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오만한 게 아니다 겸손한 것이다
잊지 않는다, 주제 파악.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고자 했던 나였다.
비약초 도핑부터 마도구 대여.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과 조우하게 될 가능성 또한 염두.
지피지기면 그래도 비명횡사는 면하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며.
마탑에 남겨진 용마대전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정보 수집까지.
‘상대가 악마였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거야.’
거악이든, 상위 마왕이든, 상관없다.
악마 앞에서 꺾이기는커녕 더더욱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였다.
게다가 악마 사냥꾼의 유일한 강점.
고유 스킬, [천적관계]까지 우려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뭐, 그래도 여의치 않았다면.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 있다.’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에게 빌렸던 [지옥의 횃불]도 아직 내 인벤토리 안에 고이 보관 중이니까. 상대가 악마였다면 만반의 준비라 자신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지.’
왜, 흐름을 생각해 봤을 때.
유낙서스에게 죽음이 드리운 건 ‘전룡소집’이 끝난 직후였다.
가장 확률이 높은 가능성은…….
전룡소집이 끝난 뒤 동족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 남은 수단에 손을 뻗고야 말았다.
……진심으로 외면하고 싶었던 그 가능성에!
그렇다.
클라우디였다.
클라우디 가문이었다.
‘실존한다면 언제까지 외면할 수 없다.’
레이먼 션과 접촉하면서 깨닫게 됐다.
나는 아직 아르카나에 관해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고.
의문투성이인 레이먼 션을 떼어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상위 마왕과 거악을 비롯한 악마들은 물론.
우르스나 빗자루를 탄 여인처럼.
각자 모종의 뜻을 품고 있을 초월자들.
그리고 드래곤이나 엘프처럼.
아르카나 대륙을 뒤흔들 힘을 가진 세력들까지.
주제 파악이 특기인 덕분에 결심했다는 것이다.
‘……마주하고 써먹어야 한다.’
실현된 그랑펠의 설정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나였다.
그렇기에 정말로 클라우디 가문 또한 실현되었다면.
그 설정마저도 활용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객사나 수치사나…….’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결심하고선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뒤 하이엘과 디엔드에게 각각 임무를 줬다. 알다시피 하이엘에게는 유낙서스의 기척을 쫓으라는 임무를.
디엔드에게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찾거라.”
그랑펠식 화법으로 명했지.
-“그곳이 클라우디일 테니.”
그리고 지금이었다.
쩌저저저적─
뇌리 속으로 파고드는 디엔드의 음성.
나는 [『절대영도』]의 발현을 해제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왜곡된 시간의 흐름이 되돌아옵니다.]
시간의 흐름조차 얼어붙게 하는 한기 속에서.
정확히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렇게 호들갑을 떨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거다.
그건 나와 프로즈낙스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찰랑찰랑─
나는 아직 녹차 한 잔을 채 비우지 못한 상태였거든.
냉녹차가 취향이 아니라서.
더디게 찻잔을 기울인 그랑펠의 까다로운 입맛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반발심이 가득한 프로즈낙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이리될 것을. 헛된 수고를 했구나, 미물.”
저저, 곧장 반격하려는 꼴 좀 봐라.
그렇다면 누군가는 묻겠지.
어째서 다짜고짜 절대영도를 해제한 거냐고.
내가 해줄 말은 간단하다.
디엔드의 한마디.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을 찾았다는 그 한마디가.
나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으니까.
십수 년의 세월 탓에 잊고 있던 방대한 흑역사를……!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은 눈부신 빛을 내뿜는 은빛 머리칼이다. 그 은빛은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귀하디귀한 마력의 백금보다도 찬란하였으니. 누군가는 말했다. 클라우디의 위대한 능력은 은빛 머리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느냐고…….』
……이제야 알겠다.
유낙서스가 어째서.
나를 보고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랐는지를.
