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흑암룡 (1)
사건의 흐름을 되돌아보자.
마탑도, 랭커들도, 성전 연합군도 어찌할 수 없던 드래곤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붕괴한 균열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를 신속하게 처리해왔던 인류의 과학마저도.
-수천억짜리 전투기도 접근조차 못 했다면서 ㄷㄷ
-ㅇㅇ 날갯짓에 추락할 뻔했다더라
-음속 미사일보다 빠른데 어떻게 맞추겠다고;;
만물의 왕.
드래곤 앞에서는 무용지물.
말그대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정리되었다.
마치 이 사태 또한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름만에 모습을 드러냈어도.
평소 다를 바 없던 호열에 의해 말이다.
장관이었다.
포효하던 드래곤들이 호열의 앞에 집결.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포탈을 통해 사라지는 모습도.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던 호열이거늘.
드래곤을 그저 한마디 말로 되돌려보낼 줄이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일이었다.
동시에 크나큰 의문이었다.
온갖 추측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보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임??
-ㄹㅇ 무슨 일인데
-뭔진 몰라도…….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호열이었다.
호열이 예상치 못하게 보름간 자리를 비웠다?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호열조차 예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는 뜻.
화살은 ‘한 단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스케일이면 흑암룡밖에 없지 않아?
-바로 확신할 정도라고?
-아니, 이름만 들어도 딱 느낌 오지 않음???
역시나, 흑암룡.
드래곤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던 그 이름.
흑암룡밖에 없었다.
-내 생각엔 호열 님이 흑암룡에 관한 단서를 찾은 것 같음 ㅇㅇ
-ㄹㅇㅋㅋ 그렇지 않고서야 드래곤들이 얌전히 돌아갔겠냐고
-뇌피셜치고 그럴듯함 ㄷㄷ
-흑암룡 정도면 호열 님이 보름 동안 매달릴만 하지
그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물론, 간혹가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글들이 있기는 했다만.
[제목 : 그런데 흑암룡인가 하는 뭔가 말인데]
[글쓴이 : ㅇㅇ]
[내용 : 그거 왠지 호열 님 같지 않음……?]
아무리 그래도 상식선이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상식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온 호열이라고 한들.
상대는 드래곤이 아니던가?
-에이 아무리 호열 님이라도 그건 좀…….
-일단 인간이 어떻게 용이라고 불리냐 그건 아니지ㅋㅋㅋㅋ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함 그건
좋다, 백번 양보해서.
호열이 보름 만에.
드래곤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고 쳐보자.
그럼에도 말이 되지 않았다.
-용들이 눈물을 흘렸다니까???
-드래곤이 인간 때문에 운다고? 말도 안 되지ㅋㅋㅋ
-뭣보다 울 이유가 없자너ㅋㅋㅋ
-그니까 평소랑 똑같이 멀쩡했는데 우리 호열 님은?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이다.
그들이 흑암룡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는 건.
흑암룡이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존재라는 건데…….
아무리 호열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런 게 보름 만에 가능하겠음?
보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반박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는 추측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지 미련을 버릴 수 없을 뿐이었다.
……그야 어딘가 그럴싸하지 않은가?
-한없이 깊은 어둠 그리고 흑암룡…….
-그래도 뭔가 관련 있는 거 같지 않음?
-듣고 보니까 또 그러네……?
둘 다 시커먼 게 공통점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근거가 될 순 없었다.
그랬다, 거기서부터는 단지 믿음의 영역.
그러니 기대할 뿐이었다.
-흑암룡에 관한 떡밥 또한 풀어내시리라 믿습니다.
그저 호멘이라고…….
*
……뭐, 그저 호멘?!
유감이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필이면 이명을 가져다가 붙여도 흑암룡이라니…….
한없이 깊은 어둠이랑 묘하게 이미지가 겹치잖아, 그거!
‘필사적으로 다물게 하길 잘했다.’
만약, 쿠드하낙스가 무어라 한마디라도 했다면.
나는 반박하지 못한 채.
흑암룡이란 끔찍한 이명을 인정하고 말았겠지.
