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37화 (237/489)

◈ 237화. 진정한 규율

AAU 유스라 지부의 총책임자.

짊어진 무게엔 누구보다 충실한 나다.

덕분에 드래곤, 유낙서스가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갔던 그날.

AAU의 기록 또한 꼼꼼하게 정독했었지.

‘현대 장비로는 측정불가능한 수준의 에너지 반응.’

과연 그럴 만도 했겠구나 싶다.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직감했거든.

이거, 지금 당장 발현하기엔 무리라고!

접속기의 역할은 사실상 포탈과 다름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포탈은 목적지의 좌표가 현재 위치와 멀어질수록 마력 소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는 것.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목적지 좌표를 설정하니,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멀쩡할 때도 나 혼자 진입하는 게 고작일 것 같은데.’

현재 나는 균열을 반전의 기이로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첫 세계수의 축복]으로 재생되는 마나를 균열에 전부 쏟아붓고 있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아르카나 대륙까지 통하는 포탈을 발현할 수 있겠냐!

스스스─

거둬들이는 마력.

그런 속사정이 있었건만.

주둥이는 뻔뻔하게도 내뱉는다.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겠다.

내뱉었던 나였다.

거기에다가 퀘스트도 있었지.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실패)

─죽어가는 노룡, 유낙서스와 조우하라. (진행 중)

내 퀘스트가 아니라 용기사, 스칼의 클래스 퀘스트였지만.

나도 유낙서스와는 대화가 필요했다.

대체 어머니, 세계수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그걸 내 입으로 꺼내기는 싫다만…….’

클라우디 가문에 관한 이야기까지.

확실하게 들어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라, 유낙서스.’

아무래도 이곳.

현실의 일을 수습하고 가야 할 것 같았으니까.

갑자기 수습이라니.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대답해 주겠다.

“규율이 흔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말했다시피.

레이먼 션을 사냥감이라 간주한 상황.

덕분에 악마 사냥꾼인 나의 눈에는 훤히 보였거든.

월드 퀘스트를 내세운 레이먼 션이 속셈이!

그걸 알게 된 지금.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나는 붙잡고 있던 균열에서 마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

[균열, 던전 : CODE-009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파아앗!

깨져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읊조렸다.

“주제 파악을 하도록.”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발버둥 치고 개고생 해서 세운 규율이었다.

그런 규율이 무너지는 꼴을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냐?

“사냥감 주제에 규율을 거스르려 들지 마라.”

*

AAU 각 지부는 해당 국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다.

대격변이라는 초현실적인 재난에 대응하는 기관이 바로 AAU였으니까.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국가와 AAU는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AAU 지부장 회의.

프로토타입 몬스터부터.

프토로타입 접속기의 등장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지부장들은 긴밀하게 움직였다.

박민재가 언급했던 대로 천하통일,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도록. 각 국가 정부 인사들은 AAU의 요청에 따라 중국 정부에 협력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지부장, 짐 조슈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 미합중국까지 전멸이군요.”

어떤 국가에도 중국 측의 회신은 없었다.

도쿄 지부장, 오카자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AAU에 가입하지 않았던 중국이라고 한들.

“……이건 전례에 없던 일이지 않습니까?”

대격변 앞에서 이토록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국민들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서로 최소한의 협력 관계는 이어왔다는 뜻이었다.

박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여태껏 류오쥔춘을 비롯한 천하통일 길드원들이 자유롭게 타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이유였죠. 설령 국제 협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천하통일의 전력은 명백히 인류에 도움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점점 불안해지는군요.”

런던 지부장, 베이커는 침음을 삼켰다.

“접속기를 발견하신 총책임자님의 행보가 플레이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줄 겁니다. 제가 아는 총책임자님이시라면 망설이지 않고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실 테니 말입니다.”

악마에 의해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월드 퀘스트의 내용처럼 기회의 땅이라는 말도 됐다. 박민재는 호열에게서 전달받았던 아르카나 대륙의 현황 기록을 훑었다.

‘수도성 안토니움조차 위태로운 상태…….’

