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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40화 (240/489)

◈ 240화. 용과 같이 (2)

‘그것’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

언제나처럼 대륙을 유린하던 악마에게도.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던 악마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의 성에서 웅크리고 있던 악마에게까지도.

두근─

마치 벼락에 감전된 것처럼.

그것은 일대의 모든 악마를 얼어붙게 하였다.

모두라는 것은 이름 없는 악마들은 물론이요.

진명(眞名)의 악마.

더 나아가서 마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눈물의 마왕성.

서열 56위 마왕, 그레모리.

왕좌에 앉아 웅크린 사내를 발판으로 삼아서.

휴식을 취하던 그레모리는 알아차렸다.

아르카나 대륙,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

그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기척을!

오싹!

그 살기에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오죽했으면 발판조차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우려스러운 낯짝으로 말을 걸어왔을까?

“……왜 그러십니까, 여왕이시여.”

그러나 그레모리는 답할 수 없었다.

‘자칫했다가는 내 목소리가 전해질지도 몰라……!’

방금 말했듯.

기척은 아득히 먼 곳에서 느껴졌다.

숨소리는커녕 진짜 뇌우가 내리쳤다고 하더라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공포 앞에서 그레모리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었다.

후다닥!

마왕의 체면?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그레모리가 다급하게 왕좌 뒤에 몸을 숨겼다.

“여왕님?”

자신을 부르는 발판의 목소리.

그레모리가 사내를 흉신악살의 눈빛으로 노려봤다.

멍청한 발싸개라서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인가?

‘저 걷잡을 수 없는 살기를……!’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그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래, 마안(魔眼)이라면!

아르카나 대륙 곳곳을 비추는 마안이라면.

이 기척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이내, 그레모리의 눈이 하얗게 뒤덮였다.

마안의 시야를 공유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밤하늘에 뜬 무수한 마안이 일제히 사라졌을 리는 없을 터.

그레모리가 엉금엉금 기어서 창가 쪽으로 나아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아차렸다.

“!”

마안이 눈을 감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질려서는.

차마 눈을 뜰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후다닥!

그레모리는 다시금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는 몸에 느껴지는 감각을 애써 곱씹어 봤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분명 이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마계(魔界)에서.

정확하게는.

‘바알(Bael).’

상위 십좌(十座)의 마왕 중에서도 첫 번째.

바알의 소환 의식에서 말이다.

바알을 올려다봤던 자신은 지금과 비슷한 공포에 떨었었다.

‘……본좌는 두렵다.’

상위 마왕.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다고 한들.

그 힘까지 우둔한 것은 아니다.

그레모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알께서 어떤 업적을 이뤄내셨는지를.

전지전능을 그대로 뒤집어 놓았다고 무방할 정도로.

그는 한 세계를 완전한 파멸로 이끌었었다.

‘내가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단지……!’

바알.

첫 왕좌의 왕께서 아군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그것은 아군이 아니었다.

그레모리가 힐끗 발판 사내를 바라본다.

‘인간 녀석들은 떨지 않고 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순간, 그것이 내뿜는 살기는.

오롯이 자신과 같은 악마를 향한 것이라는 것.

‘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태어나 두 번째로 느껴보는 공포였다.

그레모리는 살굿빛 머리카락을 이불로 삼아 자신의 몸을 감쌌다.

두려움에 떨었다.

그저 그것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간절하게 빌며…….

*

끝없이 떠오르는 상태이상 공포 관련 메시지.

뭐가 이렇게 많아?

순간, 스팸 메시지인 줄 알았다.

딱히 뭔 짓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아직 마나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클리어된 균열을 붙들고 있는다거나 아르카나 대륙까지 통하는 포탈을 여는 기이는, 복잡한 과정만큼이나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었다.

‘세계수의 축복이 없으면 며칠은 앓아누웠겠지.’

물론.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지금이야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그나저나.’

수백만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너희들의 천적이자 공포다.

엄포를 놓았던 나였다.

‘……어째 잠잠하다?’

아르카나 대륙 땅을 밟는 순간.

악마들이 떼로 달려들지는 않을까.

악마떼의 포위진을 뚫고 유낙서스를 찾아내야 하는 건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나였다.

‘이러면 나야 고맙긴 한데.’

달랑 유낙서스를 만난다고 끝이 아니잖아?

재수가 없으면 유낙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과 충돌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으니. 악마들이 이렇게 협조적이면 나야 나쁠 게 없지. 전력을 아껴둘 수 있을 테니까.

“비로소 엎드린 모습이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나. 칭찬해 주마.”

……이게 칭찬이 맞나?

싶은 말을 내뱉기도 잠깐.

나는 하이엘과 디엔드를 불러냈다.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 주군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곳에서 만나 뵈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주군.”

그래, 극진한 인사말에는 나도 언제나 감회가 새롭구나…….

그러나 유난을 떨 시간은 없다.

유낙서스와 조우하기에 앞서서 사전작업이 필요했거든.

‘유낙서스는 그냥 드래곤이 아니야.’

엘더 드래곤이라 불리는 드래곤들의 지도자.

노룡과 조우하기 위한 준비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나는 하이엘과 디엔드에게 각각 명했다.

“저 하이엘, 주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이엘이 먼저 허공으로 사라지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어째, 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디엔드도 명령을 수행하러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분신 3호를 또 빼놓을 수 없겠지.

-다시 봐도 씁쓸한 풍경이군, 주인이여.

일루젼 브레이커에서 원상태로 돌아온 귀철.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코드 균열을 클리어한 순간.

더는 허상을 베어낼 필요가 없어졌으니.

과연,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답게.

