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아무 일이 있었다 (2)
겨우 한 사람의 공백이.
이렇게 크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호열, 그가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오히려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총대장님이 누구한테 걱정을 받을 처지신가?”
“그러니까. 걱정할 시간에 우리 걱정이나 좀 해라.”
“레벨 꼬라지가 이게 뭐냐, 진짜.”
주고받은 말대로.
호열은 타인의 우려를 받을 존재가 아니다.
증명할 것도 없이 그간의 행적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
우려를 기우로 바꿔버리는 활약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가 아니었던가?
더 나아가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꼿꼿함이 꺾인 적이 없었던 호열이었다.
“그래, 다들 별 걱정은 하지 않고 있군. 이 수석.”
살랑─
마탑의 최상층.
탑주는 바닥에 발라당 누운 채 꼬리를 흔들었다. 허나 평소와 다르게 꼬리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곤두서 있었으니, 이유는 당연하게도 호열 때문이었다.
“구경 값 한번 비싸군, 그래.”
보름 전.
호열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던 그날.
그냥 평소처럼 낮잠이나 퍼질러…….
아니, 회복에만 전념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이라니. 외면할 수가 있겠냥…….”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동한 게 문제였다.
하루이틀까지는 모른 채 할만도 했거늘.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신경이 쓰여 양피지에 발도장조차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별안간, 들려오는 마르셀로의 목소리.
“업무를 내팽개치시고 또 누워 계시는 겁니까?”
“꼬마 수석. 나는 지금 심각한 상황이다.”
“심각한 것과 업무는 별개입니다.”
“무엄하다. 말대답하지 말거라.”
“시끄럽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슥─
마르셀로가 바닥에 엎어진 탑주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적당한 상석에 탑주를 옮겨두었다.
마치 물건처럼.
영 탐탁지 못한 시선이 탑주에게 이어진다.
“곧 선임들이 최상층을 찾을 겁니다.”
“선임들이? 최상층에? 왜?”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탑주는 흠칫했다.
……설마, 건성으로 발도장 찍은 걸 알아차린 것인가.
단체로 의의제기라도 하려고 몰려온 건가.
냥심……. 아니, 양심이 찔렸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수석님에 관한 우려 때문이겠지요.”
마탑.
수뇌부를 포함한 선임 마법사들은 호열이 어떤 각오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했는지 알고 있었다.
호열이 자신의 입으로 각오를 말한 건 아니었다만, 그 행동에서 알 수 있었으니까.
탑주가 괜히 구시렁거렸다.
“그러게 뭣 하러 결전용 마도구를 챙겨서는…….”
투덜거림은 거기까지였다.
곧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마탑 최상층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의 뒤에서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멋쩍게 빠져나온다.
“저는 선임들께 충분히 설명했답니다, 탑주님? 우리 수뇌부에게 숨기는 건 없다고. 우리라고 이 수석의 뜻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선임 마법사의 대표격.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수석님의 뜻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유그위드가 고개를 돌려 되묻는다.
“그렇다면 용건은 무엇인가요, 마티스 선임?”
용건이라.
간단명료하다.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
그것이 용건이었다.
“마도구, 접속기의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결전용 마도구를 열 하고도 두 점이나 대여했다는 의미는 명확하다.
이 수석께서는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적과 마주할 각오를 마치시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 수석께서 보름이 지나도록 마탑으로 복귀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는…….
“분명, 이 수석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신 겁니다.”
마탑 최상층에 비장함이 맴돌았다.
탑주의 꼬리가 흔들렸지만.
역시나 그 털이 한껏 솟아 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
“그대들에게 그 마도구의 사용을 허가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그 접속기라는 괴상한 마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네. 꼭 내가 아니더라도…….”
탑주는 마르셀로를 바라보았다.
마르셀로가 반박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탑주와도 선임들과도.
“하지만 유감이네, 마티스. 그럴 순 없으니.”
보름을 넘어서.
설령 수개월 동안.
이호열 수석이 마탑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로 진입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원칙론자, 이 수석이 선언하지 않았던가?”
“……!!!”
“반드시 그 절차에 따라 사용하겠다고.”
수뇌부라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호열이 남긴 말이 있었기에. 접속기라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뿐이지.
