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51화 (251/489)
  • ◈ 251화. 우애가 필요하다면

    히든피스.

    아르카나가 게임일 때부터 소문은 무성했다.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했는데도, 히든피스를 찾겠다는 목표 하나로 탐험가 클래스를 택한 이들까지 있을 정도로 말이지.

    이유야 간단하다.

    히든피스.

    이름부터 어마어마한 보상이 뒤따를 것 같잖아?

    하지만 대격변 이후.

    AAU가 플레이어들에게 아르카나의 정보를 공유한 뒤로.

    히든피스는 허무맹랑한 농담이 됐다.

    -보상 구현도 안 됐다는 걸 뭐하러 찾음ㅋㅋㅋ

    -ㄹㅇ 애초에 찾으라고 만든 게 아니자너

    -걍 찾아도 맥 빠질 듯ㅋㅋㅋ

    대격변 이전.

    히든피스는 당시에 등장할 콘텐츠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나중에나 써먹을 미구현 콘텐츠였다는 거지.

    때문에 AAU 측도 보상이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했다.

    ‘그게 당연하지.’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앞서서 개고생…….

    아니,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굵직한 경험을 해온 나였거늘.

    그런 나조차도 히든피스를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

    [히든피스, 용의 신전]

    사실 뒤에 붙는 이름만 봐도 저절로 납득이 된다.

    히든피스, 한 마디로 이름값을 제대로 했거든.

    일단, 진입 난이도부터가 상상을 초월하잖아?

    ‘빙룡의 설산만 하더라도.’

    차원의 틈에서 빙룡, 프로즈낙스와 만나야 한다는 조건이 따랐으니까. 뭐, 용의 신전은 그보다 더하겠지. 드래곤이 아니면 접근할 수도 없으니까, 저긴.

    ‘인정하긴 싫다만…….’

    ……나야 흑암룡이니까 예외였던 거고.

    여튼, 히든피스는 그만큼 거창한 장소란 말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비약초나 키우는 유스라 왕국 텃밭에 히든피스라는 수식어가 붙다니……!

    생각할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없는 보름 동안.

    텃밭에 무슨 일이 생긴 거구나.

    엘시도어.

    축복의 위계질서 발동.

    “!”

    그 탓에 한 발짝 물러나는 엘시도어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딱 봐도 켕기는 게 있는 눈치잖아, 이거는.

    마음 같아서는 엘시도어를 붙잡고 속 시원하게 묻고 싶었다.

    어차피 위계질서도 있겠다.

    내게는 숨기고 싶은 게 있어도 숨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랑펠이 누구인가?

    지나치게 고결한 긍지의 소유자.

    불의의 사정으로.

    보름 동안 화원에 들르지 못한 것 또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라고 생각하는 귀찮은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엘시도어를 추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우선, 엘시도어가 가리고 서 있던 건 비약초였다.

    그런데, 잠깐만…….

    어째 생김새부터가 심상치 않다?

    꽃잎이 지나치게 넓고 흐드러지게 피었다.

    또한 무엇보다 눈에 띄는 큼지막한 열매까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확 시기를 지나친 탓인가.”

    정말로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헉…….”

    엘시도어가 흠칫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과잉반응 뭔데?

    누가 보면 내가 진짜 노예처럼 부려 먹고 있는 줄 알겠다.

    수확 시기를 놓친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화원을 찾지 못한 탓이니까.

    천하의 그랑펠이 남 탓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우려할 것 없다고.

    너그럽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실로 기이하게 자라났군.”

    그렇다.

    눈앞에 보이는 열매가 진짜 ‘기이’했으니까.

    내가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왕의 전리품,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 효과 덕분에 아르카나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광물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나였다. 하지만 그 지식 속에도 이 열매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저 열매는 외관만 ‘기이’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기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비약초 텃밭에 히든피스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게 된 것도 이해가 된다. 기이가 자라난 텃밭이라면, 어쩌면 히든피스라고 불릴 자격을 얻게 될 만도 한 거겠지.

    ‘그래서 중요한 건.’

    어떻게.

    텃밭에 기이한 열매가 자라났느냐는 것이다.

    나는 열매를 살피며 엘시도어에게 물었다.

