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내겐 익숙한 일이다
크리스탈 홀.
호열은 접속기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충격의 잔향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먼저 속닥거린다.
“……엄청난 기회를 공유하시겠단 거잖아?”
“심지어 먼저 사용해 보지도 않으시고!”
“젠장, 나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호열의 긍지는 쫓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는 것을.
무거운 만큼 많은 뜻을 품고 있다는 것 또한.
몇몇 플레이어들은 주변을 돌아봤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어머니, 아버지…….”
“단지, 그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싶어.”
호열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그 목적의 무게를 평가할 순 없겠지.”
그렇다.
누가 감히 저 사연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마탑에 입성한 이상.
그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한들.
저들에게 아르카나 대륙은 고향이며, 고향에는 혈육들이 있었다.
치유학 선임, 벨리에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무엇 하나 간과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벨리에는 알고 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출탑 신청서 하나조차 훑어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려된 신청서엔 언제나 합당한 사유와 보완점이 덧붙여서 돌아왔으니까.
비단 출탑 신청서뿐만일까?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의 『비약초의 육성법』 연구를 비롯.
미숙한 숙련 마법사들의 연구조차도.
자신의 연구처럼 고민하는 호열이 아니던가.
‘한데, 그것보다도 막중한 짐을. 이번에도 혼자서 짊어지시겠다뇨.’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나눠 들고 싶었지만…….
벨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출탑이나 사전 검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따르는 책임이 막중했으니까.
‘경…….’
그건 마르셀로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그런 마르셀로에게 말을 건넸다.
“대단하지 않나요, 마르셀로 수석? 솔직히 말해 제가 이 수석이었다면, 저런 걸 손에 넣었다는 사실 같은 건 당분간 숨겼을 겁니다.”
“솔직하시군요, 유그위드 원로님.”
“후후. 그야 긁어 부스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호열은 어떠한가?
저 부스럼을 긁는 것도 모자라 마탑에.
아니, 세상에 훤히 드러내놓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저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릇의 크기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옹.”
“……?”
털이 바짝 선 고양이.
탑주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옹알거렸다.
탑주는 비로소 머릿속 저울질을 끝마친 상태였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그대가 탑주의 자리에 어울리겠지.’
당사자가 알게 된다면 기겁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마르셀로는 호열이 빠져나간 크리스탈 홀, 출구를 바라봤다.
‘분명 여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경께서 어딜 그리 급하게 향하신 것일까?
저 문으로 나가셨다는 것은 아직 마탑에 계시다는 뜻일 터.
마르셀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이에 관한 공동 연구를 추진하던 호열과 마르셀로였다.
그러나 호열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할 필요는 없게 된 셈이었다.
‘제게 알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마법사의 본성.
호열과 대화를 나눠야만 허탈한 심정이 진정될 것 같았다.
마르셀로를 필두로 웅성거리며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가는 마법사들.
그 사이에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두 사람이 있었다.
벤쉬와 뱅그릿이었다.
“역시, 이호열 수석님은 절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출탑이 하찮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과 출탑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값진 기회이지 않은가!
“그동안의 반려가 바로 오늘을 위한 안배였던 겁니다!”
뱅그릿의 눈빛이 우쭐대는 벤쉬를 훑는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평민으로 마탑의 선임까지 올라선 뱅그릿에게 눈치를 살피는 것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덕분에 곧장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짊어지겠다는 말에 담긴 속뜻을.
‘그 과정이 출탑 심사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은데…….’
출탑도 못 하는 벤쉬 선임.
당신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잔혹한 진실이 턱 끝까지 차올랐건만.
뱅그릿은 멋쩍게 웃었다.
“음하하. 기다리고 있어라, 아우야. 형님이 간다.”
……그래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곧 깨닫게 되실 테니까요.
당분간은 마음껏 기뻐하시길.
벤쉬 선임.
*
원탁회의 종료.
크리스탈 홀에서 빠져나온 내가 향한 곳은 가넷 홀이었다.
가넷 홀에 들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가야지, 아르카나 대륙.’
