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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32화 (232/489)

◈ 232화. 업보 (1)

[던전, ‘CODE-009’에 진입하셨습니다.]

레이먼 션의 은신처.

첫인상은 낯설지 않았다.

딱히 플레이어가 아니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콘셉트가 명확했거든.

‘그냥 연구실이잖아, 여기?’

균열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공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사막 지하에 이런 연구실이 있었다는 건가? 정말, 돈만 많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게 없구나.

‘보자.’

일단, 곳곳에 CCTV가 가득하다.

스마트폰도 제대로 작동하는 균열 내부다. CCTV도 제대로 내 모습을 비추고 있겠고, 레이먼 션도 어딘가에 숨어서 날 지켜보고 있겠지.

‘사실 심정 같아서는…….’

CCTV부터 당장 어떻게 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당당하게도 선포하지 않았던가?

초대에 응한 게 아니라 처분하러 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는.

반협박으로 조건을 충족시키고 균열에 진입한 상황.

‘영 찝찝하단 거지.’

그러나 그랑펠의 긍지가.

나, 이호열의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을 용납할 리 없었으니.

CCTV 따윈 무심하게 패스.

“살펴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면 안 되겠냐 그랑펠?

어떻게 그 시절, 그 감성에 머물러 있는 거냐고!

애원도 잠깐, 역시나 익숙한 광경이 나를 반겼다.

‘저건 아무리 봐도 엘리베이터고.’

친절하게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B1-로비]

[B2-실험실]

[B3-연구실]

[B4-심층실험실]

[B5-심층연구실]

[B6-관제실]…….

실험실에 연구실이라.

확실히 레이먼 션의 은신처답다.

공대생답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의문이 든다.

‘대체 뭘 실험하고 연구한 거지.’

다행히도 그런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

직접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배려인가?”

엘리베이터도 배려라면 배려였다.

방문자를 위한 섬세함에 감탄해야 했거늘.

역시나 문제는 상대방이었다.

분명 내뱉지 않았던가.

레이먼 션, 그쪽의 환대는 모조리 거절하겠다고.

“그렇다면 역시나 거절하겠다.”

콰드드득!

망설일 것 없이 마법 발현.

순식간에 뒤바뀌는 풍경.

발아래로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떠오른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

광물에 관한 모든 지식으로 탐색 과정은 생략.

이번만큼은 간섭 과정도 더없이 익숙했기에 신속한 발현이 가능했다.

‘하도 많이 써먹었어야지, 계단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지난날.

왜, 겉만 그럴싸했던 내가 아니던가.

최대한 많은 경험치를 얻기 위해선 처치 기여도가 필요했었으니까.

계단으로 적잖은 처치 기여도를 습득했었지.

‘하르콘 덕분에 쏠쏠했지.’

역시 옛말에 틀린 게 없다.

고생은 젊을 때 해야 한다고.

그때의 구질구질함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던전의 구조를 멋대로 뜯어고치며 떠오르는 계단.

‘이젠 아찔한 풍경도 익숙하고.’

발아래로 보이는 풍경은 아득했지만.

마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도 마탑 최상층에서 내려올 땐 오금이 저릴 정도라니까?

‘그나저나 저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떠올랐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도달한 곳은 [B1-로비]였다.

아지트라고 해서 살풍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로비를 지키는 직원이 보였거든.

“이호열 플레이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온 나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아니, 그럴 만도 한가.

어쨌든, 나는 곧장 용건을 전달했다.

“나는 레이먼 션과 만나길 원한다.”

의외로 곧장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로비로 이동하시는 중이십니다.”

제 발로 마중을 나온다라.

찾아 나설 수고는 덜었네.

그럼 기다리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이라도 돌려볼까.

확실한 건 레이먼 션과는 말을 섞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부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그 변명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아르카나로 돌아갈 수 있는 정보까지도.’

물론, 순순히 정보를 내뱉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균열 입구에서부터 장난질하던 거 보면 알 수 있잖아?

띵─

이내, 도착한 엘리베이터.

나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자.

그쪽도 함께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보자고, 레이먼 션.

물론, 그랑펠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선에서 말이야.

*

흘러가는 시간.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박민재와 윤수겸,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실물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레이먼 션, 실제로 봐도 사진과 똑같이 생겼나요? 그 뭐랄까, 이미지만 생각하면 의외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는단 거지?”

“아, 넵.”

“그래, 행보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난한 페이스니까.”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

동시에 대격변의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그런 것치고 레이먼 션은 지나치게 인상이 좋았다.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야 사회에서 흔하지. 물론,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적당한 내숭과 연기는 각박한 사회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법이니까. 다만.”

박민재는 혀를 내둘렀다.

“그 자식은 그런 수준이 아니야.”

사회에서 악착같이 구르며 별별 인간군상을 봐왔다고 자신하는 박민재였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레이먼 션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이 섞이지 않는 느낌이랄까? 분명 같은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긴 한데. 뭔가 불쾌할 정도로 이질적이었거든.”

……잠깐만.

그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알 것 같았다.

박민재가 탁! 하고 무릎을 쳤다.

“그래! 그 자식,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

*

데구르르─

레이먼 션의 머리통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겠구나.

친절하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변신마법.

폴리모프를 덧씌운 마네킹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로비를 목격한 순간, 짐작하고 있던 가능성이었다.

왜, 내게 인사를 건네왔던 직원을 보고 알아차렸거든.