일루젼 브레이커가 본래 귀철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일루젼 브레이커보다는 귀철 쪽이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낫지 싶다가도……. 이게 또 마냥 안도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베면 되는가, 주인이여.

귀철, 이거.

아주 그냥 새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거든!

이 순간 사방에서 느껴지는 공포에 질린 악마의 기척들.

곰곰이 머리를 굴려본다.

고작 프로토타입을 벨 때에도.

일루젼 브레이커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각성한 귀철이 아니던가.

‘만약, 악마를 베기 위해서 각성한다면…….’

……데몬 슬레이어.

아마도, 그런 느낌의 이름이 붙진 않을까.

그 이름을 내 입으로 읊는 상상을 하니까.

나의 수치심이 심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간절히 빌었다.

‘악마들아, 제발 그렇게 엎드려 있어주라.’

부디, 계속 납작 엎드려 있어서.

그랑펠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주라.

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둥이가 입방정을 떤다.

“귀철.”

왜, 분신은 진짜를 따라갈 수 없다고.

“베지 않을 것부터 헤아리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귀철보다 한술 더 떠서 말이지……!

‘이러다가 나중엔 귀철 이름만 몇십 개씩 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일루젼 브레이커에 버금가는 이름을.

수십 개씩 읊조린다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손발이 오그라들기 시작하는구나…….

*

심호흡을 할 때마다 의식이 흐려진다.

희미하게 뜬 눈에 보이는 건.

황폐한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

죽어가는 노룡(老龍), 유낙서스는 웃었다.

영생의 삶 따위는.

언제든지 내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 이 순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군.’

스스로가 얼마나 오만했던지를 깨달았다.

유낙서스의 미소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아우, 아젠트레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완벽한 너는 열등감이 무엇인지도 모를 테니.”

-“축복은 미완한 우리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설령 다른 이들이 너를 손가락질했을지라도.

나는, 네 심정을 헤아렸어야 했거늘.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네 심정을 헤아리게 됐구나.

유낙서스의 음성이 일대에 깔렸다.

“어머니여……. 제가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될 어머니의 계획.

그러나 이대로 눈을 감아도.

유낙서스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야 보다시피 자신은 설득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전룡소집(全龍召集).

유낙서스는 그날.

잠들어 있던 동족들에게 미뤄뒀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처참하게 찢겨나간 날개.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팬 전신의 상처들.

잦아드는 숨결.

그랬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엘더 드래곤에게 이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동족 드래곤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모든 건 자신의 부족함이 초래한 결과였다.

유낙서스가 다시금 쓰게 웃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동족을 과대평가한 결과겠지.

아우, 아젠트레스가 이 꼴을 보면 무어라 말할까?

‘인정하마. 나는 아우보다 못난 형이었구나.’

옳은 길이든, 옳지 않은 길이든.

동족을 하나로 이끄는 너라면…….

적어도 나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유낙서스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빛나는 안광.

그 눈빛이 바로 그 증거였다.

유낙서스의 음성에 물기가 깃들었다.

“클라우디여…….”

부디, 어리석은 나의 동족들을 굽어살펴 주소서.

용서를 바라지는 않겠다.

바라는 것은 단지 일말의 자비.

그러나 베풀지 않겠다 하더라도 이해하리라.

“……감히 당신의 뜻을 거스를 자격은 없으니.”

이걸로 정말 끝이구나.

세상의 만물보다 불변하다는 드래곤 하트가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영생을 살아온 육신에 비로소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낙서스는 마지막으로 대륙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대들은 이런 고통 속에서 신음했던 것이군.’

허나, 시야에 들어온 건 아르카나 대륙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네놈들은 이런 고통을 타인에게 선사한 것인가.’

아르카나 대륙을 이 꼴로 만든 악마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속닥거리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는 나의 것이다.”

“키킥! 가죽으로 장비를 만들어야지.”

“드래곤의 송곳니로 만든 무기라니……!!”

어머니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거슬리는 악마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싶었거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 동족들에게 부디 날개를.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남겨달라 부탁했거늘.

“나, 하나조차도 어머니의 뜻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인가.”

나, 유낙서스는.

이대로.

누구에게도 면목을 들 수 없이 눈을 감아야만 하는 것인가.

실로 원통하구나.

“크ㄹ…….”

혼신의 힘을 쥐어짜 내서.

최후로 내뱉은 드래곤 피어였거늘.

주변의 악마들조차 쫓아내지 못하는 꼴이라니.

‘……나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스르르─

결국, 천근처럼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한 채.

유낙서스가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어째서인가, 낯설지 않은 촉감이 와 닿았다.

사뿐─

다름 아닌.

콧잔등에서부터.

흐려져 가는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낙서스.”

유낙서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느껴지는 어머니의 기운.

여명의 정령이로구나.

그러나 미안하구나, 가냘픈 정령이여.

어머니의 뜻을 아는 형제로서.

어떤 식으로든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도.

몸 상태가 여의치 않구나.

한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우려할 것 없다니?

“나는 홀로 그대를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 말에 유낙서스는 온 힘을 기울여 눈을 떴다.

그러자 보였다.

무릎을 꿇고.

거품을 문 채.

절명한 악마들의 모습이.

그리고 들려왔다.

또각─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소리가 들려온 곳에선 빛이 일렁거렸다.

그 후광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올곧은 자태.

“!”

유낙서스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사내가 바로 여명.

어머니가 선택한 존재라는 것을.

그런데.

“……?”

유낙서스의 동공이 이례 없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어째서……!

‘그대의 머리칼이…….’

클라우디 가문의 상징.

시릴 정도로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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