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박민재만이 아니었다.
각 지부, 지부장들을 비롯.
아르카나의 베타 테스트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갑자기 넋이 빠진 지부장들의 얼굴.
“베이커 지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음, 아무것도 아닐세.”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이거 또 총책임자님이시군요!”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놀라운 일이다.’
[프로토타입 모델 : D].
베타 테스트 시절의 프로토타입.
가짜라고는 하나 엄연한 드래곤이었다.
그 브레스의 위력만큼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터.
‘드래곤 브레스를 검으로 무력화했으니.’
검과 브레스가 맞닿는 순간.
브레스는 가루가 되어 허공을 비산했다.
직접 지켜봤어도 두 눈을 의심했을 만한 광경이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납득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호열 총책임자님이시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넋이 빠진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프로토타입 몬스터의 존재, 그 자체였다.
AAU 대한민국 지부.
박민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레이먼 션과의 대화.
-“이미 완성된 것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이미 서비스 중인 아르카나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대격변 이후, 개발 단계에 불과하던 설정들이 실현되어 균열로 튀어나왔을 때.
박민재는 비로소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이미 완성된 세계였다고…….”
코스모가 아르카나 대륙을 개발한 게 아니다.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의미를.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 추측을 끝까지 반박하던 건 베타 테스트 시절의 경험이었다. 베타 테스트 시절, 불완전하던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지켜봤었으니까.
마냥 레이먼 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프로토타입이 왜 갑자기……?”
그런데, 증거였던 프로토타입들이 균열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박민재의 동공이 흔들렸다.
‘베타 테스트가 전부 가짜였다는 건가?’
가짜 다른 말로는 허상.
아르카나 대륙이 정말 원래부터 존재했던 세계라면. 베타 테스트는 단순히 우리를 속이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는 것. 코스모는, AAU는 지금까지 레이먼 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뜻이었다.
“이 개새끼가.”
빠득!
박민재는 이가 갈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말로 완벽하게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지부장님?”
“잠깐만. 뒤집힌 속 좀 추스르는 중이다.”
“아, 넵!”
가뜩이나 지랄맞은 반골 기질이다.
그 기질이 용납하지 못한 작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으니까.
부하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나 동요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박민재는 기어코 낯빛을 바꿔냈다.
“후우, 됐어.”
이것 또한 사회생활의 연륜이라서?
그럴 리가 있나.
납득할 수 없다면 냅다 들이받기만 하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막말로 성현준이보다 사회생활엔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를 억눌렀다는 말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박민재는 모니터를 가리키리라.
“……이번에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호열 총책임자님.”
그랬다.
레이먼 션에게 얻어맞은 뒤통수의 쓰라림을.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이 되갚아주기 직전이었으니까.
누군가 외쳤다.
“이걸로 마지막 층. 그러니까 관제실입니다!”
박민재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얻어맞는 기분이 어떤지 느껴봐라, 개자식아.”
*
선의의 경쟁.
승부는 간발의 차이였다.
체력 단련에 이어서 연패는 용납할 수 없다는 모양인지, 쾌검으로 거대 프로토타입을 난도질해 나가던 셰그윈이었거늘. 내게 시선을 빼앗긴 게 패착이었다.
‘그래도 이해는 한다.’
일루젼 브레이커 소리를 들었는데.
안 돌아보고 배길 수 있겠냐고.
쿠구궁─!
거대 프로토타입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뭔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애초에 레이먼 션을 만나기 위해 진입했던 던전이다. 레벨 업이나 전리품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들어올 때 마음과는 다르구나.
‘경험치 안 줬으면 섭섭할 뻔했어.’
프로토타입은 전리품을 드롭하는 대신 상당한 경험치를 뱉어냈다.
거대 프로토타입을 쓰러트리기 전에도 무려 9레벨이 상승한 거만 봐도 알 수 있듯 말이다. 그래서 나름 기대하고 상태창을 확인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레벨: 680]
……680레벨이라고?
