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아무 일이 있었다 (3)
창문 너머로 비쳐오는 햇살이 쨍쨍하구나.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애써 주변을 둘러본다.
이럴 때는 마탑의 비현실적인 구조가 야속하게도 도움이 된다.
드래곤에 덩치에 맞게 알아서 확장된 크리스탈 홀.
그런 드래곤을 흘겨보는 이들까지.
함께 착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
‘……그냥 넘어갈 순 없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시치미를 떼려던 나의 계획은 드래곤들의 호들갑으로 완벽하게 무산되었으니까……! 이 순간, 지구에는 드래곤들의 눈물바람에 의한 후유증이 한창이었다.
‘적의는 없어서 다행이다.’
드래곤들이 내뱉은 피어라고 해봤자 흑암룡.
내 이명을 부르짖는 것밖에 더 되겠냐?
덕분에 다들 휘청거리는 수준에서 끝난 거겠지.
왜, 프로즈낙스를 훈육하는 바람에 살의가 담긴 드래곤 피어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는 잘 알고 있었거든.
‘그런 걸 내질렀다고 상상하면 끔찍하다, 진짜.’
플레이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반인들은 그 생명에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대들을 소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어디에 내놓아도 한 치 부끄럼 없는 이놈의 긍지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 있으랴.
그래서 이렇게 크리스탈 홀에 모였다.
“그대들에게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내뱉는 와중에도 입맛이 쓰다.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필이면…….
어째서 수십의 드래곤 중에서 하필 ‘쟤’냐?
왜 전과가 있는 대지룡, 쿠드하낙스란 말이냐……!
“알다시피 나는 포탈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
사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사소한 건 떼어놓고 굵직하게 설명하면 되잖아?
왜, 평상시 그랑펠이 잘하는 것처럼.
“그 원리는 접속기를 모방.”
사실을 나열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 목적은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그와의 선약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드래곤과의 선약이라.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나 혼자 한 약속이었거늘.
어쨌든, 다들 벌써부터 놀란 표정들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말이지.
나는 태연하게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래곤들을 지도 교육했다.”
과연, 천하의 그랑펠다운 요약이었다.
지도 교육이라.
사실 그만큼 명확한 한 줄 요약도 없었다.
어머니 세계수와 자식 드래곤 사이의 오해를 풀고, 또 유낙서스랑 드래곤들을 화해시키고, 긍지를 깨닫게 하고……. 지도 교육이 맞긴 하겠네.
다만 그 과정이란 걸 지나치게 생략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빙룡과 죽을 듯이 치고받고 싸우고, 용의 신전이란 히든피스를 발견하고, 거기서 찻잔을 깨트리고 죽었다는 것까지.
아주 그냥 화끈하게 생략했구나, 그랑펠.
아주 그냥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설명이다.
그나저나…….
‘그래도 고마워해야 하나?’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런 나의 개고생을 알고 있는 청중이 하나 있다는 걸까.
그렇다, 쿠드하낙스를 말하는 거다.
모든 걸 지켜본 쿠드하낙스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쿠드하낙스를 흘겨보고 있었고.
‘제발 계속 그렇게 다물고 있어주라.’
이호열 클라우디.
혹은 흑암룡이라는 호칭을 꺼낼까 봐.
진심으로 두렵구나.
그래도 눈치가 빠른 유낙서스라면 함축적인 내 말에서 속뜻을 알아차렸을 텐데……. 안타깝게도 유낙서스는 아르카나 대륙에 있었다.
‘전룡이 현실에 나타난 게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스물하나의 드래곤이 둘로 나뉘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활강하며 나를 찾아 헤맸던 모양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더 아찔해진다.
‘현실도 모자라서 아르카나 대륙까지……!’
흑암룡이라는.
나의 빌어먹을 이명이 울려 퍼졌겠구나.
그러나 마음 단단히 먹자, 호열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쿠드하낙스만 허튼소릴 하지 않도록 단속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의 작은 소란이 더없이 감사했다.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분명, 드래곤을 지도 교육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보름 동안 자리를 비우신 이유가 있으셨구나.”
“……너, 진짜 믿겨서 하는 소리야?”
“긍지가 부족하구나, 레오니. 믿어. 그냥.”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 슈레이그.
그래, 지금처럼 그렇게 속닥거려 주라.
시선을 옮겨 아르카나 청중 쪽을 바라본다.
“이번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왔군, 경!”
“오늘을 계기로 용마대전의 역사를 새로이 써야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탑주님?”
“상상, 그 이상이군. 우리 잘나신 이 수석은 언제나.”
