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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29화 (229/489)

◈ 229화. 파멸의 주둥아리 (1)

깃털펜을 내려놓은 마르셀로는 한숨을 돌렸다.

“진심으로 쉽지 않습니다, 경.”

이론마법학.

현존하는 모든 마법을 이론으로 정리할 수 있는 개념. 그러나 호열이 창시한 『반전마법』만큼은 이론의 틀에 쉽사리 잡혀 들지 않았다.

“어제부터 꼬박 붙잡고 있는데 말입니다.”

마르셀로는 수석의 업무를 잠시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반전마법의 정리에 매료됐다고 하더라도.

수석의 업무를 외면하는 건 마르셀로에겐 있을 수 없는 일.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역시 깨어나신 모습이 보기 좋군요.”

그래, 마탑엔 탑주가 돌아왔으니까.

마르셀로는 자신의 빈자리를 탑주에게 맡겼다.

누군가는 하극상이 아니냐고 묻겠지.

정작, 탑주부터가 업무는 뒤로 미뤄둔 채.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나는 너를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꼬마 수석.”

탑주는 고양이 몸을 축 늘어트린 채.

혓바닥으로 털을 핥았다.

그 행색이 게으르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부상자다. 아직도 폭주했던 날 입었던 내상이 치유되지 않았단 말이다. 으윽, 지금도 관절 곳곳이 쑤신다. 동물 학대를 삼가라, 수석 꼬마.”

내뱉는 말과 다르게.

숨길 수 없는 꼬리의 살랑거림.

누워서 꼬리만 흔드는 탑주에겐 정말로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나.’

마르셀로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썼다.

“호열 경의 말씀에 따르면.”

“……?”

“모험가들의 세계에는 그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바로 호열의 말을 인용하는 것.

바짝!

탑주의 꼬리가 곧 뻣뻣하게 굳더니 말했다.

“뭐라? 나를 굶기겠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탑주님을 굶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경께서 제게 기이의 발현을 지도해 주신 지금. 저 또한 기이의 사용에 능숙해졌다는 겁니다.”

“그, 그건……!”

마르셀로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이었다.

『마탑』에서 [과학]의 산물을 사용하면 그것이 바로 기이다.

호열의 궤변에 전염된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십니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집무실 앞으로 물건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마력을 소모하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냐?”

탑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시와 함께하면서도 본 적이 없던 사용법이기 때문이었다.

뭐, 신기하긴 하다만.

“그게 밥을 굶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뾰족─

탑주가 귀를 세운 순간.

마르셀로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인기 고양이 간식.”

“……간식?”

“혹시, 츄릅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드륵─

고위 변신마법일수록 변신한 대상의 성질을 온전히 띠는 법.

탑주는 본능에 따라서.

풍겨오는 냄새에 콧잔등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엇이냐?”

그렇다.

마르셀로가 서랍에서 꺼내 든 건 길쭉한 막대.

기이, 로켓 배송으로 주문한 가다랑어 맛 츄릅이었다.

호다닥!

본능에 이끌린 탑주가 마르셀로에게 달려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시한부의 저주 해금.

덕분에 쌩쌩한 체력을 되찾은 마르셀로가 한낱 고양이에게 츄릅을 빼앗길 리 있으랴.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면 일하겠다.”

“탑주께선 아직 일하지 않은 자이십니다.”

“……냐아.”

본능을 이길 순 없는 법.

꾸욱─

꾹─

꾸욱─

결국, 탑주는 양피지에 고양이 발바닥을 찍을 수밖에 없었으니.

마르셀로는 다시금 깃털펜을 쥐고선 반전마법을 정리해 나갔다.

‘보다시피 마탑은 우려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경.’

짧디짧은.

일주일의 휴식.

부디, 원하시는 바를 찾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

.

유스라.

황금 궁전.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는 구슬땀을 훔쳤다.

늦게 붙잡은 검이지만, 자신도 소질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루에 하나씩, 주고받는 합의 수가 늘어났으니까.

하쿠나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더 정진하면 제 몫을 해낼 수 있겠지.’

나 또한 은인께 도움이 되어야 한다.

하쿠나는 다짐하며 휴식하던 도중.

수련을 돕던 하르콘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은인께서 마탑에서도 자리를 비우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분명, 마탑의 업무로 분주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호열은 유스라 왕국, 자신에게도 휴식의 뜻을 전해왔었으니까.

물론, 그 기간은 일주일로 극히 짧았다.