[보유 포인트 : 59]
잠깐만, 저거 한 마리로 50레벨?!
경험치를 시스템 한계치까지 습득했다는 뜻이잖아.
단번에 50레벨이라니.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쌓인 경험치 이상으로 호화스러운 경험치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저게 기계 덩어리가 대체 뭐길래……?’
물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전리품은 뱉어내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진심으로 만족이다.
레벨도 레벨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수확이 있었으니까.
두 번째 초월자 성취를 개방했으니 말이야.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긍지의 검로 (현재 해방된 길 : 제1길) / 없음 / 없음…….]
이름하여 긍지의 검로.
‘……누구답게 거창하다, 진짜.’
이름부터 그랑펠다운 성취가 아닐 수 없구나.
그러나 그 효과는 실로 나, 이호열다웠다.
수도 없이 많은 살 구멍을 파둔 덕분에.
어떤 적을 상대로도 상성 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런 내 검로를 따라서.’
동반자, 귀철 또한 이름을 바꾸겠지.
……아니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형태와 효과를 바꾸겠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거야.’
현재 해방된 길은 ‘제1길, 일루젼 브레이커’뿐.
그러나 다른 길도 발버둥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겠지.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일루젼 브레이커가 말했다.
-아틀라스가 패배를 인정하겠다는군.
그래?
그 말에 셰그윈을 바라보니, 어째 아직도 놀란 눈치였다.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게 여러 의미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긍지의 검로에 얼마나 처절한 사연이 있는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그랑펠이 아니었으니.
태연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소 방해꾼이 사라졌군.”
[B5-심층연구실]
“나아가지, 셰그윈.”
그전에 심층연구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단 아래로 보이는 모습을 봤을 때 프로토타입은 보이지 않았다. 연구실이란 이름에 맞게 무수한 모니터만 늘어져 있을뿐.
그냥 지나쳐 내려가면 심층부의 끝, [B6-관제실]이 있다.
거기서 CCTV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겠다, 레이먼 션.
뭐,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안 될 것도 없어.’
나도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게 많거든.
하지만 그전에 일단, 계산은 확실하게 하자는 것뿐이다.
나도 그렇고 셰그윈도 그렇고.
그쪽에겐 받아내야 할 빚이 조금 있잖아?
의욕을 되살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지지직─
문득 고막을 파고드는 소음.
“!”
철컥!
셰그윈이 반사적으로 아틀라스를 치켜든다.
던전, 어떤 상황이 발생하리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공간.
그러나 나는 언제나와 같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경계할 필요 없다.”
그게 방금 지지직 소리가 내겐 굉장히 익숙했으니까.
노이즈였다.
주파수를 잘못 맞추면 나오는 화이트 노이즈를 말하는 게 맞다.
“?”
그러나 셰그윈은 곧장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려나.
아르카나인에겐 이보다 낯선 소리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나도 의문인걸.
‘갑자기 라디오라도 틀었냐?’
레이먼 션에게 구시렁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본다.
[B5-심층연구실].
……잠깐만, 수많은 모니터들이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탑주의 고양이 수작에 익숙한 나다.
덕분에 알아차렸다.
또 개수작 시작이군.
‘내가 눈이라도 줄 것 같냐?’
플레이어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퀘스트도 가볍게 무시했던 나다.
이깟 지직거리는 모니터로.
내 구둣발을 멈출 순 없다는…….
‘……어라?’
그러나 속마음과 무관하게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지직거리던 모니터에 떠오른 화면이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화면이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주 한 번 이상은 접속하니까 익숙할 수밖에 없겠지.
화면에 떠오른 저건 확실하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였다.
그냥 홈페이지만 떠올랐다면 멈추지 않았을 거다.
허나, 그 홈페이지에서 웬 동영상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비추는.
은빛의 머리카락.
지나치게 화려한 재킷과 의복.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외관부터 범상찮은 검까지.
저건, 나였다.
“……!”