가짜라는 것을.

이 개수작을 간파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탑주의 영향이 컸다.

‘그 고양이가 도움이 되는 날도 있네.’

한번이라도 목격한 마법은 완벽하게 이해한다.

그랑펠의 천재적인 재능이 탑주의 변신마법을 어디 감상만 하고 넘어갔으랴. 탐색, 간섭, 발현. 구조 또한 완벽하게 파악했으니, 간파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꼭 그게 아니었어도.’

직원의 반응만 봐도 낌새가 느껴지긴 했다.

천장을 부수는 것도 모자라서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굳이 마법으로 계단을 발현하며 내려오는 인간을 보고 경악하지 않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왜,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칭 레이먼 션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는데.

직원에게 놀라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저것도 레이먼 션처럼 폴리모프를 뒤집어쓴 가짜라는 거지.

나는 읊조렸다.

“허나, 그것이 긍지를 품지 못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랑펠의 긍지론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거든.

하다못해 녹차 티백에서도 긍지의 유무를 따지는 그랑펠이란 말이다. 단순하게 인형이라서, 가짜라서 긍지가 없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태연하게 이어서 내뱉는 독설.

“그저 그대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뿐이겠지.”

쉽게 말해 가정 교육 잘못시켰단 뜻이다, 레이먼 션.

그보다 이런 걸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으면 오산이다.

어디에 숨어서 가짜를 내세운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이 어디 있는지는.

이제부터 천천히 찾으면 되는 거거든.

진짜 던전을 공략하듯 말이야.

콰드드득─

귀찮지 않느냐고?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참이었거든.

대격변이라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에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러 놓고서는.

대체 이런 곳에 처박혀서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또각─

내려가는 계단.

뒤바뀌는 시야.

떠오르는 메시지.

[B2-실험실에 진입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끄럽게 울리는 경고음.

그래, 괜히 던전 균열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몬스터가 등장하니까 던전 균열이었겠지.

[프로토타입 모델 E-89 : Lv.1,000]…….

아지트의 경비병들답게 레벨 한번 화려하시다. 일반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일천(一千) 레벨이라, 여태껏 마주친 몬스터 중 최고 수준이다.

그런 마네킹들이 무려 수백 개.

‘옛날 같았으면 바짝 쫄았겠지.’

하지만 경험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축적된다.

레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객관적으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법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겠는데.’

아지트라고 진짜 제집 안방처럼 생각하면 착각이지.

지하(地下).

광물에 광범위하게 탐색할 수 있는 내게도.

이런 땅속은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다.

프로토타입.

이름에 걸맞게 만들다가 만 기계인형들이 삐걱거리며 다가온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마력의 효율 따위엔 개의치 않는다.

육체에서 일렁이는 마력.

“이제는 단체 환영인사인가.”

으드득─!

그러자 곳곳에서 무너지는 마네킹들.

저것들이 현실에서 만들어진 건지.

아르카나 대륙에서 만들어진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광물이라는 것이 핵심이니까.

“그러나 이 또한.”

또각─

나는 변함없는 속도로 계단을 거닐며 마법을 발현했다.

그런 내게 달려드는 순서대로.

프로토타입들이 무너져 간다.

“거절하마.”

털썩!

마치 나의 출입을 숭배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물론, 이게 끝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어떤 수준인지는.

아르카나를 지금껏 운영한 그쪽이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고작해야 몬스터 따위로.

날 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을 터.

나의 물음에 답하듯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 루트 선택]

침입자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두 개의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

─B401-심층실험실 (선택)

─B402-심층실험실 (선택)

심층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건가.

내려갈수록 더욱 복잡한 구조로 이뤄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퀘스트를 들이밀다니.

‘어울리는 방법이네.’

현시점에서 아르카나의 유일한 운영자.

그런 레이먼 션의 가장 큰 무기는 시스템이겠지.

어쩌면 레이먼 션과 플레이어는 극상성의 천적 관계일지도 모른다. 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가 운영자에겐 꼼짝 못 했던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야.

나도 그런 플레이어 중 하나지만.

예전부터 입에 달고 산 말이 하나 있었거든.

레벨도 스탯도 모든 건 숫자에 불과하다고.

나는 몰라도, 그랑펠은 처음부터 계속 시스템 불신론자나 다름없었으니까. 레이먼 션, 그쪽이 시스템을 들이민다고 하더라도 대답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숫자가 글자가 되면 무언가 바뀌리라 여긴 것인가.”

물론, 쏟아내는 독설도 한결같았으니.

“실로 어리석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레이먼 션.

그쪽과 나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다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일단 한 방을 먹여주고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다고.

당연하게도 선택지 따윈 고르지 않는다.

“길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그보다 그쪽의 패를 구경했으니.

나도 나의 패를, ‘믿을 구석’을 보여줘야겠지.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뻗었다.

꺼내 든 것은 [지옥의 횃불].

레이먼 션, 그가 어떤 의도로 대격변을 일으킨 건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니 확실한 죄목으로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랑펠의 복잡하고도 무거운 긍지였으니까.

그러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가?”

내 물음에 화답하듯.

거칠게 타오르는 지옥의 횃불.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그대를 위한 전장이다.”

──────

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

레이먼 션.

그쪽이 구경거리로 만들었던.

걸출한 경력직 신입 나가신다.

“셰그윈.”

[검성, 셰그윈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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