그러나 전례가 없던 일이라는 게 의미가 컸다.

하르콘은 검을 손질하며 생각했다.

‘역시, 무언가가 있는 거겠군. 경.’

마왕성에서 느꼈던 호열의 성난 기백.

그건 하르콘에게도 낯설 정도였다.

그렇기에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경과 클라우디에 얽힌 무언가가.’

하르콘은 이곳에 떨어진 상황이 안타까웠다.

만약, 이곳이 아르카나 대륙이었다면.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으로 달려가 폐하께 전황의 서고.

그 출입의 허가를 받아냈을 터였다.

『전황의 서고』.

제국을 지탱해 온 지식의 성소(聖所).

그곳엔 가히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가 그대로 잠들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연하게도 클라우디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호열이 클라우디에 품은 의문이 있다면, 그 의문에 대한 해답까지 들을 수 있었을거늘.

탄식을 삼키던 때 하쿠나가 말을 이었다.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역시나 괴로운 일이군요.”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강해져야겠지요.”

하쿠나는 주먹을 쥐었다.

이제야 과거를 극복하고 검을 바로 쥐기 시작한 자신이다.

당장 악마들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원정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은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나 또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안타까워할 시간조차 아껴야 했다.

하쿠나가 검을 쥐었다.

“하르콘, 계속해서 단련을 부탁하겠습니다.”

“의욕이 넘치시는군요.”

“언제까지 신세만 지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이런, 제가 할 말을 하시는군요.”

챙─

같은 뜻을 품은 검이 맞부딪혔다.

*

마탑도 모자라 유스라 왕국에도 휴직계 제출.

뜬금없이 휴직계를 쓴 이유가 있냐고?

뭐긴 뭐야, 업무보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지.

그랬다.

스칼이 나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가 반짝거린다면서!

드래곤과 클라우디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스칼의 퀘스트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휘갈기는 것도, 유스라 왕국의 면면을 살피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이건 긴급상황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나저나…….’

걷혀가는 포탈의 빛 무리.

나는 드러나는 스칼의 저택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첫 만남 때부터 과한 귀족 말투를 사용한다 싶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취향이 상당히 고상한 거 아니야?

‘큰 건 둘째 치고 지나치게 고풍스러운데?’

마당에서부터 웬 조각상이 이렇게 많아?

그것도 보통 조각상이 아니었다.

그랑펠의 입에서 독설이 튀어나오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훌륭하군.”

그걸 넘어서 칭찬이 나왔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조각상 하나하나가 전부 인류 역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뜻.

랭킹 1위로 벌어들인 돈을 전부 이런 데에다가 쓴 건가.

속물적인 생각에 빠져있기도 잠시,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웬 말발굽 소린가 싶었는데, 스칼이었다.

“제가 가면 되는 일인데 송구하옵니다, 호열 경!”

저저, 사극보다 더한 말투.

역시나, 플레이어에게 경 소리를 듣는 건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허나, 이 철면피에 감정 변화가 나타날 리가 있나.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우려할 것 없다. 나쁘지 않은 감상이었다.”

다짜고짜 조각상을 평가하기도 잠깐.

스칼이 곧장 말에서 내려 나를 안내했다.

저택의 안은 더욱 웅장했다.

무엇보다 초상화들이 잔뜩 걸려있는 게.

진짜 귀족의 저택이 따로 없었으니까.

‘당연히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야 하는데…….’

이놈의 격식이 참 대단하긴 하군.

이런 대저택을 편안한 것도 모자라서.

익숙하게 느낀다는 것부터가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진짜.

어쨌거나 잡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말했다시피 일주일짜리 휴직계를 내면서.

심지어는 스칼의 저택을 방문하면서까지.

달려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호열 경께서는 믿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셨는데, 송구합니다.”

“그 점에 관해선 사과할 것 없네.”

“이해해 주셔서 망극합니다. 그럼 용건을 전하겠습니다.”

……나야말로.

그 말투에 망극해서 혼절할 것 같았거늘.

스칼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노룡이 주도했다던 전룡소집이 끝났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4배가량 빠르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들.

지금쯤이면 대충 이야기가 끝났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그게…… 우선, 퀘스트 목표부터 공유하겠습니다!”

나는 갱신된 퀘스트 목표를 보고 흠칫했다.

드래곤.

