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흑암룡 (2)
스칼이 홀로 아르카나 대륙을 누볐던 이유는 하나였다.
하나같이 시시했기 때문이었다.
샤이닝, 천하통일, 보헤미안…….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들의 목표가.
-“우리가 손을 잡으면 샤이닝을 넘어설 수 있다.”
-“이제부터 솔로 플레이는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부디 우리에게도 기회를……!”
현실과 완벽히 다른 세계.
아르카나에서 추구하는 게 고작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라니.
그런 건 현실에서도 실컷 하고, 해왔던 스칼이었으니까.
그러나 호열만큼은 달랐다.
그는 강하지만, 강함을 내세우지 않았다.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언제나 스스로 최전방에 나서서.
타인을 마음부터 움직이게 했다.
거기까지는 단순히 호기심이 생긴 수준이었다.
-“이호열이라.”
그저 나처럼 특이한 녀석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건방지게 말을 뱉지 않았었나?
왜, 세계 각국의 취재진 앞에서.
-“떨거지는 필요 없다. 이호열, 나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대단하신 악룡 사냥꾼 씨.”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언동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만물의 왕을 굴복시키고.
그 위에 오르고 말겠다는.
허무맹랑한 목표를 비웃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호열이었으니까.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스칼은 호열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웃음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지.’
언제나처럼.
더없이 진중한 태도와 자세.
가끔은 자신조차도 무리라고 생각했던 목표를 듣고도 호열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첫 만남이 바로, 스칼이 성전 연합군에 합류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니까.
“장담하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그대는 흑암룡에 다다를 수 없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도.
스칼은 찻잔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호열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흑암룡……. 모든 드래곤들이 울부짖었던 이름인만큼. 유달리 위대한 드래곤이겠지요. 어쩌면 용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용기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며 알게 된 정보가 몇몇 있었다.
아득히 먼 과거.
마탑과 드래곤이 전쟁을 벌였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대부분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땅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만물의 왕이라 불리는 드래곤들 사이엔 뚜렷한 서열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모든 왕들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스칼은 진지한 감상을 뱉어냈다.
“어째서 그토록 단호히 말씀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진정한 용기사라는 원대한 목표.
그것만 보고 달려온 스칼이었거늘.
흑암룡의 위엄 앞에서는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귀한 말씀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열 경.”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호열이 조언을 해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스칼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야 목격하지 않았던가?
아르카나 대륙은 넓고, 드래곤은 많다는 사실을!
흑암룡을 제외하고도 목표로 삼을 드래곤들은 많았으니까.
이내, 스칼의 얼굴에 다시금 화색이 돌았다.
스칼이 호열에게 물었다.
“그보다 노룡, 유낙서스는 무사한 겁니까?”
.
.
.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게, 십 년도 넘게 신비주의로 살아왔던 스칼이 맞나?
어째,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데……?
스칼이 돌아가고 나서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다.
“이런.”
오죽 수다를 많이 떨고 갔으면.
그랑펠 입에서 ‘이런’ 소리가 다 나왔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스칼.
‘주고받은 게 있어서 넘어간 거지.’
평상시 그랑펠의 뒤끝을 고려하면…….
삼고초려가 뭐냐.
백고초려를 해도 다음부턴 만나주지 않았을걸.
그러나 이 순간.
나, 이호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있었으니.
‘……어찌어찌 넘어갔구나, 흑암룡.’
흑암룡을 타고 싶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땐,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한테 목마라도 태워달라는 건가, 싶었거든.
당연하게도.
그랑펠의 격식에 누군가를 목마를 태운다는 있을 리가 없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거에도 질색하는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고.
‘하나뿐인 내 조카, 아랑이를 태우는 거라면 또 몰라.’
그러니 냉랭한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스칼은 내가 흑암룡인 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래서 사람이 죄짓고는 편히 못 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혼자 식겁해서는, 과민반응을 하고 말이야.
그래서 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의 말투가 하도 단호했어야지.
스칼이 낙담하는 건 아닐까, 싶었거든.
물론.
‘용밖에 모르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스칼은 곧장 다른 드래곤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어쨌거나 현명하다, 스칼.’
흑암룡 말고도 탈 수 있는 드래곤은 많으니까.
물론, 드래곤 최초 탑승 업적은 내가.
나도 모르게 습득하기는 했는데…….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선 그대도 노력해야겠군.”
그정도 시련은 감당해라, 스칼……!
업적 효과 없이 드래곤 위에 올라타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마는.
나도 경험해서 알게 된 건데. 중간과정을 건너뛰는 게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나야 워낙 뻗쳐놓은 게 많아서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다.
워낙 파놓은 살 구멍이, 우물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부족한 중간과정이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보충하는 건 내겐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업적을 마냥 부러워하지 마라.
‘……이 꼴을 보면 부러워할 리가 없겠지만.’
스스슥─
지치지도 않고 집어 든 건 역시나 깃털펜.
스칼과의 수다에 빼앗긴 시간을 고려하면 찻잔을 기울일 새도 없겠구나.
이걸로 끝이 아니다. 마탑에도 수석으로서의 할 일 또한 남아있을 터.
‘……출탑 신청이야 고양이가 처리했다고 해도.’
내가 자초한 막중한 업무가 추가되지 않았던가?
접속기 사용 허가 신청서 심사.
그 대상은 마탑 마법사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출탑 신청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청서가 집무실 책상에 쌓여있겠지.
그걸 처리하면 정말로 끝 아니냐고?
그럴 리가 있겠냐.
새롭게 갱신된 클래스 퀘스트.
거기에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지긋지긋한 퀘스트 목표가 있는데.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구나.’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얼어 죽고.
현실에선 돌아오자마자 과로사를 하게 생겼다.
내 팔자가 이렇게 기구하다…….
