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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48화 (248/489)

◈ 248화. 아무 일이 있었다 (1)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절멸의 위기에서 세계수는 씨앗을 뿌리기 위한 열매를 맺었다.

허나,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열매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고 나뉘어 맺히게 되었으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선과 악을 분리한 죄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엘프들의 땅, 시슬리에 진입하라. (진행 중)

간만에 떠오른 클래스 퀘스트.

그 내용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군.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니.”

세상에 선(善)만 존재할 순 없다.

악(惡)이 존재하는 건 당연한 거지.

아르카나의 어머니라 불리는 세계수도 그걸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선악과를 맺은 거야.’

세계수의 과실, 선악과.

문맥으로 때려 맞혀 봤을 때 선악과가 품은 게 바로 세계수의 씨앗이겠지. 하지만 그 선악과가 세계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맺힌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자, [포식자의 늪지대]에서의 기억을 되짚어 보자.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을 때.

나는 일말의 악의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따뜻함만을 느꼈을 뿐.

그 온기가 바로 ‘선’이었겠지.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아마도 월드 퀘스트에 명시된 씨앗은 전부 ‘선’을 품고 있을 터.

그렇게 확신한 이유가 있냐고?

있다, 그것도 눈앞에 떡하니 있다.

“……틀림없이 어머니의 열매를 삼켰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드래곤들은 오직 악의만이 남은 ‘악과’를 삼킨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진짜 악랄하다, 누군지 모르는 악마 녀석.

‘만약, 순순히 뜻에 따랐다면.’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육신을 양분으로 싹 트는 게.

악의 씨앗인지도 모른 채 죽어갔을 것이다.

‘괜히 그랑펠이 말조차 섞지 않는 게 아니구나.’

역시 대화를 섞을 족속이 아니다, 악마 녀석들.

그나저나 대체 누구냐?

세계수와 드래곤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한 간 큰 악마는.

일단, 퀘스트 목표가 가리키는 곳은 첫 세계수가 뿌리를 내렸던 엘프의 땅, 시슬리였다. 용의 신전으로도 부족해서 엘프들의 땅이라니.

‘여기선 유낙서스라도 든든한 아군이라도 있었지.’

엘프 중에서 내 편이라고는…….

유스라 왕국에서 비약초 텃밭을 가꾸고 있는 엘시도어밖에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다행이라면 엘프들에겐 ‘축복의 위계질서’를 들먹일 수 있다는 정도려나.

‘결국, 하나씩 풀어가는 수밖에.’

악마 사냥꾼의 후각.

세계수의 족보.

마지막으로…….

클라우디의 후광까지.

써먹을 수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하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들의 의문도 해결해 줘야겠군.

나는 핵심부터 내뱉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대들은 농락당했다.”

“……농락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이 삼킨 것은 진정한 세계수의 씨앗이 아니다.”

나는 친절하게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세계수의 뜻과 다르게.

그대들이 삼킨 열매에는 오직 악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그대들은 죽지 않아도 된다.”

“……!!!”

그뿐만이 아니지.

만물의 왕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움츠리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거든.

“뜻대로 창공을 활강해도 좋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엔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악마들이 설치고 있다.

너희가 나선다면 저절로 기강이 잡히지 않겠어?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일제히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면, 제아무리 열등한 악마라고 하더라도 저절로 예절이 주입될걸?

“뜻대로 울부짖어도 좋다.”

간혹가다 피어까지 내뱉어 주면 금상첨화겠지.

물론, 아르카나인들도 놀라기는 하겠다만.

오히려 반가워할 거다.

전설 속 드래곤이 두려운 존재라고 하더라도.

악마만큼은 아니니까.

‘나도 덕분에 일거리를 덜 수 있을 테고.’

그런 속물적인 뜻에서 한 말이었건만.

‘잠깐만…….’

……너희들, 반응이 왜 그러냐?

유낙서스를 포함해서.

하나같이 눈가가 촉촉한 게…….

설마,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건가?

애써 삼켰던 선악과가 가짜라서 그런 거야?

내가 속으로 흠칫하던 찰나였다.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깨달았는가.”

저 걸걸한 목소리를 불길하다고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니까.

내게 흑암룡이라는 이명을 붙였던 쿠드하낙스인가.

뭔가 하는 드래곤의 목소리가 확실하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걸까.

쿠드하낙스가 말을 잇는다.

