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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43화 (243/489)

◈ 243화. 용과 같이 (5)

콧잔등에 걸쳐진 고풍스러운 안경.

경건하게 곧추세운 허리.

손에 쥔 것은 화려한 만년필이다.

스슥─

무언가를 한참 동안 써내려 가던 스칼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이내, 로스차일드가(家) 저택을 가득 채울 정도의 절규가 이어졌다.

“이게 아니야!!”

무엇을 써내려 가던 것인가?

보고도 묻는 이는 없으리라.

이 순간, 플레이어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글줄을 써내려 가고 있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 호열에게 접속기의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서.

그 선언은 마탑의 원탁회의에서 발표되었으나, 그 대상은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합당한 목적이지, 소속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플레이어는 물론이요.

아르카니인들까지.

모두가 때아닌 창작의 고초를 겪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기도 잠깐.

스칼은 다시 만년필을 바로 쥐었다.

이 순간에도.

“……참자, 스카라.”

경쟁자들은 손을 멈추지 않고 있을 터.

하지만 스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간절한 목적을 가진 사람은 없을 거라고.

──────

존경하며 친애하며 숭배받아야 마땅한 호열 경에게.

──────

당사자가 읽는다면 기절할 인사말이었거늘.

스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고는 퀘스트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실패)

─죽어가는 노룡과 조우하라. (진행 중)

다른 이도 아니고 드래곤이 죽어가고 있단다……!

아르카나에 어디 드래곤이 노룡 한 마리뿐이겠느냐마는.

스칼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머릿속에 클래스 퀘스트의 스토리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내가 위험에 처한 노룡을 구해내고, 덕분에 친밀도가 상승해서, 처음으로 드래곤을 타게 되는……. 딱 봐도 그런 퀘스트 전개잖아, 이건……!’

물론, 죽어가는 드래곤을 되살릴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허나, 당장 목표는 노룡과 그저 조우하는 것.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만 있다면.

클래스 퀘스트에도 크나큰 진척이.

용기사에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진짜 저보다 간절한 플레이어는 없을 겁니다, 호열 경……!”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같은 시각, 스칼보다 광적인 기세로 접속기 사용 허가 신청서를 써내려 가는 사내가 한 명 있기는 했다만. 그는 마탑의 선임 마법사지,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니.

쉽게 끝나지 않는 고뇌.

이게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이것 역시……!

스칼은 양피지를 몇 장이나 더 찢어발기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한 목적 따위.”

어차피 호열 경이라면 전부 간파해 내시겠지.

차라리 목적을 훤히 드러내는 편이 낫겠구나, 싶었다.

왜, 호열 경께서도 노룡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계시지 않았던가?

‘유낙서스라는 이름까지 알고 계셨으니까.’

어쩌면 내가.

호열 경의 행보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칼은 부푼 기대감을 품고 신중하게 만년필을 끄적여 나갔다.

그때였다.

“……?”

눈앞이 점멸한 것은.

스칼은 흠칫했다.

그저 만년필을 끄적이던 중이었으니, 경험치나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은 아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올랐을 리도 없다. 반짝거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퀘스트밖에 없었으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서, 설마?!”

죽어가던 노룡이 사망한 것인가?

순식간에 스칼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

스칼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퀘스트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외마디 탄식을 뱉어냈다.

“……엥?”

─죽어가는 노룡과 조우하라. (실패)

일단 실패이기는 했다.

한데, 어째서 절규가 아닌 의문을 뱉어냈느냐고 묻는다면.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에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노룡이 죽어 실패한 게 아니라는 것을.

[월드 퀘스트 : 노룡의 마지막 비상]

죽어가는 노룡은 결단했다.

자신의 최후를 동족의 미래를 위해 불사르겠다고.

노룡의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하리라.

─노룡의 최후를 목격하라. (진행 중)

“뭐, 뭐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어가던 노룡이 아니었는가?

내가 만년필을 끄적거리고 있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족의 미래를 위해? 꾸짖음에 대륙이 전율……?”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는 말인가!

혹시라도 알고 있는 이가 있을까, 싶어서.

스칼은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없어.”

그런데 다를 게 없었다.

다들 접속기와 호열 경의 위대함에 대해 떡밥을 굴리고 있지.

