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36화 (236/489)

◈ 236화. 이 시간부로 사냥감이다

철컥─

쇳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아차렸다.

셰그윈이 검집에 아틀라스를 집어넣는 소리였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검성의 직감.

이곳에 더 이상 위협적인 기척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거 괜한 짓을 했구나, 싶어진다.

레이먼 션, 그 자식 면상에 한 방 먹여주겠다고.

클리어된 균열에다가 [「반전의 기이」]를 발현했거늘.

‘실체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단 건가?’

억울해서라도 관제실을 뒤져봐야겠다.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는 여전히 발동 중이다.

그러나 마력은 여의치 않다. 이 순간에도 폐쇄되려는 균열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으니까. 다만, 라이트 하나 정도를 발현하는 데엔 무리가 없겠지.

두둥실─

빛의 구체, 라이트가 관제실을 밝힌다.

설마했는데 이거 진짜로 없네?

물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반강제로 아지트에 진입한 나였다.

그래서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닌데…….

‘애초에 만날 생각도 없었던 거 아냐?’

하긴 폴리모프를 덧씌운 마네킹을 앞세웠던 그였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나도 속여넘기려고 했던 모양이군. 그런 의미에선 놀아나지 않은 데에 감사해야 하나.

물론, 어찌 됐든.

“그대는 끝까지 긍지롭지 못하군.”

나는 몰라도.

그랑펠에게 레이먼 션, 그쪽의 평가는 바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뭐, 거의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들려오는 일루젼 브레이커의 목소리.

-검강은 예리해졌거늘. 어쩔 수 없는 애송이인가.

내가 아닌 셰그윈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야 뭐 속으론 부들거리고 있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나와는 다르게 셰그윈은 감정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쳇.

놓쳤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사실 나도 내색은 하지 못하지만 같은 심정이다, 셰그윈.

그러니까 뭐라도 단서를 찾아봐야지.

‘관제실.’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남아있을 터.

균열이 클리어되면 이곳이 어떤 형태로 남아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반전의 기이로 균열의 클리어를 막고 있는 지금이. 레이먼 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변을 살피는데…….

‘!’

낯익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먼저 발견한 건 셰그윈이었다.

툭툭─

셰그윈은 검집으로 그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가 댔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애송이가 짐승의 알이냐고 묻는군.

짐승의 알이라.

아르카나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그러나 내게는 아니었다.

보자, 마지막으로 봤던 게 십 년 하고도 수년 전이거늘.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저 무언가에 붙어있던.

빨간 딱지가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었기 때문에라도 말이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전용 접속기.

코스모의 VR 캡슐이었다.

하나에 천만 원을 호가하던 그 접속기 말이다.

라이트로 비춘 관제실에는 접속기를 제외한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흔적도, 보상이라 불릴 만한 아이템도 없었다. 그럼 그 말인즉슨.

저 접속기가 바로.

레이먼 션이 나를 초대한 목적이자.

던전의 클리어 보상이라는 것.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등잔 밑이 빌어먹게도 어두웠잖아.’

출시 직후.

인류의 기술력을 수십 년이나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은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 대륙 전기였다. 그래, 모든 건 아는 만큼 보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기이』]에 가까운 기술력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읊조렸다.

“그랬군.”

저 알처럼 생긴 전용 접속기가 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였구나.

깨닫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월드 퀘스트 : 10인의 모험가]

코드 균열에 숨겨진 10개의 프로토타입 접속기.

그것이야말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모험가들이여, 아르카나인들이여.

혼돈에 빠진 대륙에서 모든 것을 거머쥘 기회를 손에 넣어라.

─CODE 균열을 발견하라. (성공)

─균열을 클리어하고 접속기를 습득하라. (성공)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라. (진행 중)

정말로 마지막까지 개수작이구나, 레이먼 션.

.

.

.

퀘스트 내용에서 알 수 있듯.

퀘스트는 호열에게만 떠오른 게 아니었다.