“과거에도 지금도 우리를 헤아려 주는 것은 클라우디밖에 없지 않은가! 보아라. 오직 흑암룡만이 우리의 심정을 지켜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줬단 말이다!”

써먹기 위해서.

인정하고, 감내하기로 한 마당에.

클라우디의 지나칠 정도로 눈부신 후광?

……과분할 정도로 은혜롭다고 하자, 그래.

그런데.

그 흑암룡이라는 이명은 좀 어떻게 안 될까……?

물론, 그런 나의 속앓이가 전해질 리 없었으니.

그에 질세라 유낙서스가 입을 열고야 말았다.

“전룡이여. 우리는 이호열 클라우디, 클라우디께 또 한 번 은혜를 입고야 말았다. 이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어찌 갚아야 하겠는가, 동족들이여!”

흑암룡에 이호열 클라우디에!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구나…….’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이 깎여나가는 것 같군.

저 목청은 또 얼마나 커다란지.

혹시라도 누가 엿들을까, 두렵다 진짜.

하지만 용들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누구도 우리에게 그리 말해주지 않았다.”

“죽지 않아도 된다고.”

“뜻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드래곤들은 더 이상 맹약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뜻대로.

의지에 따라서 진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전룡이 클라우디를 따르겠나이다.”

유낙서스의 선언과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만물의 왕, 드래곤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외 스물하나의 드래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세력.

드래곤을 아군으로 포섭했거늘.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구나.

‘다시 제로 산맥으로, 지구로 돌아간다고 치자.’

거기서 이호열 클라우디라는.

해괴한 이름을 울부짖기라도 하면?

흑암룡이라는 이명을 거론하기라도 하면……?

‘낯을 들고 돌아다닐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의 이런 고뇌를.

드래곤들이 헤아려 줄 리가 없었으니.

이럴 땐 충성심 가득한 눈빛이 부담되기 그지없구나…….

나는 시선을 옮겨 메시지를 바라봤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정말 뭐든 명령을 내려달라는 눈빛들이군.

‘근데, 슬슬 이쪽이 한계다.’

차오르는 수치심 때문이 아니다.

죽음을 각오한 [『절대영도』]의 발현 때문이었다.

영약으로 끌어올린 냉기 속성 친화력. 그것도 모자라서 [첫 세계수의 축복]으로 인간을 초월한 생명력 재생 속도를 가진 나였거늘.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

역시, 뒤가 없구나.

세니오스 원로의 마법은……!

대체 이런 고통을 어떻게 참은 거야?

젠장, 눈을 감으실 때.

조금이라도 아픈 티를 내셨더라면.

내가 조금 더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텐데.

‘여러 의미로 존경스럽습니다. 진짜.’

그리고 그에 질세라.

끝까지 내색하지 않는 그랑펠.

너도 참 대단하다.

나는 유낙서스에게 말했다.

“명을 내리기 이전에 그대에게 묻겠다, 유낙서스.”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대는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

내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바체로 뛰고 있던 유낙서스의 드래곤 하트도 점차 멎어가고 있었다. 쇠약한 노룡의 회복력으로도, 나의 기이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으니까.

그치만 말이야.

수십의 드래곤이 힘을 한데 모은다면 어떨까?

나는 유낙서스 뒤편의 드래곤들을 바라봤다.

고오오오─

용들의 육체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렁거린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다.

인간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기운.

유낙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하여 내게 영생의 기운을?”

어째서겠어.

다들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

반성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영생의 축복을 유낙서스에게 나눠주고 있는 거겠지. 거기엔 뒤늦게 용의 신전에 기어들어 왔던 프로즈낙스도 포함이었다.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말아주라.’

아무리 지휘권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 수십의 드래곤을 이끌 수 있겠냐……!

지금이야 그랑펠식 화법에 감동을 하여 잠잠해졌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거든.

나는 유낙서스에게 덧붙였다.

“살아라, 유낙서스.”

“……!”

“살아있는 전설 또한 나쁘지 않지 않은가.”

바닥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이 순간.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차라리 죽고 싶다……!

축복 덕분에 질겨진 생명력.

죽는 게 나을 것 같을 정도의 격통이 느껴진다.

‘……서클을 개방할 때보다 고통스럽다니.’

영약을 동시에 집어삼키고 혼절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줄이야. 이젠 꼿꼿하게 서 있기도 벅차다. 어디 보자, 슬슬 묫자리를 찾아보자.

그나저나 죽는 순간까지 이놈의 폼생폼사.

