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47화 (247/489)

◈ 247화. 眞전룡소집

흑암룡.

그거 아무래도 나한테 한 말이 맞는 모양이다.

유낙서스의 입가에서 흡족한 음성이 흘러나왔거든.

“쿠드하낙스의 피어로군요.”

쿠드하낙스?

걘 또 누군데.

초면인 나를, 흑암룡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 멱살을 잡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히든피스 : 용의 신전]

차원의 틈 너머로 신전의 풍경이 보였으니까.

드래곤들의 신전이니만큼 그 덩치에 맞는 스케일이다. 높게 치솟은 기둥은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하지만 [히든피스]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누구나 진입할 순 없었다.

[적정 레벨 : 오직 드래곤만이 진입 가능]

레벨 대신 명시된 조건.

오직 드래곤들을 위한 장소.

드래곤이 아니면 진입조차 불가능하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흑암룡이라는 끔찍한 이명(異名)에도 반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유낙서스가 말을 이었다.

“흑암룡. 그보다 클라우디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이명도 없겠군요.”

그렇다.

나는 그 흑암룡이라는 빌어먹을 이명 덕분에.

[히든피스 : 용의 신전]에 접근할 자격을 갖추게 됐으니까.

단순하게 말뿐이 아니라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흑암룡(黑暗龍) : 드러나지 않은 그대의 명성은 어둠 속에서 유영하는 흑암룡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용의 이름을 거머쥐기에 마땅하다. - ‘히든피스, 용의 신전’에 출입 가능]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중요하지.

‘그래, 덕분에 진입할 수 있게 됐으니까.’

빙룡의 설산을 돌파하고, 목적지 코앞까지 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진입할 수 없었다면, 수치사가 아니라 그대로 맥이 빠져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디엔드를 소환 해제한 것도 잘했다, 호열아.’

만약, 디엔드가 이 상황을 목격했다면 그 성격에 가만히 있었겠어?

사방팔방에다가 떠벌리고 다니겠지.

내가 드래곤들 사이에서 흑암룡으로 통하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그 세상 사람 중에는 나의 웬수들도 포함이다.

지금도 3호, 이예림의 연락처엔 내가 ‘한없이 깊은 어둠’으로 저장되어 있었거늘……. 그것도 모자라서 흑암룡?! 사나이, 이호열도 그런 수치를 버틸 자신이 없다.

마지막으로.

‘……그래도 흑염룡이 아닌 게 어디냐?’

그런 칭호였다면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겠지.

좋아, 긍정적인 사고방식.

덕분에 마음을 추스른 나는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에 걸맞은 이명이라.”

그냥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유낙서스는 나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으니.

굳이 또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계신다.

“이 노룡과 동시대를 살아온 쿠드하낙스라면 짐작하고 있었겠지요. 클라우디의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진실을……. 그러니 제 말을 쉽게 신뢰할 수 없던 것입니다. 허나, 이제라도 깨닫게 되었으니, 이 노룡은 미련 하나를 덜었습니다.”

제발, 클라우디 가문을 향한 금칠은 거기서 멈춰주면 안 될까?

여러 의미로 고통스럽다, 진짜…….

하지만 써먹고자 다짐했기에.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동요할 때가 아니니까.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중 대다수의 드래곤이 나를 명백히 적대하는 상황.

맹약을 기억해 내지 못했으면 진입하는 순간.

쏟아지는 브레스에 산화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구체적인 사연이 어찌 됐든.

결국.

맹약을 끄집어낸 나였다.

[히든피스, 용의 신전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런 나의 시야에 들어온 건.

나와 유낙서스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린 전룡(全龍).

말했다시피 대다수의 드래곤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맹약 때문에 억지로 고개를 조아렸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빠득─!

오죽했으면 이빨을 가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려올까.

거대한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방대한 마력까지.

이거, 머리만 숙이고 있지.

‘명백하게 협박하고 있구만.’

그러나 아무리 겁을 준다고 한들.

꺾일 그랑펠의 긍지가 아니시다.

나는 유낙서스의 등에서 내려와 발을 내디뎠다.

태연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물론, 나 이호열도 쫄지 않았다고.

‘맹약이 존재하는 이상.’

드래곤들은 내게 적개심을 드러낼 수 없을 테니까.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손해 볼 건 없었다.

그야 어차피 내놓았던 목숨이거든.

아르카나 대륙에선 죽어도 죽지 않는.

‘이래 봬도 [최후의 모험가]니까, 나는.’

그러니까.

어디, 슬슬 자초지종을 들어볼까?

대체 전룡소집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길래.

세계수의 뜻을 따르려던 유낙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심지어는 클라우디의 맹약까지 무시하려고 했는지. 어디 변명을 토해내 보라는 말이다.

또각─

나는 용의 신전, 정중앙에 멈춰 섰다.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이 또한 익숙하다.

낙하산으로 마탑, 크리스탈 홀 강단에 처음 섰을 때.

그때 쏟아졌던 눈빛이 딱 이랬거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유낙서스.”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전룡이 모인 지금.”

흑암룡이라는 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전룡회의를.”

.

.

.

용의 신전.

오직 드래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그 장소에 인간이 발을 들였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쿠드하낙스의 말대로.