게다가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 그랑펠의 긍지라면.
흑암룡이라는 이명이 비롯된 이유.
클라우디 가문에 관해서도.
숨김없이 발설할 가능성이 차고도 넘쳤으니.
그때가 바로 내 제삿날이 될 뻔했구나, 호열아…….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나는 엘시도어를 내보낸 후 밀린 업무를 확인하는 데 한창이었다.
국왕, 하쿠나가 제 몫 이상을 해줘서 살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꼬박 며칠은 붙잡고 있었어야 했을 텐데 말이야.
“말하지 않았나, 하루면 충분하다고.”
아주 그냥 말은 뻔뻔하게 잘한다, 진짜.
어쨌거나 쉬지 않고 서류를 넘긴 덕분.
대강 정리가 끝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좀 돌아볼까?
드래곤들이 워낙 성대하게 귀환식을 치러준 덕분에.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게 몇 개 있으니까.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81]
[능력치]
근력 : 159 / 민첩 : 155 / 마력 : 57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0]
간만에 열어본 상태창.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칭호의 ‘흑암룡’이구나.
그러나 징징댄다고 떼어놓을 수도 있는 게 아니니까.
미련은 버리자.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경험치 페널티는……?’
일단, 눈에 띄지 않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드네.
레벨이 상승하면서 요구 경험치도 상승한 탓일까.
경험치가 하락했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절대적인 경험치의 하락량은 같아서 조삼모사나 다를 게 없겠지만.
레벨이 하락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군.
‘앞으로 19레벨인가.’
이 펄럭거리는 재킷에 팔을 끼워볼 수 있는 게.
자연스럽게 에픽 등급 아이템, 여명 세트의 효과까지 확인할 수 있겠지. 19레벨이라, 요구 경험치량을 떠올려보면 머나먼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악크샨의 유일한 생존자.
덕분에 악크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존재했으니.
그래, 아끼고 아껴온 나의 적금.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있다.
이 순간에도.
악마를 사냥하며 경험치와 명성을 쌓고 있을 기계탑 말이야.
‘하나만 찾아서 회수해도.’
700레벨,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서두르자, 호열아.
내일이면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도 사라진다.
현실에서 밀렸던 일만 처리하면 곧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재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순서를 지켜야겠지만.
‘사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최우선.
가장 시급한 목적은 클라우디 저택 방문이었다.
이유야 말하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흑암룡 전설이 아르카나 대륙에 널리 퍼지기 전에.
그나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 때.
목격해야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거든.
하지만.
“여명 앞에서 어둠은 허울과도 같은 것.”
알게 됐잖아?
“어둠을 들추는 것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지.”
선악과를 둘러싸고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를.
심지어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걸로 추측했을 때, 그 원흉은 악마 혹은 악마와 관련됐을 게 확실했다.
악마라면 두고볼 수 없는 그랑펠의 발길은 시슬리를 향할 수밖에 없겠지.
물론.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클라우디 가문도 악마에게 몰락한 건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랑펠의 말대로.
아직 내 두 눈으로 클라우디를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그랑펠의 고귀한 긍지가.
대의보다 집안일을 우선시할 리가 없거든.
“교육의 시기 또한 중요한 법이니.”
하여튼…….
마탑에서 기이를 설파할 때부터 아주 그냥 유능한 교육자 다 되셨습니다, 그랑펠님? 내가 내면으로 구시렁거리며 깃털펜을 다시 쥔 순간이었다.
똑똑─
“?”
별안간,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겨왔다.
*
호열의 등장과 함께 조용히 물러간 드래곤 무리.
인류가 절멸의 위기를 탈출한 순간.
인류가 느낀 감정은 전부 엇비슷했다.
놀라움, 안도, 기쁨…….
그러나 수십억 분의 일.
인류와 동떨어진 감상에 빠진 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십수 년 동안 수십억 분의 일이라 불렸던.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 스칼이었다.
“……알렉산더,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지구 전역에 드래곤 출현!
그 사실에 스칼은 비로소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호열에게 극진한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감사하옵나이다, 호열 경……!”