“풍경이 나쁘지 않군.”

그렇게 읊조리고는 신전의 기둥에 기대어 앉는다.

심장부터 천천히 얼어가는 육체 탓.

입가에선 하얀 입김에 뿜어져 나오는데.

태연하게도 지껄인다.

“차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꺼내 든 것은 녹차 티백.

그러나 찬물용이 아니다.

갈 때 가더라도 따뜻한 녹차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보다.

너무 추워서 그런가.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다.

“유낙서스, 찻물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덕분에 내뱉고 나서야 자각했다.

세상에……!

드래곤한테 찻물을 데우라고 하는 건.

아르카나 역사를 통 틀어봐도 나밖에 없을 거다, 진짜.

“명에 따르겠습니다.”

역시나 세상에.

브레스로 데운 찻물에 기껏 녹차 티백을 우려내다니.

역사는 물론, 미래에도 이런 만행을 저지른 건 나밖에 없겠지.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았지?’

간만에 진입한 아르카나 대륙이었다.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존재하는 이상.

죽어도 잘 죽어야 한다고, 다짐했거늘.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목숨 아니었나.’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에서.

이번 진입에서의 성과를 되돌아본다.

일단, 유낙서스와 조우하기 전까지.

악마를 사냥한 덕분에 1레벨이 상승했다.

소소한 게 사실 기대한 것보다는 적은 수치이긴 했다.

‘떼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망 페널티를 고려하면 아쉬운 수치긴 하다만.

중요한 건 레벨 같은 게 아니겠지.

무엇보다 세계수와 드래곤 사이에 얽힌 오해를 풀어냈으니까.

‘콩가루 집안을 일으켜 세운 뿌듯함이랄까?’

유낙서스가 육체도.

엘더 드래곤의 명예를 회복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기에다가.

‘……모른 체할 수 없지.’

클라우디가 아르카나 대륙에 실현되었다는 것도.

그런 클라우디에 관한 설정도 깨닫고야 말았다.

한마디로 올 것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진입에서는 그저 감사하자.

‘다음엔 또 어떤 후광에 기겁하게 될지 모르니까.’

달칵─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찻잔에서 온기가 전해졌건만.

빌어먹을, 찻잔을 기울일 기운조차 없다.

결국 나는 커져가는 격통 속에서.

또 한 번.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귓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드래곤들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글쎄…….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획득한 경험치가 하락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발동됩니다.]

[즉시 현실로 귀환합니다.]

다들 놀랄 거 없다니까, 그러네.

.

.

.

스윽─

서서히 눈을 뜨자 마탑의 최상층이었다.

결국, 녹차 한잔 마시지 못하고 돌아왔구만.

현실로.

툭툭─

서리가 맺힌 재킷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냈다.

일단, 피를 뒤집어쓴 그때보다 형편은 나아 보이는군.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시치미를 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째서 시치미를 뗄 생각부터 하냐고?

당연한 거 아냐?

‘두렵다.’

아니, 부끄럽다.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나의 행적이……!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은 곧 물거품이 되었으니.

나는 낌새를 느꼈다.

……어째 조용하다.

조용해도 너무나도 조용하다.

마탑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일과가 끝난 야밤인가 싶어서.

시간을 확인하는데…….

뭐냐, 이거?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날짜가 왜 이래?!

‘달이 바뀌었어……?’

진입한 지 보름이나 지났다고?!

보름?

그래 뭐, 지날 수도 있지.

용의 신전도 그렇고 절대영도도 그렇고, 시간 감각이 온전치 않은 곳에서 난리를 치다가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 도착한 재난 알림 메시지.

-지구 전역에 드래곤 출현

그와 동시에.

마탑의 방벽을 뚫고.

우레와도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마치 슬픔을 집어삼킨 듯한 구슬픈 드래곤 피어.

나는 자각하고 말았다.

……설마, 내가 죽은 줄 알고 저러는 건가?

그 찰나에 차원을 찢고 날아온 거야?

마탑은 저런 드래곤을 막기 위해서 움직인 거고?

내가 진짜 미치겠다.

이놈의 팔자는.

어째 숨돌릴 틈이 없냐!

.

.

.

세상은 두려움에 떨었다.

십여 마리의 드래곤이 창공을 활보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저들은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 그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용이길래.”

“저렇게 목을 놓아서 울부짖고 있는 거야……?”

그랬다.

용의 신전에서 눈을 감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흑암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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