동영상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흠칫했다.

“!!!”

접속기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그것도 무려 월드 퀘스트가.

“갑자기 뭔데, 이 분위기?”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락키드는 정적이 찾아온 주점을 바라봤다.

모험가 녀석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맥주를 통으로 들이켜며 눈치를 살핀다.

‘눈알만 굴리는 게 꼭…….’

서로 뒤통수칠 생각만 하는 눈빛들이잖아?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락키드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플레이어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접속기라니.’

‘저 프로토타입 접속기라는 것만 있으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건가?’

‘그냥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하는 건 미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퀘스트가 있어. 그것도 월드 퀘스트가.’

클래스 퀘스트만 하더라도 막대한 보상을 준다.

단지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남들보다 수십 걸음은 앞서나가는 랭커들이 널려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클래스 퀘스트보다도 희귀한 월드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다면?

‘이건 기회야!’

그 보상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호열이 한 개의 접속기를 발견했으니, 남은 건 단 아홉 개.

당연하게도 호열의 접속기를 가로챌 생각을 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쳤다고 이호열을 건드려?’

‘제정신이면 상상도 못 할 짓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 새끼라면…….’

그동안 호열에게 받은 게 얼마였던가?

게다가 이번 월드 퀘스트를 발견한 것 또한 호열이었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은 남은 아홉 자리를 두고 눈치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소식은 AAU에도 전해졌다.

“하하…….”

박민재는 너털웃음을 뱉었다.

그동안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왔지?

마탑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솟아났을 때부터.

정말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생각해 왔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아르카나인들을.

그들의 아르카나 대륙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을지를.

비단, 인류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마탑 또한 분명하게 선언했었으니까.

-“마탑의 목적은 아르카나 대륙으로의 귀환입니다.”

인류도 아르카나인들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대격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마치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넌, 정말로 끝까지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구나.”

레이먼 션은 그 해답을 달랑 내놨다.

그것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 접속기라는.

박민재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VR 캡슐로.

윤수겸이 박민재에게 물었다.

“지부장님, 혹시 알고 계십니까?”

“뭘?”

“접속기 형태가 제가 아는 것과 살짝 달라서요.”

“그거라면 별거 아니야.”

박민재는 필사적으로 화를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베타 테스트 시절. 프로토타입 접속기니까. 저건.”

“……!”

“정말 우리를 등신으로 봤구나, 레이먼.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 전기는 녀석에게 수단에 불과했어. 모든 게 대격변을 위한 빌드업에 불과했다는 거야.”

그랬다.

모든 게 대격변을 위한 가짜였다.

베타 테스트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 전용 접속기도, 아르카나 서비스도 전부 대격변을 위한 사전작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무력감이 몸을 짓눌렀다.

‘그럼, 대체 우린 그동안 무얼 위해서?’

처음부터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니 새낀 우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뭐라도 아는 것처럼 AAU를 창설하고 대격변에 대응하겠다고 설쳐대는 꼴이 네겐 얼마나 같잖게 느껴졌을까. 박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참아낼 수 있다.’

속은 새끼가 잘못이라고.

반골 기질을 앞세워서 인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레이먼 션의 기만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모든 게 연기이자 허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서비스하던 경험이 있었다.

충격에 빠진 AAU 대한민국 지부.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다들 주목하길 바란다.”

웅성거리던 소란이 잦아든다.

그나저나 얼굴들이 정말로 가관이다.

말했다시피 경험이 있었기에 앞날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단 열 명의 플레이어에게……. 아니, 이호열 총책임자님은 제외해야지. 총 아홉 명의 플레이어에게만 막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경쟁이 뒤따르게 될 터.

그러나 플레이어들만의 경쟁이 아니란 것이 문제였다. 누구보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건 현실에 떨어진 아르카나인들일 테니.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총책임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총책임자님이 계시는 이상. 마탑이나 라이언 하트 기사단, 뮤온. 심지어는 그림자 용병단 같은 거대 세력들이 움직이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잖아?”