하르콘, 유그위드, 마르셀로, 탑주…….
마찬가지로 계속 웅성거려도 좋다.
오늘만큼은 잡담을 얼마든지 허용하겠다.
그깟 잡담보다도 쿠드하낙스에게 입을 열 틈조차 주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쿠드하낙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싶긴 했는데…….
모든 이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쿠드하낙스가 내게 말해왔다.
“후후. 클라우디시라면 능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전설’에도 힘이 깃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전설에 담긴 힘은 세간에서 얼마나 회자되느냐에 따라 달린 법이지요.”
쿠드하낙스.
유낙서스와 동시대를 살아온 노룡이라고 했던가.
덕분에 정말로 아는 게 많았다.
전설에 관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그랬다.
‘전설에는 진짜로 힘이 깃든다라.’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추상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지.
귀철과 같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설]이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스템이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살 구멍은 언제나 환영이다.’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순 없다만.
내가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생각하던 도중.
쿠드하낙스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지켜보았습니다. 과연,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이 세계에도. 클라우디와 흑암룡의 전설이 충분히 울려 퍼지고 있는가를.”
그 말에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니까 저 말은 지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지켜봤다는 거 아냐?!
그러니까 속된 말로.
나를 향한 주접이 부족했더라면 쿠드하낙스, 본인이 나서서 클라우디와 흑암룡의 명성과 위상에 관해 떠들어댔을 것이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내가 지나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싶었다.
자칫 잘못하면 흑암룡으로도 모자라서.
클라우디에 관한 이야기까지 발설될 뻔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후후. 노룡의 노파심이지요.”
물론, 내뱉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그럼, 명에 따라 복귀하겠나이다.”
……그나저나 명이라고 하니까.
내가 진짜 주제도 모르고 드래곤한테 명령이라도 내린 것 같잖냐, 쿠드하낙스. 말을 건네기는 했다만, 그건 명령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걱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거든.
오직 순수한 악의만이 담긴 세계수의 열매.
악과(惡果)를 삼킨 드래곤들이었다.
듣기만 해도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이 팍팍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되도록 빨리 그 열매를 뱉어내는 게 좋겠다, 권유했던 나였다.
“그대들이 방도를 찾길 바란다.”
하지만 보다시피.
삼켰던 악과를 쉽게 뱉어낼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드래곤 소화 기관의 한계인지.
악과의 효과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뭐, 이쪽도 나름대로 노력을 해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쿠드하낙스.
“나 또한 방도를 마련해 볼 테니.”
뻔뻔하게 ‘나’라고 답했거늘.
‘사실 나보다는 전문가들에게 부탁해야겠지.’
실상은 벨리에 선임과 클레를 비롯한 치유마법학 마법사들이 고생을 좀 하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들의 연구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출탑 신청서에 허가를 휘갈기는 것뿐.
“쿠드하낙스,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부담스러운 인사를 끝으로.
쿠드하낙스가 차원을 찢고 용의 신전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드디어 소란이 일단락됐구나.
‘하루가 왜 이렇게 기냐?’
잠시 숨을 돌릴 법도 하거늘.
이놈의 업무 중독.
질리지도 않고 다음 할 일을 떠올린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읊조렸다.
“비로소 가려진 어둠을 들출 때인가.”
가려진 어둠.
그랑펠식 화법을 번역하자면, 디엔드가 발견한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치스러운 클라우디 가문의 후광조차 써먹겠다고 다짐했던 나다.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래.
사실 외면하려고 발악하는 시간에.
차라리 익숙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
‘빌어먹을 로미오…….’
물론, 노력한다고 익숙해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호열아.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의 긍지를 보일 때다.
“허나, 그조차도 절차에 따라야겠지.”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사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클라우디 가문이라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싶었다.
왜, 드래곤들이 성대하게 눈물을 흘려준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흑암룡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이 퍼져 나가고 있을 터.
‘대륙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기 전에……!’
한발 빠르게 저택이란 걸 목격하고, 써먹을 수 있는 설정들을 확인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가 발목을 붙들었다.
[쿨타임 : 21시간 42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사망 페널티와 동일한 [최후의 모험가] 페널티 효과. 때문에 포탈을 열든, 접속기를 사용하든 앞으로 하루 동안은 아르카나 대륙에 재진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떠맡은 짐이 워낙 많아야지.
‘보름이나 지났다니.’
보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수석으로서도, 총책임자로서도, 권한자로서도.
쌓인 업무가 장난이 아닐 게 당연하다.
