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말하지 않았던가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선택)
스칼의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
거기엔 분명 ‘위대한 가문’이라는.
굉장히 찝찝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어디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하나뿐이겠냐고. 클라우디 가문이 실존할 리가 없다면서. 지금 생각해 봐도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미친.’
필사적으로 부정했던 일말의 가능성이.
아무래도 현실인 것 같았다.
짚이는 순간은 그때밖에 없었으니까.
바로 그날.
‘빗자루를 탄 초월자.’
그녀가 클라우디란 이름을 꺼냈다고 가정하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
유낙서스가 난데없이 위대한 가문을 언급한 이유도.
식탐이 클라우디라는 이름을 들먹인 이유도.
마지막으로.
‘그 난장판이 정리된 것도.’
……존경스럽다, 중2병 시절의 호열아.
너는 대체 어떤 상상을 하고 산 거니?
대체 어떤 설정을 가져다가 붙였길래.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드래곤이 전원소집 해서 회의를 하고, 마왕도 모자라서 거악이 움직이게 하고, 엘프랑 초월자도 발길을 돌리게 한 건데……!!’
흔한 드라마 스토리가 떠오른다.
재벌가의 숨겨진 자식으로 밝혀져 상속자가 되었다는 스토리.
넓게 보면 나도 그런 꼴이 아닐까?
그런데, 진심으로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진땀을 흘리기에 바빴으니까.
‘그랑펠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클라우디 가문이 실존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
지금만 하더라도 악크샨 최후 생존자의 긍지, 마탑 수석의 긍지,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의 긍지, 딸부잣집 막내아들의 긍지……. 하여튼 온갖 긍지에 시달리는 나란 말이다.
거기에다가.
몰락한 클라우디 가주의 긍지까지 더해진다고?
진짜 적당히 좀 짊어지자, 그랑펠!
‘흑역사는 제발 그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선 그랑펠과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
“과연, 어리석구나.”
그건 마왕, 안드라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왕을 쥐고 흔든 식탐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얄팍한 수로 과거를 엿보려고 한 것인가.”
식탐, 거악답게 영악했다.
하지만 악마 사냥꾼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악마의 본성이다.
식탐, 녀석은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을 거다.
태생적으로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족속이니까, 악마는.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말도 믿지 않았겠지.’
그래서 마왕을 앞세운 것이다.
클라우디라는 이름을 떠들게 해서는.
쉽게 말해서 미끼를 던졌단 뜻이다.
그러나.
“열등한 족속이 엿볼 수 있는 과거가 아니다.”
내가 과거를, 흑역사를 순순히 인정할 거 같냐?
조금이라도 보여줄 것 같아?
게다가 한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그랑펠이다.
그런 그랑펠의 입으로 선언했었단 말이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
두 눈으로.
클라우디 가문이 실존했다는 증거를 목격할 때까지.
설령 드래곤이 호들갑을 떤다고 하더라도.
엘프에 초월자에 거악까지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절대 믿지 않겠노라고.
안드라스가 부리를 연다.
“본좌는, 나는, 저는 그저…….”
구마의식 속에서 악마의 감각은 온전하지 않다.
하찮은 마법도 아주 거창하게 본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안드라스는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참고로 나는 적잖이 화가 난 상태다.’
이번만큼은 그랑펠의 항상심(恒常心)도 더더욱 칼 같을 수밖에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다. 클라우디 가문, 그건 진위와 실존 여부를 떠나서.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결코, 가볍게 들먹여서는 안 될 이야기였으니까.
“다물어라.”
외관으로는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평소보다 거칠게 넘실거리는 이질적인 마력을 보면.
그랑펠의 심정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감이다, 안드라스.
마왕.
무려 888레벨의 악마족 보스 몬스터.
그러나 귀철에 피를 묻힐 필요도.
거창한 마법을 발현할 수고도 없다.
이질적인 마력만으로 안드라스를 질식시킬 만큼.
나는 성장했으니까.
간만의 재회라 잊고 있었나 본데.
천적관계는 그런 거거든.
[마왕, 안드라스에게 ‘절명’이 발생합니다.]
나는 냉랭히 말했다.
“용서는 지옥에서 빌어라.”