언급한 세력들처럼.

현실과 융화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카르펜 반란군이나 레드 윙 전사들만 해도 그렇지.”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는 법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경쟁에 뛰어들 거다.”

박민재는 장담할 수 있었다.

“레이먼, 엿을 던져도 아주 커다란 엿을 던졌어.”

인류와 아르카나의 화합.

호열의 희생으로 세운 새로운 규율을 깨트리기 위해서.

레이먼 션은 보상을 내세운 것이었다.

플레이어도 아르카나인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보상을.

박민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어떤 추악한 꼴이 벌어질지 모른다.”

경쟁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최근 제로 산맥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았던가?

자국의 항공모함을 앞세워 진격.

제로 산맥을 공략해 가는 천하통일을 예로 들 수 있다.

“함포의 사격 대상이 몬스터에서 플레이어 혹은 아르카나인에게 옮겨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지, 한 번이라도 사건이 터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다들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게다가.

“류오쥔춘이라면 그 시작을 망설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그 악명, 자자했잖아?”

클래스, 군주.

압도적인 폭력.

폭군으로서 지금의 자리로 올라선 류오쥔춘이었다.

대격변 이후에도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하겠지.

아르카나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는 천하통일.

길드원들의 비정상적인 레벨 분포도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천하통일에는 레벨 성장이 완전히 멈춰버린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격변 이후라고 그 상황이 달라졌을까?

“군주는 엄청난 포텐을 가진 클래스인 만큼 수월하게 레벨 업할 수 없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다. 근데, 류오쥔춘은 어떻지? 오히려 대격변 이후에 가파르게 랭킹을 치고 올라와서는. 스칼, 록스와 함께 삼파전을 구축했다.”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류오쥔춘뿐만 아니야. 초신성을 비롯한 악명 높은 몇몇 플레이어들. 그리고 아르카나인들까지. 레이먼 션은 그런 위험한 녀석들에게 판을 깔아준 거야.”

싸움을 부추기는 꼴이 악마와 다름없는 자식이다.

그러니 속셈을 알아차린 이상, 망설일 새는 없었다.

박민재가 말했다.

“천하통일을 막아 세울 수 있는 건 역시 국가밖에 없겠지.”

“……중국 정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전 세계가 나서서 회유해 보는 수밖에.”

류오쥔춘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혼란은 시작된다. 그런 류오쥔춘을 당분간만이라도 억제할 수 있다면 당장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위한 지부장 회의가 지금부터 시작될 거다.”

박민재는 모니터를.

정확하게는 화면에 떠오른 호열을 바라봤다.

호열은 그저 우두커니 접속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민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에야말로 짊어지신 짐을 저희가 나눠 들겠습니다.’

.

.

.

레이먼 션.

개수작의 수준이 악마와 다를 바 없다.

남들보다 퀘스트를 많이 수행한 덕분인가.

퀘스트에 담긴 속뜻이 훤히 보였다.

한마디로 열 개의 접속기를 두고 싸우라는 거군.

그랑펠 말대로 긍지로 똘똘 뭉쳐도 대응하기 어려워질 대격변이었다. 그런데 돕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훼방을 놓겠다고?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이는 마왕 쟁탈전의 모방인가.”

접속기만 왕좌로 바꾼다면 그 꼴이 영락없이 마왕 쟁탈전이겠다, 안 그래?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 션, 그쪽과 남겨뒀던 대화의 여지는 이 시간부로 사라졌다.

나는 선언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를 사냥감으로 간주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쪽 개수작에.

─접속기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에.

글자 따위에.

놀아날 거로 생각하면 착각이야.

그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내 눈에는.

보이고 있었거든.

프로토타입 접속기의 구조가.

그 말이 뜻하는 바?

간단하다.

나 또한 드래곤들처럼 차원을 찢게 됐다는 뜻이다.

고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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