대륙을 지배하던 제국조차 그런 꼴이었거늘.

변방 지역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

박민재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하지만 영웅은 난세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더군다나 아르카나의 시스템을 생각하면…….

‘정말로 퀘스트와 보상이 끊이질 않겠지.’

호열을 포함한 10인의 모험가는 지금까지의 랭킹 따윈 무의미해질 엄청난 보상을 거머쥘 수도 있을 터. 플레이어들이 괜히 군침을 흘리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니까.’

그렇기에 막막해졌다.

침묵 속에서.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렇다면 가정해 봅시다.”

“무엇을 말입니까, 조슈아 지부장?”

“이대로 중국 정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천하통일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지금 당장 제로 산맥에서 철수, 코드 균열을 찾기 위해 전력을 투입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조슈아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우리에겐 그들을 막아설 명분이 없습니다. 협약을 어기는 게 아닌 이상, 플레이어가 균열을 클리어하기 위해 움직이는 걸 통제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카자키 지부장님?”

“맞습니다.”

프로스트가 홋카이도에 나타났을 당시.

일본 정부는 협약을 어기고 플레이어들을 통제했다.

그 결과, 국제 협약 위반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누군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것참 빌어먹을 규율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누구를 위한 규율이란 말입니까?”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만 더없이 유리한 규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게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AAU와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두고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들도 천하통일과 마찬가지로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으니까요.”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어쩌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거기에 카르펜 반란군 같은 아르카나 세력들이 끼어들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겠죠.”

비약 따윈 조금도 없는 객관적인 사태파악.

꾸욱─

박민재는 주먹을 쥐었다.

‘이놈의 성질머리 같아서는 말이야.’

규율이든 뭐든 죄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젠장.”

답답했다.

호열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겠다 생각했거늘. 보다시피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박민재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규율만 아니었어도 내가…….’

그렇다.

누구보다 규율에 엄격한 호열이었으니까.

자신을 위해서 규율을 어겼다는 사실을 호열이 알게 된다면.

오히려 그에게 짐을 얹어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달리 심각한 표정이시군요, 미스터 박.”

“……그럴 일이 조금 있습니다.”

“짐작됩니다.”

“……?”

……당신이 내 심정을 어떻게 아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반골 기질.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린 박민재의 눈에 들어온 건.

“!”

자신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이커였다.

아니, 베이커뿐만 아니었다.

베이커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여기 모인 모두는 미스터 박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잠깐이나마 긍지를 간과했군요.”

박민재는 작게 웃었다.

그래, 과거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머리를 싸매도 여럿이서 같이 싸맬 수 있을 테니까.

“함께 고뇌하다 보면 뭐라도 방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박민재가 의욕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야근하시죠!”

“미스터 박, 결론이 왜 그런 식으로……?”

“갑자기 야근이라뇨. 그런 막말을.”

조슈아를 비롯해서 흠칫한 몇몇이 보였지만.

불과 조금 전 멋지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게다가 타 지부의 직원들까지 괜히 박민재, 이름 석 자에 몸서리를 치는 게 아니었으니. 박민재의 집요함에 결국, 지부장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우.”

중국 측과의 연락망이 단절된 지금.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

박민재가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띠링!

문득, 화상 채팅룸에 알림이 도착했다.

이내, 지부장들에게 공유되는 소식.

그 소식에 지부장들의 입이 벌어졌다.

“자, 잠깐만요.”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이거, 저희가 야근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박민재가 소름을 쓸어내렸다.

“……그 규율을 진심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총책임자님!”

.

.

.

마탑.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원탁회의였다.

그 때문에 참가엔 의무가 없었거늘.

크리스탈 홀은 이미 만석이었다.

숙련 마법사, 린느는 외마디 감탄사를 뱉었다.

“오호! 선임들께서 전원 출석? 마르셀로 수석님은 물론이고, 유그위드 원로님마저요? 그나저나 저 고양이는 대체 뭡니까? 얼마 전부터 계속 보이는데……. 저거 쫓아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털 날리는데.”