노룡에 관한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내게만 떠오른 퀘스트다.’

용기사.

드래곤과 관련된 히든 클래스를 보유한 자신이기에.

영문을 모를지라도.

혹은 완전히 다른 세계인 현실에 있을지라도.

월드 퀘스트가 떠오른 게 확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칼은 더욱더 의욕에 불타올랐다.

“낙담할 때가 아니야.”

클래스 퀘스트에 실패했다면.

새로운 월드 퀘스트를 성공하면 되는 법.

스칼은 눈을 부릅뜨고 접속기 사용 허가 신청서를 적어나갔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었다…….

*

유감이다, 스칼.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업적 : 만물의 왕, 드래곤에 올라타다.]

탈것.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플레이어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아르카나 대륙은 광활했다.

상시로 포탈이 발현 중인 도시에서야 탈것이 불필요했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마차나 말과 같은 탈것이 필수였다.

뛰어서 먼 거리를 이동하기에는 시간도, 스테미너도 남아나지 않았거든.

‘나 때는 마차 값도 장난 아니었는데.’

기사 클래스가 무자본 플레이어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사로 전직하고, 어떤 기사단이 됐든 입단하기만 한다면 값비싼 말을 공짜로 습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하나 마나 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악마 사냥꾼과 탈것은 쥐뿔도 관련이 없었으니.

악크샨의 일과만 봐도 짐작할 수 있잖아?

허구한 날 체력 단련만 하는 악마 사냥꾼이다.

튼튼해진 두 다리를 두고 탈것이 웬 말이겠냐고.

아니,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스킬창만 봐도 알 수 있다.

달랑, [천적관계], [구마의식], [은 마스터리].

‘승마 관련 스킬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냐.’

그래서 유낙서스가 제안했을 땐 약간 걱정했다.

괜히 올라탔다가 낙마…….

아니, 낙룡(落龍)해서 소중한 한목숨을 날리는 게 아닐까 하고는. 그런데 스칼이 괜히 드래곤 위에 올라타는 데에 집착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효과 : 모든 탈것에 관한 숙련도가 최대치로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이게 단순한 업적 달성 효과가 맞아?!

아무리 최초라고 하더라도.

모든 탈것에 관한 숙련도가 최대치로, 그것도 영구적으로 상승하다니.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모자라서 튀어나올 정도의 효과였거늘.

역시나 내색은 없었으니.

“이런 시야도 나쁘지 않군.”

나는 언제나와 같았다.

업적의 효과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원래부터 탈것에 익숙했다는 것처럼.

유낙서스의 등판 위에 꼿꼿하게 서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날지 못하리라 여겼습니다.”

다시 활강하게 된 감회가 새로운 것인가.

유낙서스가 조금 벅찬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유낙서스.

‘나도 이럴 줄은 몰랐거든.’

스칼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에 탑승하는 건 히든 클래스, 용기사의 최종 목표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 마디로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를 끝까지 수행해야만 목격할 수 있는 경치가.

지금 내가 유낙서스의 등 위에서 목격하고 있는 경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대체 중간과정을 몇 개나 생략한 거지?

건너뛸 수 있었던 이유야 다른 게 아니었다.

‘……클라우디.’

유낙서스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천운이 따르던 ‘그날’만 봐도 알 수 있다.

막내, 하이엘이 만류를 했건만.

그저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서는.

진정으로 끝장을 보려고 했던 유낙서스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세계수의 족보보다 클라우디의 후광이 더 크다는 건가……?’

……진짜 두렵다, 클라우디 가문!

속으로 탄식하던 와중.

호랑이 아니, 용도 제 말을 하면 찾아온다는 것인가.

유낙서스가 내게 정중하게 물어왔다.

“미천한 노룡이 클라우디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의 이름을.

뭐, 이름을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이호열.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끔찍한 풀네임으로 답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라고.

그나저나…….

이제 와서 사람 잘못 봤다고 내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 어쨌든 둘 다 나니까.’

다행스럽게도.

기우에 불과했다.

유낙서스는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니까.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호열 클라우디시여.”

……잠깐만. 지금 뭐, 뭐라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만큼이나 해괴망측한 그 퓨전식 이름은 또 뭔데?! 클라우디 가문의 이호열이 아니라, 이 씨 가문의 호열이라는 뜻이란 말이다……!

