움.

그리고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재건되었다는 프로스트뿐이었다.

나머지 영토와 그 백성들을 살피지 못한 시점에서 자신은 더는 황제라 불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러니 황제의 이름으로 고한다.”

자신은 필사적으로 황제를 연기해야만 한다.

그래, 허울뿐인 황제일지라도.

자신의 말에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 힘을 ‘그’에게 실어줘야 했으니까.

“그대들은 흑암룡을 두려워 마라.”

이럴 때는 어린 시절, 황자로서 받아온 교육이 도움되었다.

철저한 연습 끝에 내뱉은 발성과 화법은.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황제는 알고 있었다.

‘저들을 진정으로 일깨우는 건 내가 아니다.’

자신은 징검다리 역할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더 위엄 있게 지껄였다.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다면 결코 낼 수 없었을.

위엄 넘치는 황제의 목소리를 뱉었다.

“그대들은 흑암룡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황제의 시선이 향한 곳엔 드레드센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 말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역시나.

당사자인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들이었다.

제국 끝자락에 있는 드레드센이다.

제국의 소식 같은 건 닿지도 않는 산골 마을.

게다가 자신들은 안토니움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흑암룡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고……?

“……!”

란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 설마?”

그렇다.

그 설마가 맞다는 듯.

황제의 발언이 이어진다.

“흑암룡, 그는 드레드센의 구원자.”

“그와 동시에 안토니움의 영웅이자.”

“한없이 깊은 어둠.”

황제의 입에서 전설이 공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모험가, 이호열. 그가 바로 흑암룡이다!”

“……!!!”

*

……귀가 간지럽구나.

마탑에 복귀.

집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귀가 간지럽다니.

좋지 않은 징조다, 이거.

그러나 그랑펠의 격식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행동 따위.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으니.

애써 가려움을 무시하고 책상으로 눈을 옮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탑 출탑 신청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출탑 신청서에 찍힌 고양이 발바닥이었다.

마르셀로가 말했던.

탑주가 대신했다는 업무가 출탑 신청서 심사인가?

나는 통과된 출탑 신청서를 살펴보다가 읊조렸다.

“그대의 성의는 충분히 알았다.”

근데 그…….

있으나 마나 한 배려라는 게 있다.

지금 탑주의 호의가 그러했다.

누구에 빚지고는 못사는 그랑펠이니까.

‘그래서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지만.’

정말, 고양이 세수에 버금가는 고양이 일 처리구나……!

아니,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출탑 허가를 찍으면 어쩌자는 거야?!

“허나, 바로 잡아야 할 건 바로 잡아야겠군.”

내가 다시는 탑주, 그 고양이를 믿나 봐라.

물론, 모든 건 그랑펠의 까다로운 놈의 성격 탓이었으니.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 성격엔 주고받는 게 최선이다, 그래.’

그런 의미에선 모두에게 당부하고 싶어진다.

‘다들, 날 위해서 뭐 할 생각은 자제해 주라.’

그 뒷감당에 시달리게 될 내가 불쌍하다면 말이야.

그나저나 서두르자.

오늘이 가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많다.

말했다시피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

체력 단련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하는 나였으니까.

서둘러 출탑 신청서부터 수정하자고.

‘그러니.’

나는 깃털펜을 휘갈겼다.

스스슥─

유감스럽게도.

이번 출탑 신청서도 불합격으로 정정하겠다.

벤쉬 윌리엄 선임.

.

.

.

[전설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습득합니다.]

[당신의 전설이 실체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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