그러니까 빌려야지, 마도구.
그랑펠에게 또 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슬그머니 레벨을 흘겨본다.
[레벨 : 680]
레이먼 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치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600레벨 대에 진입한 뒤로 어디 레벨 올리기가 수월했어야 말이지.
펄럭─
이제 걸을 때마다 펄럭거리는 재킷을.
제대로 착용하기까지도 20레벨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만 하더라도 레벨을 올려야 하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지만.
‘레벨이 높으면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되니까.’
과거, 낙하산으로 가넷 홀을 방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땐 기껏해야 100레벨 언저리였던 나였다.
그탓에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던 마탑의 마도구들도.
이제는 마음껏 골라볼 수 있겠구나.
“앗, 이호열 수석님……?”
가넷 홀을 지키고 있던 숙련 마법사가 흠칫한다.
갑작스레 원탁회의를 소집해 놓고서는.
가넷 홀엔 어쩐 일인가, 싶은 거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탁회의는 끝났다.”
“아앗, 그렇군요! 한데, 가넷 홀엔 무슨 일로……?”
“수석의 권한으로 마도구를 대여하고 싶군.”
“앗, 그러셨군요! 찾으시는 마도구가 있으실까요!”
사실 기본적으로 마탑의 마법사는 마도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 마탑에 입성할 재능을 타고난 마법사들의 본성이라는 게 그랬거든.
연구든, 진리든, 뭐든, 끊임없이 뒤쫓아 스스로를 향상하려고 하는 존재들.
그렇기에 단순하게 발현력을 증폭시키는 마도구는 ‘특수한 목적’이 아니고서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발현력 관련 마도구가 필요하다.”
“……!”
내 말에 놀랄 법도 하다.
그건 내게 특수한 목적이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물론, 숙련 마법사가 내 목적을 캐물을 리는 없었다.
“그, 그러시다면 이쪽으로…….”
나는 안내에 따라 가넷 홀 내부로 진입했다.
‘오호.’
낙하산 시절 봤던 마도구 몇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레벨이 낮은 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 이름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저 목걸이처럼 마도구, [빙결된 지식] 맞지?
[빙결된 지식]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50]
[효과 : 빙결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50퍼센트 회복.]
[설명 : 위대한 빙결 마법사의 유품이다. 생전 그가 이룩했던 마법적 지식이 목걸이에 그대로 빙결되어 보존되어 있다.]
다시 봐도 빙결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는 효과를 가진 마도구다.
소모한 마력의 50퍼센트 회복이라니.
막말로 이런 효과가 순수마력 관련 마도구에 달려있다고 생각해 봐.
‘에픽 등급은 될걸?’
식견이 좁았던 그때는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이런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 유니크 등급에 레벨 제한도 그다지 높지 않은 이유를. 그건 빙결마법이 비주류 마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딱히 강점이랄 게 없지.’
특수한 상황에서의 파괴력은 걸출했지만, 가장 큰 단점은 약점이 뚜렷하다는 것. 뭣보다 주류마법 중 하나인 화염마법과 치명적인 상성관계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 빙결마법으로 원로 마법사 자리에 오르다니.’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양반이셨다, 세니오스.
그리고 그런 세니오스에게 인정받은 내가 아니던가?
겉모습만 그럴싸하던 낙하산 시절의 내가 아니다.
실컷 구경하고 고작 [육망성 브로치] 하나를 대여하는 데 그쳤던.
이호열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감 넘치게 [빙결된 지식]을 손에 쥐었다.
“!”
……너무나도 당당하게 집어서일까?
숙련 마법사의 동공이 움찔거린다.
하지만 놀라기엔 이르다.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다음으로 대여할 마도구를 선택하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것도 모자라서는.
죽어가는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와 마주해야 하는 나였다.
어쩌면 천하의 엘더 드래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지. 근데, 만반의 준비를 달랑 마도구 하나로 끝낼 수 있겠냐고.
‘……굉장히 치렁치렁하겠는데.’
사실 지금만 하더라도.