물론, 나한테 빌라는 게 아니다.
네가 짓밟아온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에게 빌라는 거다.
뭐,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널 얌전히 놔둘진 모르겠다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마왕, 안드라스는 일찌감치 처치된 상황.
성전 연합군이 마지막 마왕군 잔당을 처리하는 순간.
플레이어들의 시야에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갈등의 마왕성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메시지.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광폭화 해제, 이성을 되찾은 남태민이 말했다.
“역시, 먼저 끝내셨구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호열이 그동안 쓰러트린 몬스터, 클리어한 균열의 적정 레벨을 생각하면 안드라스는 난적에 속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섬뜩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열 씨, 기척이 평소와 달랐어.’
짐승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야성.
덕분에 남태민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호열의 감정이 미세하게나마 거칠어졌다고.
물론, 거칠어졌다는 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긁적거리는 머리.
“우리 바바리안 사이에선 칭찬이니까…….”
어쨌든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전투에서?’
앞서 말했던 대로.
안드라스보다 더한 적과 상황을 직면했던 호열이었다.
프로스트 탈환전만 하더라도 목숨을 잃은 프로스트의 주민들을 셀 수 없이 목격했다. 심지어 그 시신들을 수습하기까지 했었지.
고심하던 남태민이 중얼거렸다.
“……클라우디라고 했나?”
결국, 평소와 달랐던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악마들이 외치던 뜻 모를 단어.
아마도 호열 씨는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있으신 거겠지.
그 단어에 민감하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신 건지도 모른다.
남태민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호열에게 동료로 인정받아 기뻐했거늘.
매번 신세만 지고 있지.
정작 호열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뭐가 주고받음이냐, 진짜.”
이래서야 뭐가 동료냐.
짐짝이지.
축 처진 남태민의 어깨.
그런 남태민에게 히사기가 입을 열었다.
“처량한 척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 말씀을 잊으신 겁니까?”
히사기는 뺨의 상처를 지혈하며 말을 이었다.
“부족함을 깨달았다면 극복하면 되는 일이다.”
“……!”
“저희에겐 극복할 시간도 급급하지 않았던가요?”
“대찬성.”
레오니가 광전사답게 피를 뒤집어쓴 채로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남태민을 훑다가 말을 이었다.
“쯧, 내가 그 덩치였으면 벌써 700렙은 찍었다.”
“뭔 소리야, 뜬금없이?”
“벌써부터 어깨 늘어트리고 있지 말란 말이야.”
척─
레오니가 고개를 치켜든다.
그 시선을 따라 치켜든 곳엔 헬리콥터가, 카메라가 자신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제야 자각한 남태민이 서둘러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복화술로 말했다.
“너, 언제 철들었냐?”
“뭐래. 닥쳐.”
“그나저나 갈수록 대단하게 느껴진다, 호열 씨는.”
고작 자신만 하더라도.
쏟아지는 관심에 가끔씩 부담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호열에게 쏟아지는 부담감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삼스럽게 깨달았기에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제야 좀 인간적이시네.”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그런 게 있어.”
“아씨, 이거 또 혼자 똥폼 잡고.”
“후우. 호열 씨 말하는 거다. 됐냐?”
“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호열이 휩쓸고 간 마왕성을 둘러보며 침묵에 빠진 세 사람.
그들에게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저, 감동적인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한데 말이야.
거대 연합의 분석관, 남철민의 목소리였다.
“어, 형. 듣고 있어. 무슨 일인데?”
-그게 호열 씨 이야기인데…….
“호열 씨?! 그래서 호열 씨 지금 어디 계셔?!”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긴 아직 부족하더라도.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말동무 역할은 얼마든지 자처할 수 있었다.
클라우디에 어떤 사연이 얽혀있다고 한들.
얼마든지 경청하고 공감할 자신이 있다는 뜻.
물론,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호열 씨, 그냥 마탑에 복귀하셨다는데?
“뭐, 뭐어어어?!”
-그, 언제나처럼 꼿꼿하게 학회 마무리 중이시래.
‘……나, 괜히 오버한 건가?’
‘하씨, 나 진짜 똥촉인가?’
‘전부 주제넘은 착각이었단 말입니까?’
순간.