그 양반들 대체 모여서 무슨 짓을 했길래…….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실패)

─죽어가는 노룡, 유낙서스와 조우하라. (진행 중)

‘갑자기 유낙서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건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유낙서스는 하이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콧잔등에 올라탄 하이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지켜보던 나에게까지 텔레파시를 전해왔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모든 건 어머니의 뜻이니까.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명이여.”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없다고.

유낙서스, 그쪽도 뱉은 말을 지키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전룡소집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대는 기어코 뜻을 굽히지 않았군.”

나도 뱉은 말은 지키다 못해서.

기어코 실현하는 주의라 말이야.

유낙서스가 전해 온 텔레파시를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읊조렸었다.

-“세계수의 뜻이라니. 착각이 지나치군.”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대화가 필요하겠군, 유낙서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스칼을 바라봤다.

스칼은 안절부절못하고 덜덜 다리를 떨고 있다.

“안 되는데. 내가 탈 드래곤이 한 마리 줄어드는 건데…….”

……걱정의 방향성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스칼에게 선언했다.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어째 내가 퀘스트를 가로채는 꼴이 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스칼, 그대에게는 양해를 구하겠다.”

“경께서 제게 양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유낙서스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

“유낙서스……. 혹시 그게 노룡의 이름입니까?”

“그렇다.”

“!”

놀랐구나?

내가 퀘스트에 명시된 노룡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야. 나도 사실 [마안의 망원경]으로 대륙을 엿보다가 알게 된 것뿐인데…….

과대평가는 굳이 정정하지 않는 그랑펠이었으니.

“역시, 아득하게 앞서나가고 계셨군요.”

스칼이 한껏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해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하지만 내가 무어라 위로할 새도 없이 스칼은 입을 열었다.

“사실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는데, 각오한 거 맞아?

“역시, 긍지에 관련된 일이시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용기사 이름값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저는 굉장히 슬프겠지만…….”

뭘 그렇게 걱정 하나 했더니만.

드래곤에 탑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거였어?

사고방식 한번 직선적이다, 스칼.

“사실 드래곤과 마주하긴 한참 이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억지를 부려서 호열 경을 따라나선다고 하더라도 방해만 되겠죠. 제 클래스 퀘스트가 갑작스럽게 진행된 것도 호열 경 덕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스칼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부족한 저를 대신해서 유낙서스와 조우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 경이라면 믿고 드래곤을 맡길 수……. 있습니다.”

늘어진 말꼬리에서 고뇌가 전해져 오는군.

그럼에도 이해해 줘서 고맙다, 스칼.

고마우니까 질문에 답변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그런데, 유낙서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은 없는데…….”

고마워서라도 시원하게 답해주고 싶었는데.

사실 나도 아직 잘 모르거든.

하지만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현하고야 마는.

우리 그랑펠 님께서 선언하지 않으셨던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대가 우려할 것은 없다.”

누구는 걱정이 앞서는데, 말은 참 잘한다.

‘나로서는 가도 문제, 안 가도 문제니까.’

가자니 클라우디 가문이 걸리고.

안 가자니 유낙서스가 걸리고.

결국, 결과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겠지.

‘방법을 찾아내면 가는 걸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방법.

그 방법을 탐색하는 것 또한 휴직계를 제출한 이유 중 하나였으니.

나는 이제부터 전력을 다해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안드라스가 드롭한 마왕의 전리품을 정화하는 것부터 시작할까?

‘[만.통.지] 같은 효과가 또 있을지 누가 알아?’

악마의 아이템을 정화하기 위해선.

악마가 필요한 법.

간만에 악마 사냥꾼 본업에 집중해야겠군.

“이런, 마음이 급해 격식을 간과했습니다. 어떻게 홍차라도……?”

“거절하지.”

“헉.”

오해는 하지 마라, 스칼.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순하게 홍차가 싫어서다.

‘녹차라면 넙죽 받아 마셨을걸.’

내가 스칼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위잉─

별안간 진동이 느껴졌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의 메시지.

어떻게 보면 직장 동료의 문자려나.

그러고 생각해 보니까 AAU엔 휴직계를 제출하지 않았군.

‘하도 젊어진 게 많아야지.’

규율에는 누구보다 엄격한 그랑펠이 아니던가?

아무리 바쁘다고 하더라도.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의 역할은 또 수행해야겠지.

문자를 확인한 나는 우두커니 멈춰서고 말았다.

……진심으로 파멸의 주둥아리가 따로 없구나.

그랑펠 가라사대.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가겠다 말하니.

-레이먼 션이 이호열 총책임자님께 메시지를……!

……행방불명되었던 레이먼 션이 돌아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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