보자, 사회인의 경험을 되살려본다.
‘무단결근 보름이면……. 대충 수습해도 일주일은 걸리겠는데?’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첫 세계수의 축복] 소유자.
끊임없이 재생되는 생명력 덕분에.
매일같이 한계를 자극하는 노가다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상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는 독종이 아니던가.
자신감 넘치는 선언.
“하루면 충분하다.”
거기에 또 그랑펠식 화법이 빠지면 섭섭하지.
“내게는 흘러가는 시간조차도 숫자에 불과하니.”
네네, 잘나셨습니다. 그랑펠님.
‘여튼 잘난 척은 빠지지 않는구나.’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봐야 철이 들 텐데…….
나 때문에 울부짖는 드래곤들을 보고 나니까.
그따위 생각은 말끔하게 사라진다.
그걸 넘어서 오히려 두려워진다.
‘이래서 사춘기가 중요한 건데.’
이렇게 오냐오냐했다가는, 갈수록 점점 오만해지는 거 아닌가 하고는. 그리고 갈수록 커져갈 수치심을 내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하고는……!
그러나.
‘나중에 걱정하자.’
말했다시피.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상대들 앞에선 모든 걸 끌어와도 역부족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이 오만함조차도 원동력으로 삼아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항상의 자세.
덕분일까.
곧바로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절멸의 위기에서 세계수는 씨앗을 뿌리기 위한 열매를 맺었다. 허나,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열매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고 나뉘어 맺히게 되었으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선과 악을 분리한 죄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이자 또 다른 목적지, 시슬리.
그에 관한 정보 수집 또한 잊어선 안 되겠지.
나는 마르셀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간 탑주님께서 경의 공백을 대신하셨습니다.”
게으른 고양이가 일 처리를 제대로.
그랑펠의 기준치를 충족할 정도로 해냈을지는 모르겠다만.
마탑에 쌓인 업무보다는 유스라에 쌓인 업무가 더 많을 터.
그 우선순위에 따라서 나는 포탈을 발현했다.
목표 좌표는 당연하게도.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이다.
.
.
.
황금궁전.
『품격의 화원』
그 주인이 알게 된다면.
기겁할 이름을 비약초 텃밭에 붙인 건 엘시도어였다.
“다들 이제야 봐줄 만하구나.”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손길이 닿은 비약초가 단순한 꽃 취급을 받는 것?
엘프의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한낱 도마뱀이 무엇을 알겠느냐?”
드래곤이 울부짖는 그 순간에도.
엘시도어는 동요 없이 비약초를 가꿨다.
그런데, 잠깐만……?
무엇이냐?
저 과할 정도로 커다란 꽃잎은?
울퉁불퉁한 열매는?
엘시도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수확하지 않아서인가?’
추측은 정확했다.
호열이 보름 동안 비약초 텃밭…….
아니, 품격의 화원을 찾지 않았기에.
넘치는 축복을 받고 과성장한 비약초였다.
엘시도어는 떠올렸다.
‘그 인간은 누구보다 미관을 중시한다.’
감히 평가하건대.
그 인간, 호열의 심미안만큼은 엘프와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가 화원에 저런 꽃이 핀 것도 모자라 흉측한 열매까지 맺힌 걸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내가 없는 동안 편안했던 모양이군.”
다음 말을 상상하자 소름이 돋아났다.
-“그대에게 긍지를 느낀 건 나의 착오였나.”
그놈의 긍지라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긍지가 없다면.
어머니의 축복을 되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엘시도어가 결단을 내렸다.
“……뽑아주마.”
이렇게 많은 꽃 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눈치채겠는가?
결심한 엘시도어가 과감히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전신을 얼어붙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목소리가 들려왔다.
“품격의 화원이라.”
“……?”
“무슨 짓을 하고, 하고 있는 것인가. 엘시도어.”
“!!!”
.
.
.
……엘시도어, 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히든피스, ‘품격의 화원’에 진입하셨습니다.]
비약초 텃밭에 이런 휘황찬란한 수식어가 붙은 거냐……?
내가 정말 흑암룡만으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데!
이젠 하다 하다 텃밭에 금칠이라니. 형제가 쌍으로 막내를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냐? 어째 드래곤과 엘프에게서 우리집 웬수들의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막내라서 서럽다…….’
한탄하기도 잠깐.
나는 우물쭈물거리는 엘시도어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뭔데.
등 뒤에 숨긴 거.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은 눈치지만 소용없다.
“물러나라.”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암만 못살게 굴어봤자, 엄마는 막내 편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