저 사내는 ‘용’이라 불려도 무방한 존재라는 것.

인간 주제에 그런 자격을 갖춘 이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클라우디.

정말로 클라우디가 돌아온 것이었다.

프로즈낙스와 비슷한 시대의 젊은 드래곤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육신은 지나간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망각하게 하니까.

그러나 해츨링 시기를 넘긴.

성체라고 봐도 무방한 드래곤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클라우디.

그가 자신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를.

유낙서스가 입을 연다.

“노룡의 죽음으로써 실현되는 어머니의 뜻. 그것은 제 몸속에 존재하는 어머니,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는 것입니다. 그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서는 노룡의 미천한 육신이 양분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다.

맹약을 앞세우며.

어머니, 세계수의 뜻을 이행하라 명령하겠지.

빠드득!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거스를 수 없는 어머니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낙서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 또한 세계수의 씨앗을 몸에 품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인가!”

만물의 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그랬는가?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유낙서스.

“무엇이 왕이란 말인가?”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영겁의 세월.

대부분을 무료한 잠으로 보내온 자신들이었다.

너무나도 강대한 힘을 가졌기에.

날개를 가졌음에도 뜻대로 아르카나 대륙 위를 날지도 못했으며, 대륙을 불안에 떨게 하지 않게 하려고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허울뿐인 만물의 왕 자리를 물려주고서는. 이제 와서 그에 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가? 목숨을 바치라는 것인가?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이 설령 어머니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유낙서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옳다.’

엘더 드래곤.

동족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겪어왔기에 저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저항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자신 또한 어머니의 뜻에는 모순이 가득하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머니와 동족. 모두에게 크나큰 죄를 지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유낙서스는 호열을 바라보았다.

‘클라우디께서 나서신 이상.’

그가 맹약을 거론한 이상.

자신과 동족들에게 거부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호열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군.”

역시나, 모든 것을 관조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따위 뜻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옳다.”

그렇습니다.

그따위 뜻은 따르지 않는 것이 옳……?!

유낙서스는 흠칫했다.

호열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으니까.

“……?”

정말로 눈을 감을 때가 되었나 싶어서.

가는 귀가 먹어버린 것인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쿠드하낙스를 비롯한 동족들의 표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일동 경악.

적대적인 기색조차.

순간 옅어질 정도로.

의문이 가득한 얼굴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열이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는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

.

.

.

마탑의 원탁회의부터.

유스라 왕국의 황실 회의.

AAU의 지부장 회의까지.

회의라면 또 이골이 난 내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나는 전룡회의의 안건을 경청했다.

그러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천만다행이다, 싶다.’

일단, 갱생의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엘프와는 다르군.

무엇보다 드래곤들에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만물의 왕으로 태어난 드래곤들이 어째서 자유롭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시스템 때문이다.’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밸런스는 더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예를 들어서.’

플레이어들이 고작 100~200레벨에 불과한 시절.

대륙에 수천 레벨짜리 드래곤들이 날아다닌다고 가정해 보자.

당연히 아르카나 대륙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거다. 드래곤 피어 한 방이면, 대륙 모든 생물체가 기절해 제대로 된 활동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엘프와 다르게 이유가 있는 반항이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고.

나라도 억울했을 것 같은데?

만물의 왕으로 태어나면 뭐 하냐고.

정작, 그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들에게 용마대전은 정말로 순수하게 즐거운 유희였는지도 모른다.

왜, 평생 자신들과 놀아줄 이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마법사들이 찾아와서는 신기한 마법을 뿅뿅 쏴댔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재밌었겠냐고.’

물론,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따위.

누구보다 혐오하는 게 그랑펠이었으니까.

설령 그게 세계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따를 리가 있겠냐?

게다가.

“세계수는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내뱉은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엔 첫 세계수의 뒤를 잇는.

새로운 세계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인데.

왜, 그 지명까지 정확하게 말해줄까?

구 [포식자의 늪지대].

현 [세계수의 비밀정원]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퀘스트창을 보여주마.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도래한 아르카나 대륙 절멸의 위기.

거대한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워라.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라. (진행 중)

●현재 발견한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아르카나 대륙에 흩어진 세계수를 싹 틔워라.

그게 내가 수행 중인 월드 퀘스트의 목표였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니란 거지.

“말하지 않았나, 유낙서스.”

“……무엇을?”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어미는 없다고.”

“!”

그렇다.

세계수가 정말로 죽은 드래곤의 사체를 양분으로 삼아서 자신의 씨앗을 싹 틔우기 위했던 것이라면.

하이엘의 축복을 통해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운 나는 계획의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불청객인 내게 세계수가 축복을 내려줄 이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유낙서스를 비롯한 전룡에게 물었다.

“전룡이여, 그대들은 진정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삼켰는가?”

“……?”

“그대들이 목격한 세계수가 진정한 세계수냐고 묻는 것이다.”

“……!!!”

그쯤에서 감이 왔다.

세계수와 드래곤 사이에서.

같잖은 계략을 펼칠 정도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족속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 악마다.

악마 사냥꾼의 직감이 곤두선 순간.

눈앞이 점멸했다.

이거, 간만의 본업이로군.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