    “그대 이외에 화원에 방문한 이가 있었나?”

    “……없다.”

    “확신하는가?”

    “그렇다. 나는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하긴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나?

    엘시도어의 성질머리야.

    첫 등장 때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다.

    지금이야 위계질서 때문에 별소리를 못 하고 있는 거지.

    인간은 물론, 자신을 제외한 모든 걸 업신여기는.

    그 성질머리가 고쳐졌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는다고.

    ‘그런 엘시도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누가 감히 텃밭에 들렀겠어?

    그렇다면 역시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엘시도어, 스스로 말한 것처럼.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비약초를 돌본 덕분에.

    비약초는 [『기이』]하게 자라난 것이다.

    기이.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 서로 합쳐진 것.

    비약초의 성질에 더해.

    엘시도어가 어떤 영향을 끼쳐서.

    기이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일단, 보는 것만으론 효과를 알 수 없다는 것.

    그 효과를 알기 위해선…….

    ‘먹어봐야겠지.’

    물론, 미쳤다고 현실에서 열매를 삼킬 생각은 없다.

    효과를 아는 영약을 섭취했을 때도.

    그 반동으로 찻잔을 떨어트린 채 기절했었단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말이야.’

    뭐, 아프긴 하겠지만.

    거기선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잘했다, 엘시도어.

    덕분에 뭔지는 몰라도 범상치 않은 과실을 얻었구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긍지가 결실을 맺었군.”

    긍지가 결실을 맺다니, 표현 참…….

    내뱉는 나로서도 알아듣기 힘든 그랑펠식 화법.

    그러나 또 어찌어찌 뜻은 통하는 모양이다.

    “그런가. 하하…….”

    엘시도어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거든.

    어느새 엘시도어도 비약초를 키우는 데 진심이 된 건가.

    농부가 엘프 적성에 맞는 일이었나.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차,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그러고 보니까 물어볼 게 있었지.’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진행 중)

    간만의 클래스 퀘스트.

    세계수와 선악과.

    그리고 악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단서를 쫓기 위해 시슬리에 진입을…….

    “!”

    아니, 잠깐만.

    순간, 감전된 것처럼.

    찌릿했다.

    선악과.

    눈앞에 보이는 열매.

    엘프들의 고향, 시슬리.

    엘프, 엘시도어가 상주하고 있는 품격의 화원.

    전혀 다른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선악과.

    전혀 다른 두 성질, 기이를 품고 있는 열매.

    ……이거 우습게 볼 공통점이 아니었잖아?

    *

    황금 궁전.

    그러나 자신이 머무는 별채가 아니다.

    엘시도어는 이 순간,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뭐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대의 긍지가 결실을 맺었군.”

    과정을 떠나서 그 마지막엔 분명 그런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벌써부터 어머니의 축복을 돌려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화원 관리에 소홀히 했다는 질책은 면했으니.

    하지만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가.

    “따라오도록.”

    또각─

    어느새 호열의 뒤를 따라 졸졸 쫓고 있는 자신이었다.

    엘시도어는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기를 거스른 행동은…….

    ‘……설마?’

    역시, 들킨 건가?

    뿌리부터 뽑으려고 했던 것부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찔리는 구석은 넘쳐났다.

    몸으로 꽃과 열매를 가려보려다가 한소리를 듣고 물러난 것까지……. 그렇기에 엘시도어는 쭈뼛거리며 호열의 집무실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쿵─

    ‘윽.’

    문이 닫히는 순간.

    새삼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다.

    위계질서 때문에 호열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고분고분 대답하던 그때가. 경험이 있어서일까. 엘시도어는 쓸데없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애초에 위계질서를 거스를 수 있었다면.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먼저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묻는 것에 순순히 답하겠다.”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엘시도어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정말 모든 걸 말해야 하는가……!’

    호열이 자리를 비운 보름.

    엘시도어는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보았다.

    역시나, 제일 걸리는 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혼잣말이었다.

    -“보아라. 내가 주는 물이 더 낫지 않느냐.”

    -“하하, 이래서야 누가 화원의 주인인지 모르겠군.”

    -“이게 품격이고, 품격의 화원이지.”

    ……그걸 전부?

    순간, 고뇌에 빠진 엘시도어.

