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내 두 눈으로
호령(號令).
호열이 아닌 호령이 맞다.
정확하게는 귀철이 제로 산맥을 호령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귀철을.
마치 다른 집 검인 양 말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으하하! 좋다, 더 격하게 날뛰어 보거라. 야생이여!
내 검이라고 밝히기엔 심하게 부끄러웠으니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마디가 쏟아져 나온다.
마음 같아선 커뮤니티에 질문 글이라도 올려보고 싶어진다.
──────
Q. 원래 에고 장비는 전부 이렇게 말이 많나요?
──────
그럼 이런 답변이 올라오겠지.
──────
A. 에고 장비? 세상에 그딴 게 어딨음ㅋ
──────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결국,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라는 거지.
귀철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어야지.
“끝까지 꺾이지 않았던 야성. 그대들은 충분히 명예로웠다.”
이놈의 입!
보다시피 그랑펠과 귀철의 감성은 아주 그냥 천생연분 수준이었다. 덕분에 고통스러운 건 양쪽에서 시달리고 있는 나, 이호열뿐이라는 거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옛날보다는 나아졌지.’
플레이어로 막 각성했을 무렵.
고작 놀한테 예절 교육을 운운하던 때에 비하면야.
지금은 누구에게 이런 모습을 들켜도 둘러댈 명분이 있었다.
왜, 방금 처치한 몹만 하더라도 무려 700레벨짜리 몬스터였거든.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01]
[능력치]
근력 : 141 / 민첩 : 139 / 마력 : 51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0]
추가된 하루의 일과.
제로 산맥에서 꾸준하게 몬스터를 사냥한 지도 나흘째였다. 덕분에 600레벨의 벽을 돌파하고, 1레벨이 추가로 상승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다.
레벨보다 근본적인 능력.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얼마나 상승시켰는지.
그 점에 더욱 중점을 두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일단, 몬스터를 상대하며 되도록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밸런스 붕괴잖아?
서클의 효과로 발현력이 증폭된 마법이다. 이미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선 마법으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무의미하게 경험치만 채울 뿐이었으니까.
“무엇이든 효율이 중요한 법.”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금과 같은 법이니까.
게다가 경험치야 아르카나 대륙,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조달할 수 있다. 역시 유산이 최고다.
덕분에 이제부터 현실에서의 사냥은 단순하게 경험치를 획득하는 목적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슥─
미완성 쾌검술을 가다듬는 노력은 물론.
석궁을 활용하는 사격술까지.
그야말로 여러 방면에서.
악마 사냥꾼답게.
근본적인 능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다는 것.
‘기이로 발전시킬 가능성도 있으니까.’
물론.
플레이어들이 알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육성 방식이다.
아주 그냥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답해주리라.
“때론 천천히 거닐어야 보이는 것이 있지.”
아니, 그렇다고 낭만 넘치게 대답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 말이 더없이 옳다. 나의 주인이여.
넌 또 이런 말에 맞장구치지 마라, 귀철.
어쨌거나, 나는 나흘간의 가장 큰 성과를 불러냈다.
하이엘과 디엔드.
간만에 주어진 시간에 둘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거든.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이 주군의 부름에 답했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왜,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하이엘, 디엔드, 귀철.
무려 셋이나 되는 분신과 한데 마주한 나였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려 하지만 꾹 참아보자.
‘일단, 디엔드는 기대했던 만큼.’
디엔드의 전력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강함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첫 등장 때부터 정령학 선임 페이얀의 계약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긴장하게 하였던 어둠의 정령 디엔드였다. 못해도 상위 정령급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단 거지.
‘하지만 하이엘은 간과하고 있었어.’
인정하겠다, 편견 때문이었다.
그야 나는 하이엘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간과했다. 하이엘이 포식자의 늪지대에서처럼 여전히 겉만 화려한 존재일 거라고.
‘엘프를 멈춰 세울 수 있는 하이엘인데 말이야.’
그러나 하이엘은 엄연한 고유 정령이자 나와 함께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존재였다.
{자연} 능력이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고 한들, 일반적인 몬스터들로서는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 증거가 눈에 보였다.
짐승 타입 몬스터들이 전부 하이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녀석들이 온순한 게 아니었다.
호전성이라면 맹수도 치를 떨 초식 동물, [전쟁광 순록]도 섞여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도 교육한 거구나, 하이엘.’
누굴 닮아서 그런지, 일타강사라고 불러도 손색없겠구나.
그런 하이엘을 보고 있자니, 슬슬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째서 고깔모자 속 대마법사들이 나를 보고 잔뜩 움츠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나 할까?’
사실 당사자인 나도 새삼스럽게 놀랐거든.
첫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정령, 하이엘.
검성을 압도했던 귀철.
디엔드까지.
잔뜩 거품이 낀 나를 제쳐놓고 보더라도.
저 셋을 한 번에 다루는 이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흠칫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선 더없이 든든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어야 했거늘.
이 순간, 나의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숲의 동물들에게 주군의 예절론을 설파했습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주접을 떠는 하이엘 때문에?
“저 또한 본받겠습니다, 주군.”
그게 아니라면 그 유난을 보고 배우는 디엔드 때문에?
-과연……!
그것도 아니면 해괴한 풍경에도 감탄하는 귀철 때문에?
그래, 평상시라면.
이것만으로도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을 나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런 건 사소한 해프닝으로 만들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렇다.
스칼이 내게 전해온 이야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위대한 가문’에 관한 소식 때문에.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선택)
스칼은 용기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내게 공유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위대한 가문』
그 단어 위로 겹쳐 보이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왜, 세상에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서.
하필이면 ‘위대한’ 가문인 건데?!