린느의 수다를 잠재운 건 지브릴이었다.

“당신부터 쫓겨나기 전에 좀 앉는 게 어떤가요, 린느.”

“……네?”

“당신이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찰나지만 따가운 시선이 당신에게 쏟아졌거든요. 클레도 보았죠? 특히나 못마땅하게 쳐다보시던 벤쉬 윌리엄 선임님의 눈빛을요.”

“허걱.”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그는 선임 중에서도 까칠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물론, 그 실체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의아한 명성일 테지만.

“하, 하필이면 벤쉬 선임님이라뇨!”

입을 다물고 있을 때만큼은 귀족적이며 날카로운 외모를 가진 벤쉬였으니까. 물론, 벤쉬에게 숙련 마법사를 신경 쓸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벤쉬가 뱅그릿에게 속닥거렸다.

“분명, 무언가 큰일이 생긴 겁니다. 뱅그릿 선임!”

“……어딘가 기뻐 보이시네요.”

“아니, 기쁜 게 아니라……! 뱅그릿 선임, 당신도 제 입장이 되어봐야 이해할 겁니다. 진짜 제가 얼마나 답답한 줄 알고 계십니까?”

무한 반려.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출탑 신청서.

벤쉬가 마탑을 벗어나 콧바람을 쐰 적은 마왕성 압살이나 제로 산맥 출현과 같은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밖에 없었다. 벤쉬가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로 토로했다.

“저라고 이렇게 구질구질해지고 싶겠습니까! 네?”

그런 의미에서 벤쉬는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의 긴급 원탁 회의 소집이었으니까.

“이 수석님, 여간해서는 규율을 어기시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이번 일이 여간 일이 아닌 일이라는 뜻이 되겠지.

떨어지는 출탑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까.

벤쉬가 두근거리며 가슴 졸이던 순간이었다.

또각─

예정된 시간에 맞춰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차례.

크리스탈 홀을 둘러보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긴급하게 원탁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간단하며 명확하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은 만큼. 그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 대신 보여주도록 하겠다.”

그러자 허공에 일렁이는 마력.

아공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무언가’.

벤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동물의 알인가?

생각하는 순간.

호열이 말을 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길이다.”

“……!!!”

견습, 숙련, 선임, 수석, 심지어는 고양이 탑주까지.

누구 하나도 예외는 없었다.

크리스탈 홀, 전원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

.

.

긍지란 무엇인가?

이 가슴속의 긍지가 워낙 무거워야 말이지.

말로 설명하려면 아마 밤새 재잘거려도 끝나질 않을 거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접속기를 혼자 꿀꺽하는 건.

그랑펠의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는 것.

‘사실, 난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지.’

청렴결백.

물질적 욕구를 초월한 그랑펠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속물인 나, 이호열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말했다시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나는 접속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했으니까.

‘굳이 접속기가 없어도 마력만 있으면.’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었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히 자초지종을 밝힐 수 있는 거지.

평소처럼 가슴을 쫙 펴고 꼿꼿할 수 있다는 거다.

나는 읊조렸다.

“그대들은 물론, 모두에게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목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도 그 목적의 무게를 저울질 할 순 없겠지. 그러나 기회가 한정된 이상, 누군가는 그 역할을 짊어져야만 한다.”

감히 긍지로 세운 규율을 깨려고 했겠다, 레이먼 션.

어째 사기를 치는 데에 소질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이쪽도 규율을 지키는 데에는 이골이 나서 말이야.

“그 역할과 역할에 뒤따르는 모든 책임 또한.”

또 짊어지는 데에도 요령이 생긴 사람이라서 말이야.

“……!”

말을 끝마치려던 순간, 마르셀로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움과 우려가 반반씩 섞인 눈빛이구나, 마르셀로.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말했다시피 요령이 생겼다고 했잖아?

이게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선언했다.

“오롯이 내가 감당하겠다.”

왜, 그 과정은 출탑 심사랑 다를 바가 없을 거거든.

그러니까…….

그대는 지금처럼 기뻐할 이유가 없을걸, 벤쉬 윌리엄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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