*
아르카나 대륙.
아이언 캐슬 호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지도자, 체인워커.
대장장이, 월스와일.
조종사, 거너.
각자 맡은 책무를 떠나서.
모든 드워프가 망치를 두들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쇳소리가 아이언 캐슬 호 구석구석에서 울린다.
깡깡!
두꺼운 손가락이 저릴 정도로.
쉴 틈이 없다.
거너가 맺힌 땀을 간신히 닦아내며 소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종사 따위 거들떠도 안 봤지, 내가!”
매 비행마다 목숨을 거는 만큼 조종사에겐 장점이 있다.
잡다한 아이언 캐슬 호의 업무에서 제외되는 특혜 말이다.
단지, 이번 사태가 잡다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거너가 아직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갑자기 드래곤이, 그것도 떼로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드워프 다리 길이가 배로 늘어나는 상황인가, 대체!”
아이언 캐슬 호의 유일한 약점.
악천후.
고도로 발달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아이언 캐슬 호라고 한들.
자연 앞에서는 그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는 법.
“추락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게, 거너.”
“물론, 그건 다행이지만…….”
“그럴 시간에 못 하나라도 더 박는 게 어떤가?”
“에휴.”
그러니 드래곤이 나타나고.
울부짖던 그 시간은.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았다.
깡깡!
체인워커는 망치를 두들기다가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슬퍼서 이런 비를 뿌린 겐가…….”
전례 없던 폭우였다.
얼마나 세차게 내렸는지.
아이언 캐슬 호에 물이 샐 정도였으니 말이다.
드래곤이나 엘프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긴 세월을 살아온 자신들이었다.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월스와일이 퉁명스럽게 입을 연다.
“말하지 않았나? 흑암룡 때문이겠지.”
“흑암룡이라…….”
“그게 뭔지는 몰라도 으슬으슬하구만.”
“어째서인가?”
“전례가 없던 일이니 말일세, 체인워커.”
드래곤 하나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놀랄 일이었거늘.
그 머릿수가 대략 십여 마리는 되는 듯했다.
드래곤도 아니고.
드래곤‘들’에게.
저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대륙에 변화가 찾아오겠지.”
확신할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드래곤들.
맑게 갠 하늘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으니까.
“저들이 그 흑암룡이란 걸 찾아낸 것 같으니.”
“……솔직하게 두렵군.”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깡!
월스와일은 망치에서 손을 떼고 대륙을 바라봤다.
세찬 비가 먼지조차 말끔히 씻겨내린 덕분에 시야가 훤히 트여 지평선 너머까지 또렷이 보였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제국은 물론, 악마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양이니.”
만물의 왕이 울부짖었으니 만물에게도 그 소리가 전해졌을 터.
체인워커와 월스와일.
두 드워프는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새로운 전설이 쓰일 수밖에 없겠어.”
그 이름 하야.
흑암룡 전설.
체인워커가 월스와일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서운하지 않은가, 우리 전설의 대장장이께서는?”
전설에는 힘이 담긴다.
전설을 써내려 가 보았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월스와일이었다.
“서운하다라.”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한들.
전설이라 불릴 것들은 많지 않다.
서운하지 않느냐고, 물은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흑암룡의 전설에 오랫동안 회자될.
귀철의 탄생이 퇴색되고 말았으니.
그러나 월스와일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체인워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설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말이지.”
귀철의 탄생 전설이라.
그 주인인 호열의 활약에 따라.
나중에야 더더욱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수 있겠지만…….
당장의 흑암룡 전설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저쪽의 전설은 그야말로.
아르카나 전역에 울려 퍼졌다고 하더라도 무방하다.
더 나아가서.
“드러낸 게 아닌, 언급만으로 세상을 떨게 하였네.”
실체, 흑암룡은 아직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서운함을 느낄 이유 따윈 없었다.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도 되지 못했으니까.
다만, 여전히 우려할 뿐이었다.
“부디 새로운 전설이 날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
그런 의미에서 체인워커와 월스와일은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채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거늘.
공교롭게도 두 드워프는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경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별안간.
하늘에서 무언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갈라지는 허공.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형체.
드래곤이었다.
“!!!”
수리 도중.
그 탓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아이언 캐슬 호였다.
드래곤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체인워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젠장, 만물의 왕님께선 귀까지 밝으신 건가?”
“난들 알겠나.”
“빌어먹을, 이런 최후는 사양하고 싶은데.”
아이언 캐슬 호의 창을 완전히 시야를 가리는 드래곤의 육체.
그런데, 그 외관이 어째서인가……?
낯설지 않았다.
“흠?”
월스와일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비바람이 몰아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들.
한 차례 목격했던 드래곤이기에 익숙하게 느끼는 것인가 싶었거늘.
그게 아니었다.
익숙하게 보이는 건 오직.
찬란하게 빛나는 ‘날개’뿐이었으니까.
설령 크기가 다를지언정.
“……저, 저건?”
월스와일.
대륙 최고 대장장이의 눈썰미는 곧 알아차렸다.
날개 위로 겹쳐서 떠오르는 잔상.
확실하다, 찬란하게 빛나는 저 드래곤의 날개는…….
호열이 착용하고 있던 마도구와 같은 것이다!
“……저, 저게 어떻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만가지 가능성.
그러나.
그 잡생각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살랑─
아이언 캐슬 호.
고고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정령.
하이엘이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드래곤에게 나아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으니까.
“비로소 주군의 뜻을 깨달았군요, 유낙서스.”
그 말에 드래곤이 화답했으니까.
“흑암룡을 의심하다니, 나의 명백한 불찰이었군.”
그 짧은 대화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체인워커, 월스와일, 거너…….
아니, 모든 드워프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서, 설마 그 흑암룡이 호열 경이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