멀리서 내 모습을 비추는 앵글이었기에 셰그윈 또한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실시간 스트리밍, 역시나 셰그윈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일 터.
파박!
셰그윈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핀다.
그런 셰그윈이 모습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떠오른다.
나는 역시나 태연하게 말한다.
“놀랄 필요 또한 없다.”
물론, 겉과 속이 다른 말이다.
왜냐니.
지금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있었으니까!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
균열에 진입하자마자 마주쳤던 CCTV.
‘저거 CCTV 시점인가?’
애써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해본다.
현재 CCTV에 포착된 내 모습이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저런 CCTV는 균열에 입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이 봐왔다.
‘……그럼 그동안 전부 지켜봤다는 거잖아.’
프로토타입을 무릎 꿇게 하는 것도.
방금 거대 프로토타입을 상대로 귀철을 치켜든 것도.
그리고 내가 쥐고 있는 일루젼 브레이커도……?!
그렇게 생각하자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각오는 되었나. 일루젼 브레이커.”
그, 그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박제됐다고?
이런 빌어먹을 세상아!!
검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텐데. 심지어 검 이름이 일루젼 브레이커라니. 나는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봤다.
레이먼 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셰그윈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로써 나 또한 그대와 같은 입장이 됐군.”
감히 나를 구경거리로 만들었겠다?
받아내야 할 빚이 ‘조금’ 있다고 한 건 취소하겠다.
수치사를 통해 나의 목숨을 위협한 죄는.
더더욱 엄중히 따져 묻도록 하겠다.
모니터에서 옮겨가는 시야.
지하를 향해 떠오른 계단을 향한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다.
또각─
[B6-관제실에 진입하셨습니다.]
관제실.
나는 던전의 심장부.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을 레이먼 션이 있을 그곳에 발을 들였다.
나의 구두 소리가 관제실에 울리기도 잠깐.
눈앞이 점멸했다.
뭐냐, 설마 또 퀘스트를 들이미는 건 아니겠지?
말했다시피 속물인 나는 개수작에 넘어갈지언정.
그랑펠에게 흔들림은 없었으니.
“웃기지도 않는군.”
일단, 싸늘하게 내뱉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만…….
이거 퀘스트 메시지가 아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조건이라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퀘스트 목표였다. 그런데, [B6-관제실]에 진입한다고 충족될 퀘스트 목표는 없었다. 이내,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그건…….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난데없는 보상 메시지였다.
[균열, ‘던전 : CODE-009’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알겠다.
‘날 이렇게 내보내시겠다?’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잔뜩 약이 오른 나와 셰그윈을.
균열 밖으로 내쫓아 버리겠다는 거구나?
근데,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그쪽에겐 되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고.’
내 목숨 값은 확실하게 받아내야겠다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균열을 폐쇄하고 내뺄 순 없지, 레이먼 션.
나는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
[첫 세계수의 축복]조차 재생하기 벅찰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그 마력의 사용처는 기이의 공간, 균열.
나는 이 순간 균열의 클리어를 반전시키겠다.
그런 게 가능하냐고?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가능, 불가능을 떠나서.
레이먼 션.
그 면상에 한 방 제대로 먹여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균열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마력이 너무 낮습니다.]
순식간에 마력 탈진을 예고하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쩌저저적─!
깨져가는 균열의 풍경을 또렷하게 응시한다.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현학적인 탐색, 과정, 발현의 과정.
!─적저저쩌
무너지던 균열이 다시금 반전되어갔다.
눈앞이 점멸했다.
[B6-관제실에 진입하셨습니다.]
“보상 따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나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요해진 관제실에 울린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더없이 냉랭하게.
“뇌물을 내민 것 또한 처분에 포함하겠다.”
그러니 낯짝을 보여라, 레이먼 션.
-오너라. 허상의 주인이여.
나의 애검, 일루젼 브레이커가.
수치심에 젖은 내 주먹이.
긍지 펀치가 울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