할 말은 잃은 세 사람.
남철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인간적이시라는 말은 취소.”
그저 호멘이었다…….
*
역시,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군.
점멸하는 메시지.
[퀘스트 : 학파 창시]
고고한 마법적 성취를 이룩한 그대여.
정기 학회에서 그대의 성취를 증명하고.
새로운 마법의 창시를 알려라.
─정기 학회에서 ‘반전 마법’을 발표하라. (성공)
나는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마탑으로는 언제 복귀한 거냐고?
놀랍게도 안드라스를 처치한 직후다.
그래, 강박적인 일 중독이라는 거지.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마탑과의 관계도가 상승했습니다.]
[마탑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했습니다.]
“그대들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마탑.
마탑에서의 [권한] 기능 활성화는 아직인가보군.
탑주의 자리엔 관심이 없는 나였지만.
‘이번 발표로 탑주 자격은 갖췄을 텐데.’
탑주라도 해도 마탑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다는 뜻이겠지.
하긴 그 고양이도 마탑의 규율에서 자유롭진 않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또 한 번 다짐하겠다.
훗날.
마탑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더라도.
나는 탑주 자리는 절대 떠맡을 생각 없다고.
‘진짜 벅차다. 이젠.’
여태까지는 그래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클라우디를 직면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다른 건 다 긍지로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빌어먹을 이름이……!
세상에 떠벌려지는 현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부디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내 두 눈으로.’
클라우디의 증거를 확인하는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래, 그날이 온다면.
그랑펠의 입방정을 막을 명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왜, 지금쯤 아르카나 대륙에선 클라우디에 관한 소문이 떠돌고 있겠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단절된 상황에 감사하게 되는 건 또 처음이구나.
‘현실로 넘어오는 소식 정도야.’
마왕, 안드라스를 처치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차단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드래곤들이 클라우디 때문에 전원 집결했다는 게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들이 내게 호의적일지, 적대적일지 알 순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드래곤하고 충돌하는 건 좀 그렇지……?’
혹시라도 드래곤과 마주할 일이 생긴다면, 세계수 족보의 막내라는 걸 들먹여서라도 잘 설득해 보자.
내가 또 막내짓엔 익숙하거든.
나는 기왕 상태창을 띄운 김에 마왕성 클리어의 성과도 확인했다.
[레벨: 621]
[능력치]
근력 : 142 / 민첩 : 139 / 마력 : 51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20]
그래도 보스 몬스터 레벨값은 하네.
내 앞에서도 똑바로 말하던 게 괜한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600레벨의 벽을 고려하고도 20레벨이 단번에 상승했을 줄이야.
“한낱 수치에 기뻐할 필요는 없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너는 수치사하지 않은 것에나 기뻐하고 있어라, 그랑펠.’
근본적인 능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들.
레벨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또 아니니까.
뭣보다 700레벨은 찍어야지.
‘이놈의 재킷.’
어깨에 걸쳐서 펄럭거리는 이거.
암만 그래도 팔은 끼워봐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 호화스러운 여명 세트의 효과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설정대로.
지껄인 말은 빠짐없이 주워 담는구나.
왜, 사이렌의 축복으로 천운이 따르던 그날.
나는 그렇게 지껄였었다.
-“나는 행운 따위 믿지 않는다.”
상승한 행운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위기를 넘겼으면서 뻔뻔하기 그지없다고.
그랑펠에게 태클을 걸던 나였다.
그런데.
클라우디의 이름으로.
그 난장판을 정리한 게 사실이라면…….
-“행운도 운명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그건 더 이상 헛소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말조심 좀 하는 게 좋겠군.
나는 녹차 티백이 잠긴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달칵─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입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티타임의 소중함이 와닿는다.
그런데, 녹차를 한 모금 넘기기 무섭게.
이놈의 주둥이가 말을 내뱉는다.
“허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아니, 간과하고 말고.
생각을 좀 하고 내뱉자니까?!
그것도 싫다면 숨이라도 돌리고 말을 하든가!
그러나 애원이 무색하게도 나는 지껄이고 말았으니.
“다들, 기다리고 있거라.”
진짜로.
“내가 대륙으로 돌아가겠다.”
내가 제 명에 못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