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27화 (227/489)

◈ 227화. 직면하다

총대장 호열의 합세.

마지막 민간인까지 안전하게 구출.

그리고 진격.

극도로 사기가 치솟은 성전 연합군에게 물러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능수능란하게 전장을 휘젓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여신교단 성기사들. 그들이 선봉에서 길을 열자 플레이어들이 가세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거다!”

“자식들이 어디를 넘보려고!”

“얌전하게 마왕성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울프는 맹렬한 돌진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시네, 우리 총대장님.”

그림자 용병단이야 워낙 제멋대로니까 예외라고 치더라도.

누군가를 통솔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장?

충성심의 약효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성전은 달랐다.

“이건 통솔력 수준이 아니신데요.”

통솔, 그 이상의 단계.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의를 불사르고 있었다.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한들.

부상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장이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이들조차 물러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칫, 이제야 빚을 덜어낸 기분인데.”

항상 말씀하시는 긍지라는 거겠지.

울프는 쓰게 웃었다.

긍지라, 영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았으니.

그러나 말석, 락키드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비켜. 비켜. 그 새끼는 내가 맡는다!”

언뜻 보면 공적에 미쳐서는 막무가내로 날뛰는 것처럼 보였지만.

울프의 예리한 눈은 락키드가 밀쳐낸 모험가를 살폈다.

락키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졌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꽤 물렁해졌는데, 락키드.’

락키드, 자신도 호되게 상처를 입어봤기에 부상자를 배려하는 건지.

말석이라 때가 덜 묻은 건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긍지라는 걸 가슴에 품게 된 건지.

알 방법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믿을 수 없는 일이군,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겠지?”

울프의 사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철컥─

푸슉─

쏟아지는 적만큼 쏟아내는 석궁의 볼트.

설령 긍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용병이다.

이유 불문, 고용주의 뜻에 따라 밥값은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뜻.

“돌격!”

이윽고 성전 연합군이 마왕성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진격을 막기 위해 악마들 또한 결사항전을 해오리라.

각오했던 바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뭔데?”

고함이 가득하던 마왕성에 정적이 찾아온 것.

선두에서 지휘하던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전원 정지!”

악마가 자취를 감춘 건 아니었다.

연합군은 코앞에서 마왕의 대군과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건 저들의 반응이었다.

하르콘이 다시금 확인하듯 외쳤다.

“아군에 마법사가 없는 게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절 빼면 없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슬그머니.

스태프를 들어 올린 핌비를 제외하면 마법사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저들이 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고 있게 한 것인가.”

“!!!”

하르콘의 말대로였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툭─

투둑─

덜덜덜─

악마들은 들고 있던 무기도 방패도 떨어트리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고함은커녕 캑캑거리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하나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단장님……?”

예시카가 하르콘의 의견을 구했다.

상대가 악마이니만큼 방심은 금물이다.

원칙대로라면 저들이 무너진 틈을 타서 신속하게 승부를 내야 했다.

“전원 대기.”

그러나 이건 하르콘조차 경험하지 못한 이질적인 전장이었다.

아르카나인의 상식은 물론.

플레이어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레오니가 입을 열었다.

“고, 고작 한둘이 아니잖아?!”

수만.

정확하게는 칠만(七萬)이었다.

네임드 몬스터, 악마 군단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악마가 패닉에 빠져서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칼날보다도 두려운 ‘무언가’에 파랗게 질려서는.

히사기가 치솟은 성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또한 호열 님의 능력일까요…….”

짐작할 가능성은 그뿐이었다.

히사기의 지식 속에서.

칠만의 악마를 두려움에 떨게 할 존재는 단 한 명.

호열밖에 없었으니까.

허나, 그렇다면…….

“느끼고 계신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평상시의 호열이 언제나 한결같았다면.

지금의 호열에게선 고요한 분노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악마들이 행한 행동을 되짚어본다면.

정기 학회를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민간인들을 위험에 빠트린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격식에 어긋나게 고성방가.

클라우디라는 뜻 모를 단어를 외친 것도 빼놓을 수 없겠지.

히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을 저 또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또한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츠릉─

히사기가 창을 끌며 나아갔다.

“연합군이 자비를 베풀 대상은 악마가 아닙니다.”

실눈을 뜬 채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창.

그런 히사기를 시작으로.

멈췄던 이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열 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경……!.’

‘한눈팔지 마,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

호열과 마왕이 마주했을 성채를 애써 외면한 채로.

.

.

.

마탑.

크리스탈 홀.

역시나 벤쉬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 저건 또 뭐죠?! 나스로우, 당신 분야 아닙니까?”

악마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고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환각마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스로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얼핏 보면 환각마법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

“결코 환각마법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어째섭니까? 나스로우 선임 정도면 저런 환각마법 발현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환각마법의 신동이었잖아요, 당신!”

“벤쉬 선임, 그대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십시오.”

“……엥, 내가 했던 말이요?”

“그대가 내뱉었던 환각마법에 관한 평가 말입니다.”

워낙 지껄인 말이 많은 벤쉬였다.

환각마법에 관한 평가라…….

분명, 뭔가 정곡을 찌르는 평가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벤쉬가 고심하자 나스로우가 제 입으로 말했다.

“쓸데없이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

“……아니,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스로우의 말엔 뼈가 있었다.

속성마법 중에서도 최악의 마력 효율을 자랑하는 화염마법학. 그런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게 적잖이 어이가 없던 덕분이었다.

벤쉬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때는 제가 철이 조금 없어서…….”

“사과를 받고자 한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말씀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탓.