    그런 엘시도어에게 호열이 말을 이었다.

    그건 조금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엘시도어.”

    “……듣고 있다.”

    “그대는 시슬리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시슬리?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갑자기 과거의 일을 물어올 줄은.

    추궁을 하려던 게 아니었나.

    엘시도어가 끝까지 의심하던 순간이었다.

    자비로운 권유가 이어졌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군.”

    “……!”

    “어쩌면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

    정말로.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인가?

    “…….”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질문.

    게다가 걱정했던 질문이 아니었기에.

    엘시도어는 대수롭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시슬리에서의 일과라고 해봤자 정말로 유별날 게 없었으니까.

    “나와 동족들은 시슬리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영원을 향유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과 비슷한 삶이었다. 물론, 시슬리에선 공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자라났기에. 지금처럼 번거로운 수고는 필요치 않았지만.”

    “거기엔 세계수도 포함인가?”

    “당연하다.”

    당연한 것을 넘어서.

    세계수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었으니.

    교감의 대상에는 당연히 어머니도 포함이었다.

    “……마셔도 되나?”

    “물론.”

    “……고맙다.”

    엘시도어는 호열이 내어준 찻잔을 들고는 기울였다.

    ‘녹색 물?’

    씁쓸한 맛 따윈 상관없었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 데엔 온기만 있더라도 충분했으니까.

    엘시도어가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시슬리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순간.

    다시금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세계수 또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겠군.”

    “그랬겠지.”

    “그대들의 보살핌이 있었다면 말이다.”

    과연, 인간답지 않은 심미안의 소유자다.

    단번에 우리의 위대함을 알아보는군.

    엘시도어는 어느샌가 콧대가 우쭐해졌다.

    “씨앗을 뿌리는 것이 도마뱀들의 역할이라고는 한들. 우리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씨앗을 품은 열매를 맺을 수조차 없다. 그러니 지금 사태의 책임은 우리가 아닌 도마뱀들에게 있는 것이다.”

    먼저 심기를 거스른 쪽은 드래곤, 도마뱀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동족들도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머니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은 것도.

    드래곤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씨앗을 뿌린 것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랬나.”

    언제나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과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모든 건 형제의 긍지가 부족한 탓이었군.”

    .

    .

    .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랑펠, 넌 녹차 중독이 맞다.

    녹차의 카페인이 들어가서겠지.

    ‘두뇌 회전에 막힘이 없는 기분이야.’

    그래서일까.

    엘시도어의 말을 듣는 순간, 얽혔던 실마리가 풀렸다.

    어디서부터 오해가 시작됐는지 알아차렸단 뜻이다.

    ‘드래곤과 엘프에겐 각자 사명이 있었다.’

    드래곤에게 씨앗을 뿌려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면.

    엘프에겐 씨앗을 품고 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 사명이 말이야.

    그러나 엘시도어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과 동족들은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세계수의 열매.

    선악과는 애초에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드래곤들도 마찬가지다.

    드래곤의 책무는 단지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씨앗을 싹 틔우는 게 아니었다.

    시작부터 ‘누군가’에게 농락을 당했단 뜻이다.

    “모든 건 형제의 긍지가 부족한 탓이었군.”

    형제의 긍지.

    그랑펠어를 해석하자면 우애를 말하는 거겠지.

    말뜻대로 우애가 부족하지 않았다면.

    서로 대화를 나눴다면.

    오해를 풀었다면.

    사건의 원흉을 찾아냈다면.

    지금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이래서 가정이 화목해야 된다는 건데.’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랑펠 사전에 후회란 단어는 없거든.

    단지 후회할 시간에 나아갈 뿐이지.

    “허나 그 또한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다.”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슬리에서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다.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은 물론.

    “지도 교육을 통해서 말이다.”

    “?!”

    드래곤과 엘프.

    형제의 우애 회복까지.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집안은…….

    막내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하게 생겼냐!

    .

    .

    .

    타다닥.

    자판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

    커뮤니티에 새 글이 갱신된다.

    [제목 : 그런데 흑암룡인가 하는 뭔가 말인데]

    [글쓴이 : ㅇㅇ]

    [내용 : 그거 왠지 호열 님 같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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