‘내 상태창을 꿰뚫어 본 게 아니었어.’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 은발.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은빛 머리칼을 보고 알아차린 거겠지.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다, 과거의 나야.
‘뭔, 은발 하나에다가 이런 설정을 덕지덕지……!’
그러나 머리칼은 시작에 불과했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클라우디 가문의 설정.
그건 정말로.
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처럼.
방대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이러니까 중학교 때 성적이 그 모양이었지, 호열아.’
이쯤 되면 내, 스스로 놀랍다.
정말 질리지도 않고.
수치스러워하지도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정을 휘갈겨 댔구나.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 진짜.’
그러나 방금도 말했다시피.
주제 파악을 마치고.
결심한 나였다.
‘……그래, 얼어 죽든 수치사로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
그리고 정말로 수치사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조우하게 될 이들 앞에서 나는.
클라우디 가문의 후계자라는.
끔찍한 배경마저도 써먹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인정하겠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드래곤. 아르카나 대륙에서 그들의 존재는 전설처럼 여겨졌다. 그들이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울부짖으며 존재감을 스스로 알리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 사건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가져다가 붙인 설정일까.
그보다…….
과거의 나란 자식.
취향 한번 한결같구나.
황제조차 조아리게 하는 위대한 가문으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실세.
베일에 가려진 진정한 대륙의 주인까지…….
진짜 중증이었구나, 호열아.
자각하는 순간.
수치심이 솟구쳤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클라우디의 후계자가 돌아왔음을.”
클라우디의 후계자가 돌아왔다고 선포했다.
듣고 있던 누군가는 또 묻겠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아니, 애초에 드래곤들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왜, 유낙서스에게도 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클라우디 가문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 시절의 내가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였단 말이다……!
『……드래곤은 클라우디에게 구원받았다. 전설이 돌아온 그날, 대륙에 울려 퍼졌던 울음소리는 클라우디를 향한 경외의 행동. 그날의 진실은 오직 클라우디와 드래곤 사이에서만 전해지고 있었다. 설령 영겁의 세월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유효한 맹약으로써.』
그렇다.
저게 바로 내가 절대영도를 해제한 이유였다.
그 뭐냐…….
꽤 오랜 세월이 흘러서 너희도.
나도 기억을 하지 못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맹약’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거든.
“……!”
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프로즈낙스의 머리가 꺾이기 시작한다.
마치 내게 고개를 조아리려는 것처럼 말이야.
영문을 모르는 눈치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려고 하는 모습이다.
콰득─
빙룡, 프로즈낙스.
아직 해츨링이라서 상황이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그렇게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맹약은 흔한 약속이 아니다.
설령 목숨을 내놓는 한이 생기더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게 맹약이란 말이다.
그리고 유낙서스를 제외한 너희는 맹약을 어겼지.
그런 의미에서.
내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냉랭하게 말했다.
“어린 날의 치기를 이해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해츨링.”
“……?”
“나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거라.”
“……!!”
꿈틀!
프로즈낙스가 거대한 육체를 움찔거린다.
나는 그런 프로즈낙스를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일은 없다.
‘뭐야, 쟤.’
프로즈낙스가 내 시선을 피했으니까.
그 반응은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내 앞에서 공포에 질린 악마와 똑같았거든.
그런 내 생각에 화답하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빙룡, 프로즈낙스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결국, 프로즈낙스가 완전히 머리를 조아린다.
그와 동시에.
설산의 풍경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진입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클리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거나, 이 또한 흑역사…….
아니, 만반의 준비 덕분이었다.
나는 디엔드에게 말했다.
“디엔드.”
“말씀하십시오, 나의 주군이시여.”
“임무에 관한 이야기는 후에 나누도록 하지. 절차에 따라 내게는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
“디엔드가 주군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걸로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다음 목표가 정해졌군.
써먹겠다고 다짐한 지금.
더욱더 잘 써먹기 위해선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가봐야지. 클라우디 가문의 영지.’