그럴 수밖에.
스칼은 호열이 보름 동안 종적을 감춘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랬다. 클래스 퀘스트, [전룡소집(全龍召集)]에 이어 떠오른 월드 퀘스트 덕분이었다.
[월드 퀘스트 : 노룡의 마지막 비상]
죽어가는 노룡은 결단했다.
자신의 최후를 동족의 미래를 위해 불사르겠다고.
노룡의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하리라.
─노룡의 최후를 목격하라. (실패)
퀘스트 목표는 실패였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노룡이 정말 최후를 맞았는지, 맞지 않아서 실패인 건지.
스칼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현실에.
그것도 열 마리도 넘게 튀어나온 지금.
퀘스트 따위 성공이든, 실패든 아무래도 좋았다.
“있었어. 정말로!”
자신의 목표가 허상이 아니었다는 증거.
그 목표에 언젠가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걸 넘어서 저런 거대한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를 생각을 하니까…….
“……알렉산더, 이건 못 본 거로 해줘.”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스칼은 감격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스칼은 드래곤의 울음소리.
피어 하나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으으.”
강렬한 피어에 다리가 후들거려도.
꾹 참아내고 용기사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마리를 찾아냈다.
“……흑암룡이다.”
클래스 퀘스트부터 월드 퀘스트.
마지막으로 흑암룡까지.
분명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 흑암룡이라는 걸 찾는 데에.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어쩌면 친밀도를 쌓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스칼이 행동에 돌입하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호열이 나타났다.
감히 누구도 손댈 수 없던 상황을 순식간에 정리해 버렸다.
스칼은 멈칫했다.
“설마, 이번에도 경께서는……?”
흑암룡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계신 겁니까?
“면목이 없지만……!”
스칼은 염치를 무릅쓰고 당장이라도 호열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다.
죽어가던 노룡은 어떻게 된 건지부터.
흑암룡에 관한 정보까지.
궁금증이 산더미 같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절차. 절차. 절차를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기다렸다.
황금 궁전 앞에서.
호열이 복귀하기를.
“부탁입니다. 에노크 경!”
그리고 이젠 완전히 안면을 튼 라이언 하트의 기사.
에노크에게 사정을 전달했다.
이러한 용건이 있기에 호열 경을 뵙고 싶다고.
그에 관한 대답은 머지않아 되돌아왔다.
스칼이 애타는 눈빛으로 에노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
.
.
문을 두들긴 건 에노크였다.
정확하게는 스칼의 소식을 전해 온 에노크였다.
그래, 용기사 스칼이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스칼.’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스칼이 드래곤에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던 나였으니까.
그런 스칼보다 내가 먼저 드래곤 위에 올라타게 될 줄이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참…….’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때론 모르는 게 약이다, 스칼.’
뭐,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랑펠은 몰라도.
나, 이호열은 배려라는 걸 할 줄 아는 사회인 아니겠는가?
게다가 스칼이 아니었다면.
유낙서스에 관한 소식을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그와 얽힌 히든피스도, 퀘스트도 그냥 지나쳤을 거야.’
스칼의 협조 덕분에 성과를 얻은 만큼.
나도 스칼에게 협조해 줘야겠지.
나는 언제나처럼 읊조렸다.
“주고받음인가.”
그 소릴 왜 안 하나 했다, 내가.
주고받음도 주고받음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걸 말이야.
‘스칼은 특기 전력이다.’
히든 클래스, 용기사.
그 잠재력은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쩌면, 스칼과 드래곤이 좋은 관계를 맺게 하는 것도.
성전 연합군 총대장의 무게일지도 모르겠지.
그런 의미에서.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이지만, 귀를 열었다.
합당한 목적만 있다면 만나주려고 생각했단 말이다.
……그런데, 뭐라고?
“스칼 경이 흑암룡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드래곤 중에서 흑암룡인데?!
.
.
.
미끌─
“……네, 네?!”
찻잔을 들고 있던 스칼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청천벽력.
호열이 어느 때보다 냉랭히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장담하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그대는 흑암룡에 다다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