본의 아니게 눈치가 빨라진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이 말을 이었다.

“정말 환각마법이 아니라는……?”

나스로우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건 환각마법이 아닙니다. 마력량이나 발현력을 떠나서, 마법적으로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장담하건대 제아무리 이호열 수석님이시라고 하더라도…….”

나스로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반짝이는 뱅그릿의 동공.

마력 감응력만큼 마력을 포착하는 시야 또한 뛰어난 그였다.

“일대에 눈에 띄는 마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수만의 악마를 속이는 환각마법이었다면.

마왕성 일대에는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이 흐르고 있었을 테니까.

마르셀로가 고양이를, 탑주를 바라봤다.

‘탑주님의 육체가 발현했던 환각마법처럼.’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마르셀로.

심지어는 뒷발로 머리를 긁어대는 탑주조차도.

저 기현상의 원인을 짐작하지 못하던 순간이었다.

오직 마티스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흑마법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질적인 마력에 감응하는 마도구.

반지는 검게 물들다 못해 금이 간 상태였다.

마티스는 다시금 실감했다.

‘직접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님에도.’

단순하게 마법으로 투영된 허상을 보고 있는 것뿐이었거늘.

측정불가 수준의 이질적인 마력이 마도구를 망가트린 것.

마티스는 침음을 삼켰다.

‘경, 당신께서는 도대체…….’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되는 이질적인 마력이다.

‘어떤 과거를 겪으신 것입니까?’

마티스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짐작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흑마도학을 정립한 창시자이니만큼 이질적인 마력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티스였으니까. 그러니까 단지 우려할 뿐이었다.

‘만약, 그 과거가 역류한다면.’

그로 인해 경께서 『흑화』하신다면.

그 후폭풍은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를 초래할 터.

그렇기에…….

‘실례가 되는 생각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경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을 과거를.

다른 누구도 아닌 경께서 겪으셔서 다행이라고.

‘감히 저, 마티스는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

.

.

무엇보다 입을 닥치게 하는 게 시급했다.

다짜고짜 클라우디, 클라우디……!

이미 전 세계도 모자라 마탑에까지 그 이름이 울려 퍼졌을 테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

혹시라도 더 나아가서 풀네임을 읊기라도 해봐라.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놈의 로미오만큼은……!’

TV에서도 뉴스에서도 커뮤니티에서도.

온종일 떡밥이 굴러가겠지.

긍지고 나발이고, 정말 수치심에 얼굴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흑마법, 『흑관』을 발현했다. 마왕, 안드라스를 비롯한 악마들의 감각 활동을 불허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눈치가 빠르다면 내 말에서 알아차렸겠지.

내가 그쪽이 애타게 찾던 클라우디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렇게 나타나 줬다.

그래서 그 이름을 들먹이면서 나를 찾은 이유가 뭔데?

당연한 말이지만 답하는 건 내가 아니다.

───────

구마의식 : 악마를 의식으로 초대한다.

───────

의식의 공간이라면 감각과 무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는 두려움에 떠는 안드라스를 향해 물었다.

아니, 추궁했다.

“분수조차 모르는 잡종이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닐 터.”

“…….”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말하라.”

내 말이 좀 까칠했나?

근데, 솔직히 화낼 만하잖아.

그그그륵─

안드라스가 부리에 거품을 물었다.

제대로 된 추궁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놀란 건가?

이래서야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별로다.

그래도 안드라스는 꾸역꾸역 말을 전해왔다.

“거악……. 거악에게……. 들었다…….”

거악?

그래, 그 이름이 괜히 네 귀에 들어간 게 아니겠지.

하여튼 입이 가볍다, 악마들.

끼리끼리 잘하는 짓이다, 진짜.

역시 말문부터 막아버린 건 잘한 짓이었다, 호열아.

자화자찬도 잠깐, 나는 이어서 캐물었다.

“여섯 중 누구인가.”

칠죄종.

그중 탐욕은 내 손으로 직접 지옥에 처넣었으니 여섯이 맞다.

안드라스 입장에선 반드시 숨겨야 하는 이야기겠지.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부리를 다물고 있는 건 불가능할 거다.

구마의식이 어떤 공간인데.

의식의 주도권은 내게 있었으니.

내가 물으면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 시, 식타아암……!!”

울컥─

안드라스가 입에서 피를 뿜어낸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계약이라도 맺은 모양이군.

‘하여튼, 거악이나 마왕이나.’

있는 놈들이 더 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안면이 있는 칠죄종 식탐이었다.

왜, 사이렌의 축복으로 천운이 찾아왔던 그날.

나는 [마안(魔眼)의 망원경]으로 식탐을 목격했다.

뭐, 빙의가 일상인 악마에게 외관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이래 봬도 악마 사냥꾼이거든.

우연히 마주치면 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나저나.’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랐다.

그래서 식탐, 그 자식은 내 이름…….

아니, 클라우디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어째 의문이 끊이지 않는구나.’

신세 한탄을 삼키고 기억을 되짚어보던 순간이었다.

‘……잠깐만.’

나는 떠올리고 말았다.

천운이 따랐던 그날.

내게 남았던 단 하나의 의문을.

그랬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아젠트레스가 이끄는 엘프 일족.

초월자, 우르스.

거악 칠죄종, 식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일촉즉발.

그 상황을 정리했던 빗자루를 탄 초월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의문이 맞물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스칼의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

그곳에 명시되어 있던 ‘위대한 가문’.

그리고 이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식탐에게.

‘클라우디’라는 이름을 들었다는 안드라스.

이내, 나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 난장판이 클라우디 이름으로 정리된 거였다고?!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