목걸이에 브로치에 펄럭거리는 재킷이 지나치게 화려했거늘.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르카나 대륙에 보는 눈은 없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복장도 조금만 참아보자, 호열아.
“나쁘지 않군.”
“대여하겠다.”
“마찬가지다.”
가넷 홀에는 한동안 나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
.
.
가넷 홀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이다.
가넷 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녀에게 전해진다.
오늘 있었던 일도 예외는 아니다.
“……뭐라고요, 라란?”
가넷 홀을 지키고 있던 숙련 마법사, 라란.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되풀이했다.
가능한 또박또박.
“이호열 수석님께서 총 열두 점의 마도구를 대여하셨다고요……?”
열두 점이라.
확실히 많기는 하다만 그 수량에 놀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수석 마법사에겐 마도구를 자유롭게 대여할 권한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여한 마도구의 종류가 문제였다.
키코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양피지를 살폈다.
“빙결된 지식, 해마의 심장, 운명의 주사위……?!”
열두 점의 마도구 전부.
발현력을 증폭시켜 주는 ‘결전용’ 마도구였다.
이어서 다음 글줄을 읽어나가던 키코.
그녀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라란이 그토록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유를.
“……키코 선임 마법사님!”
“섣부른 추측은 좋지 않은 법이죠, 라란.”
“그건 그렇지만……!”
다른 마도구와 달리 결전용 마도구는 그 대여기간을 명시해야만 했다. 마탑의 마법사가 결전용 마도구를 기약 없이 다루게 되는 순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마탑의 규율에 호열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란이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호열 수석께서 작성하신 대여기간이……!!”
말하지 않아도 보고 있다.
키코는 다시금 초점을 붙잡고 양피지를 바라봤다.
거기엔 호열의 필체로 담담하게 적혀있었다.
──────
대여기간 : 사망하는 순간까지.
──────
.
.
.
……아니, 이게 또 틀린 말은 아닌데.
꼭 그렇게 직설적으로 적어놔야겠냐고.
그냥 아르카나 대륙에서 귀환할 때까지.
친절하게 써넣으면 좀 좋아?
사망하는 순간까지!
대여기간에 그렇게 휘갈겨 놓은 이유야 간단했다.
나에겐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든든한 그 효과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한마디로 그랑펠식 표현.
지옥과도 같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는 순간까지.
절대 숙이거나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걸 확인한 숙련 마법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지.
날, 마탑 마도구로 죽을 때까지 본전을 뽑으려는.
염치도 없는 놈이라 생각한 게 분명하다……!
‘차라리 진짜 욕심을 부려서 욕을 먹는 거면 또 몰라.’
청렴결백 때문에.
정작 제대로 된 욕심은 부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죽을 때까지 마탑의 마도구를, 무려 열 하고도 두 점이나 빌려 간 염치 없는 놈 취급을 받게 되다니.
‘억울하기 그지없구나. 진짜.’
……그러나 오해를 풀기에는.
늘어놓아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구나.
나의 이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역시 티타임밖에 없었다.
“으음.”
그러니 녹차가 아니라고 못마땅한 기색은 마라, 그랑펠.
자고로 입에 쓴 게 몸에 좋은 법이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녹차의 카페인이 아닌 비약초 도핑이었으니까.
[6시간 동안 생명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1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12시간 동안 스테미너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엘프인 엘시도어가 가꿔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면 유기농 비약초라서 그런가.
그 효과가 나쁘지 않다.
‘소폭 증가 같은 효과들이 쌓이고 쌓여 큰 차이를 만드는 거지.’
그럼, 슬슬 넘어갈 준비를 해볼까.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카나로 통하는 기이의 포탈을 열었을 때 느낀 점?
발현 과정에 발생하는 막대한 마력 에너지를 견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에 적합한 공간이 바로 마탑 최상층이었다.
최상층으로 향하기 위해 활짝 문을 여는데…….
깜짝이야!
다들 내 집무실 문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건데?
그 심각한 표정들은 또 뭐고?
……잠깐만, 그럼 내 녹차 투정도 들은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