몰락했다고 하더라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설정에서 써먹을 요소들이 좀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디엔드에게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
나는 유낙서스를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아니, 왜 또 머리를 숙이고 있어?’
새삼 부담스럽다, 진짜.
얼른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유낙서스.”
“명에 따르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그대에게 용의 신전까지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더없이 큰 영광이옵니다.”
파앗─!
유낙서스가 백색의 겉날개를 펼치고는 내게 날아온다.
이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타는 것도 그림이 좀 그렇긴 하다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유낙서스의 등에 다시금 꼿꼿하게 올라섰다.
‘빌어먹을 체급 차.’
프로즈낙스를 절대영도로 붙잡아 두고 있는 데에.
소모된 마력이 워낙 극심했어야 말이지.
용의 신전을 앞에 둔 지금.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마력을 회복해 둬야 했다.
공중부양으로 소비되는 마력조차 아껴야 한다는 의미다.
‘그나저나…….’
나는 뒤편에 프로즈낙스를 바라봤다.
지금이야 클라우디라는 공포에 질려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나중에 또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각인시켜둬야 한다.
‘더욱더 뻔뻔하게 말이야.’
나는 최대한 위엄있게 지껄였다.
“그대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해츨링.”
“……?”
“허나 명심하거라.”
그리고 언제나 기대 이상.
상상을 초월하는 그랑펠식 화법이 아니던가.
덕분에 나는 더없이 오만하게 선언하고 말았다.
“더없이 사나운 사냥개조차 주인을 물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을.”
“……!”
……꼭 입으로 매를 벌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그랑펠?
드래곤을 사냥개로 비유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거늘.
이건 뭐,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이거,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두 눈으로 목격하지 못한 지금도 이런데.’
디엔드가 발견했다는 클라우디의 저택이라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면.
그랑펠의 이 오만함은 대체 어디까지 치솟게 된다는 말인가……!
그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낙서스가 말했다.
“당신께서는 한없이 겸손하시군요.”
겸손하다고?
내가?
그거 반어법이지?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 위치가 아니시면서도 말입니다…….”
이런 오만조차 겸손으로 보이게 할 정도의 후광이라니.
앞으로 그런 클라우디 가문의 후광에 시달리게 될 소시민.
가엾은 나, 이호열을 떠올리니까.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
.
.
용의 신전.
전룡(全龍)은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빙룡, 프로즈낙스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어린 드래곤들은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다.
움찔!
바닥에 달라붙은 듯 고정된 머리를 제외한 육체를 이리저리 꿈틀거린다. 만물의 왕으로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무력함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와.
그에 얽힌 ‘맹약’에 관해 알고 있는 드래곤들은 아니었다.
점차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맹약이라는 것은 거스른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맹약을.
어긴 대가를 치를 시간이 왔다는 것을.
“후후…….”
대지룡(大地龍), 쿠드하낙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더없이 심각한 상황.
난데없는 웃음은 드래곤들을 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쿠드하낙스에게 날이 선 말이 쏟아졌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노룡이여.”
쿠드하낙스.
그는 유낙서스와 동시대를 살아온 노룡이었다.
그렇기에 단지 침묵을 지켰다.
유낙서스의 말에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섣불리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말은 그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허나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파악하지 못했나, 드래곤들이여.”
빙룡.
뇌룡.
풍룡.
염룡.
그리고 자신마저도.
오만하게도 잊은 모양이었다.
“누가 그들 앞에서 만물의 왕을 자처한단 말인가?”
감히 자신들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클라우디,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을.
그림자에서.
배후에서 관조하고 조율해 오던.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위대한 흑암룡(黑暗龍)과도 같았으니.
쿠드하낙스가 웅장한 피어를 내뱉었다.
“전룡(全龍)은 흑암룡의 입성에 경의를 표하라!”
.
.
.
……바, 방금 뭐라고 그랬어?!
흐, 흑암룡의 입성……?!
그 흑암룡이라는 거 설마 나 말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