‘경이라면 절차를 어긴 도움 따위 원치 않으실 테니까요.’
마르셀로는 덧붙였다.
“또한 제가 아는 이 수석님이시라면, 그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마탑으로 복귀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러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임 전원.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중에서도 절차에 된통 당해 본 벤쉬 윌리엄이 유독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갑작스러운 회담이 그렇게 마무리되려던 순간이었다.
바짝─
순간, 탑주의 털이 곤두섰다.
비단, 탑주만이 느낀 기척이 아니었다.
원로, 수석, 선임.
심지어는 최상층 아래의 숙련, 견습 마법사들까지도.
“……이건?”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기척에 직감하고 말았다.
콰르르릉─!
순식간에 어둠이 깔린 하늘.
쏟아지는 비.
벼락.
그 풍경과 겹치듯 떠오르는 용마대전의 기록들.
그랬다.
이건 아무리 봐도 용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 증상이었다.
저들의 목적을 알 수 없었으나 탑주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이 시간부로 마탑 전원의 출탑을 허가한다.”
용마대전의 교훈?
간단하기에 잊지 않는다.
감히 드래곤과 맞서려고 들지 마라.
“쯧.”
그러나 맞서지 않는다면.
모험가들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마탑은 플레이어, 모험가들의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호열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면 견습 마법사보다도 약한 존재들.
그런 이들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세계였다.
“온전치 못한 전력으로 2차 용마대전이라니.”
그렇기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탑이 타인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다니.
스스로 돌아봐도 웃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째 탑주의 공석보다도 이 수석의 공석이 크군.”
수석, 호열이 자리를 비운 지금.
그가 짊어졌던 크나큰 짐을 대신 짊어지는 건.
자신을 비롯한 마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마탑의 절차니까.
“이리도 무거운 짐을 어찌 홀로 짊어지고 있던 건가, 이 수석?”
.
.
.
신속하게 움직인 건 마탑만이 아니었다.
제로 산맥.
사냥에 한창이던 플레이어들도 변화를 느꼈으니까.
“다들 멈춰.”
“이게 무슨 일이래요……?”
“방금까지 해가 쨍쨍했는데, 갑자기 웬 비가?”
단순하게 소나기라 치부하기는 과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째 이놈의 일기예보는 맞는 적이 없냐, 진짜.”
“……잠깐만요.”
“왜? 장마라도 시작됐대? 아니면 태풍?”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제가 문과라서 그런데요. 전 세계에 동시에 비가 오는 게 가능한 일이에요? 과, 과학적으로……?!”
말 그대로였다.
쏴아아아─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심지어는 눈이 내려야 할 극지방에도 비가 내린다.
할 말을 잃어버릴 만큼 의아한 일이었거늘.
역시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크롸롸롸─!
“……!!!”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주의 :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가공할 만한 드래곤 피어의 후폭풍이.
“드, 드래곤……!!”
랭커라 불리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조차 감히 상태이상에 저항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반인들도 피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전조에 불과했으니.
“한 마리가 아니야. 세 마리, 아니,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총 십여 마리의 드래곤들이 차원을 찢고 나타나서는.
지구 전역을 활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에 빠진 건 AAU였다.
대한민국 지부.
“하하…….”
박민재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드래곤이 어떤 족속인지,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이었기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지! 선배, 스칼이 있잖아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걸까?
패닉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성현준이 윤수겸을 붙잡고 말을 잇는다.
“히든 클래스 용기사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 스칼이라면……. 벌써 행동에 돌입했을지도 몰라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짬밥치고는 좋은 사고방식이라며 어깨를 두들겨 줬었겠지.
하지만 모니터에 떠오른 드래곤들의 상태가 문제였다.
박민재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스칼이고 뭐고,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을 거야.”
지구 전역에 쏟아지고 있는 폭우.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건 용의 눈물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드래곤들은 어째서인가,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저들이 내뱉는 용언(龍言), 드래곤 피어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멈추지도 않을 거다.”
“……지부장님.”
“저 흑암룡이라는 걸 찾기 전까지는.”
그 탓에 AAU 전 지부에는 비상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드래곤들이 찾는 흑암룡의 정체를, 어떻게 해서든 특정해야 한다는 비상령이 말이다.