저쪽 세계.

대한민국에서는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거든.

그러니까 제발 이호열 클라우디 같은.

끔찍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말아줄래?!

‘근데 이걸 또 언제 설명하고 있냐……?’

심정 같아서는 말이야. 콩가루 같은 세계수 족보가 아니라 진짜 족보가 무엇인지, 본관이 무엇인지, 돌림자가 무엇인지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건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별안간.

눈앞이 점멸했으니까.

그건 출현 메시지였다.

[빙룡(氷龍), 프로즈낙스가 출현합니다.]

찰나.

휘이이이잉─!

어둠 말고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원의 틈에 걷잡을 수 없는 한기(寒氣)가 휘몰아쳤다. 아니, 기운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눈앞에 서릿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니까.

[프로즈낙스의 냉기가 일대를 변화시킵니다.]

과연, 만물의 왕 드래곤이다.

차원의 틈조차 제집 안방처럼 바꾸다니.

걷혀가는 어둠 속에서 드러내는 얼음의 세계.

어느새 솟아난 드높은 빙산의 꼭대기에서.

얼음 조각상처럼 날개를 펼친 빙룡이 보였다.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에 진입하셨습니다.]

히든피스라니.

기뻐해야 했건만.

마찬가지로 기뻐할 새 또한 없다.

유낙서스가 곧바로 흉포하게 울부짖었으니까.

“프로즈낙스!!”

그래도 구면에 동족이니까.

나보다는 유낙서스가 먼저 진입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의 안일함을 전격 철회하겠다.

“위선자가 나의 이름을 꺼내지 마라, 유낙서스!!”

진짜 피도 눈물도 없구나, 너희들!

유낙서스의 등에 올라탄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져 가는 심장 박동.

두 드래곤은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라는 것을.

쌔애애액─!

불어오는 눈발이 차디차구나.

서클을 개방하기 위해 섭취했던 영약, 만년설꽃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한기에 진작 얼어붙었을 정도로 말이야.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는 하이엘에게 말했다.

“이곳부터는 물러가 있거라, 하이엘.”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합니다. 주군.”

“사과할 것 없다. 수고했다.”

고유 정령, 하이엘조차 견딜 수 없는 한기라니.

그런 무지막지한 장소를 스스로 투영해내다니.

과연, 빙룡이란 거창한 수식어가 붙을만하다.

그러나 차디찬 공기 덕분인가.

나는 차가워진 머리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일단, 차원의 틈에 악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탓에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태.

‘전력은 반의반 토막 났다고 봐야 해.’

그런 상태에서 노룡과 빙룡의 집안싸움에 제대로 끼여버린 형국이라. 누가 봐도 용 싸움에 이호열 등이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겠구나.

하지만.

“서늘하기보다는 시원하기 그지없군.”

나는 태연하게도 지껄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 덕분에?

물론, 긍지도 무시할 수 없겠지.

“환영인사는 이것으로 끝인가, 빙룡이여.”

그러나 얕보지 마라, 만물의 왕이여.

“그렇다면 이번엔 나의, 마탑의 순서다.”

성질머리라면.

둘째가기 서러워하는 마탑, 마법사들의 뒤끝을……!

드래곤이 패배와 굴욕에 익숙하지 않은 족속이라고?

그건 마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거든.

마탑이 용마대전의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서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아? 드래곤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언제까지고 벌벌 떨기만 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냐!

특히 내가 아는 ‘그’는 이런 면에서 굉장히 광적이었다.

그런 양반에게 있어서 빙룡?

어쩌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을지도 몰랐겠지.

그런 의미에서.

빙룡, 네 약점은 그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을 거다.

마탑 서고에 남겨진 한 권의 마법 서적.

──────

빙룡을 추락시키는 서른 가지 방법

──────

그 저자의 이름은 만년설의 세니오스.

나는 빙룡.

프로즈낙스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대들이 한낱 유희라 여긴 용마대전에서 마탑은 교훈을 얻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고뇌하고 발버둥 치며 바닥을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금 그대들 앞에 도달했다.”

이내, 빙룡을 추락시킬 첫 번째 방법을 꺼내들었다.

“?!”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빙룡, 프로즈낙스에게 ‘해빙’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우스운 유희로 느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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