그러나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도.
“……찾지 못했습니다.”
흑암룡과 관련된 정보 따윈 없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흑암룡, 내가 저런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역시나, 이 사태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레이먼 션.
그 자식밖에 없을 터.
아니지, 호열이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총책임자님에게 의존할 순 없다.’
호열은 자리를 비운 상태.
게다가 언제까지 받기만 할 순 없다.
양심을 되찾자, 박민재.
벅벅─
박민재가 마른세수로 정신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역시, 마탑 측에 정보를 제공하는 게 최선이겠군.”
호열이 자리를 비운 현재.
인류 최강의 전력은 단연컨대 마탑이었다.
무엇보다 마탑은 드래곤이 나타난 순간.
전원이 드래곤에 대응하기 위해 마탑 밖으로 나섰다.
확실한 아군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성전 연합군 측에도 정보를 전달해야겠지.”
유스라, 프로스트, 성지 뮤온으로 이어지는 성전 연합군도 간과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다만, 그 비교 대상이 드래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이길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충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승패를 떠나서 뒤따르게 될 피해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일 테니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박민재는 주먹을 쥐고 간절하게 빌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아니다.
가장 빌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게.
염치없게도 또 한 번 빌고야 말았다.
“……총책임자님.”
.
.
.
마탑의 마법사.
성전 연합군.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각오가 무색해지는군.”
하르콘은 담담하게 읊조렸다.
전설 속의 드래곤.
그 살아있는 전설들이 십여 마리씩이나 모습을 드러낸 상황.
목숨을 내던지겠노라, 다짐했거늘.
아무래도 이곳을 전장이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뭔데, 저렇게 우냐.”
“그러게 말이다.”
“거, 나까지 우울해지게…….”
남태민과 레오니는 말꼬리를 흐렸다.
히사기가 빗물이 맺힌 턱을 훔치며 말했다.
“저들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군요.”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흘러내리는 비가 저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마탑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벤쉬가 뱅그릿에게 속삭였다.
“어째, 제가 아는 용마대전 속 드래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되게 난폭했다고 적혀 있었는데요.”
“그렇죠? 제가 잘못 읽었던 게 아니죠, 뱅그릿 선임! 분명, 쏟아지는 고위 마법을 보고도 즐거운 듯 실실 웃었다고 적혀있었는데 말이에요……!”
저게 용마대전에 기록된 오만한 드래곤이 맞단 말인가?
보고 있으면서도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 흑암룡이란 게 저들에게 어떤 존재이길래……?”
만물의 왕.
드래곤이 하릴없이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울부짖으며.
그를 찾는 것일까?
물론,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또각─
.
.
.
젠장.
이놈의 구두 소리는 언제나 주목을 집중시킨다.
돌아보는 이들의 시선과 마주한다.
마르셀로, 하르콘, 남태민……. 밉상 고양이까지.
기껏해야 몇 시간 전에 만난 것 같은데.
현실 시간으로는 보름이나 지났단 말이지?
그렇다면 저렇게 화색이 도는 표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아니잖아?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유달리 반짝거리는 드래곤.
“……!”
빙룡 프로즈낙스와 말이지.
‘이건 내 추측인데…….’
극한의 추위는 사람, 드래곤을 가리지 않고 성질머리에 악영향을 주는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니오스와 프로즈낙스의 날뛰는 감정 변화를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이제 와서 운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은 할 수 없구나.
나는 그저 언제나처럼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나.”
“……!”
“그대들도.”
한 차례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대들도 걱정할 것 없다고.”
그래, 이렇게 살아있는 거 봤으니까.
이제 됐지?
특히 드래곤, 너희한테 하는 말이다……!
‘진짜로……!’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살아있으니까.
놀랄 만도 하겠지, 그래.
그 심정은 너그럽게 이해하겠는데.
혹시라도.
기쁘다고 내 이름을 부를 생각은 하지 마라?
그렇다고 이명을 부를 생각도 하지 말고.
‘이호열 클라우디, 흑암룡……. 쨌든, 뭐든 안 된다!’
흑역사를 온 세상에 떠벌릴 바엔.
차라리 감동적인 재회로 오해받는 편이 나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