나는 최대한 냉정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클라우디.
그랑펠과 마찬가지로.
중2병에 시달리던 내가 설정한 가상의 가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가문이겠지.’
뭣보다 그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다잖아?
‘적어도 나는 과거를, 이름을 아직까지 잘 숨기고 있다고.’
애써 추스르는 속마음.
그럼에도 마냥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지금도 체감하고 있단 말이다.
좋은 걸 다 가져다가 붙인 그랑펠의 설정을!
‘물론, 스케일이 다르긴 하지.’
보자…….
어렴풋이 클라우디가(家)의 설정이 떠오른다.
그 시절, 삐딱하던 내가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정도.
쉽게 말해서.
그랑펠에 버금갈 정도로.
낯뜨거워지는 설정이 한가득이었지, 진심으로.
……정말로, 만에 하나.
그 설정들이 실현된다면?
혹시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클라우디가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장담하겠다.
적어도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선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런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겠지.
왜냐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나는 이 빌어먹을 이름을.
아르카나 대륙엔 물론.
현실에 밝힐 생각 따윈 절대 없으니까.
‘특히 웬수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엔 진짜……!’
그러니까 나는 스칼에게 선언했었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
그런 뜻이 아니건만.
본의 아니게 뱉어버린 냉랭한 말.
스칼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쪽은 목숨(수치사)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
AAU 유스라 지부가 창설된 이후.
각 지부들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지부장들뿐만 아닌 사원 사이의 교류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잦아졌다는 뜻.
윤수겸이 카메라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잘 지냈어, 톰? 카트리나도 여전하네.”
“연락 한번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손 흔들기는.”
“에이, 알잖아? 우리 보스가 누구인지.”
“하긴 천하의 미스터 박 밑에서 죽어나가고 있겠지?”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CEO 레이먼 션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여러 의미에서 전설적인 인물.
그의 반골 기질이야 AAU가 코스모인 시절부터 전 지부에 자자했었다. 그런 박민재가 지부장으로, 윤수겸의 보스로 발령됐다는 소식에 조의를 표했던 톰과 카트리나였다.
“그래도 가끔은 부럽다니까?”
“미쳤어? 내가 부럽다고? 왜?”
“나름 가까울 거 아냐. 이호열 플레이어랑.”
“나도 동감.”
호열의 이름이 거론되자 카트리나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댔다.
자신들보다는 호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윤수겸이 아닌가.
카트리나가 의욕적으로 말을 이었다.
“접점이나 교류가 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뭐야? 대한민국 지부만이 알고 있는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에 관한 정보는? 진짜 비밀엄수할게. 필요하다면 톰도 저기다 치워버릴게.”
뭔가 했더니 그런 질문?
완전 헛물을 켜고 있다들.
윤수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희 긍지가 뭔지 알고 있니?”
“긍지? 알지. 이호열 총책임자님이 입에 달고 사시는 말.”
“그래, 그런 분에게 특별 대우란 게 존재하겠어?”
“아…….”
두 사람은 단번에 납득했다.
하긴 그동안 호열이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호열에게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겠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조차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공명정대한 호열이었으니까.
헛물을 켠 세 사람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옛날 추억을 되살려 보자는 거지?”
“맞아. 스토리 짜맞추던 그때 그 추억.”
“초 쳐서 미안한데 말이야. 그게 의미가 있긴 한가?”
“톰, 제발. 미안할 거면 말을 꺼내지 마.”
“카트리나, 쟤 옆구리 한 대만 때려 봐.”
셋이서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순 없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까.
얻어맞은 옆구리를 매만지던 톰이 입을 열었다.
“우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어쩌면 아르카나는 게임일 때부터 우리의 컨트롤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전제를 깔고 가자는 거야.”
“인정.”
“오케이. 뭐, 정답은 레이먼만 알고 있겠지만.”
매사에 비관적이지만 막상 하면 잘하는 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몇 개인지 덜컥, 겁이 난다는 거지. 왜, 악마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아르카나 대륙은 그래도 꽤 평화로웠잖아?”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제국 전쟁처럼 큰 사건들이 있긴 했다만, 이번 성전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톰?”
“핵심은 간단해.”
그리고 예리했다.
“그 태평성대엔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기나긴 평화에 이유가 있었다?”
“단순하게 악마가 업데이트돼서 난장판이 된 게 아니란 거야?”
톰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제를 깔았잖아? 모든 게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설정 배경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거라고. 최근만 하더라도 마탑이란 좋은 예가 있겠군.”
“악마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건 설정 때문이 아니라…….”
“탑주의 부재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모종의 사정이 있던 거다?”
“맞아. 그러니까…….”
타닥─
톰이 키보드를 두들기자 올라오는 텍스트 한 줄.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평화가 깨진 데에도 이유가 있다.”
.
.
.
시공간의 사교장.
흑색의 머리칼.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녘.
그곳에서 온 일출의 무사는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다. 애초에 아르카나 땅을 밟게 된 것도 ‘마계 지각 대변동’ 덕분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는 알지 못했다.
“용감하구나. 그 이름을 언급하다니.”
한 초월자의 말에 일출의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가 보였던 반응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다니.
그동안 사교장에서 봐왔던.
무기력한 모습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그러나 일출의 무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설의 재림부터 대흉 토벌.”
“심지어는 그대의 고향에 전해졌던 ‘그 사건’까지도.”
“동쪽에서 온 무사여, 믿을 수 있겠나?”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엔 한 가문이 있었다는 걸.”
“그렇다. 클라우디다.”
“클라우디가 있었기에 대륙은 이제껏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클라우디가 사라졌기에 대륙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
말문이 막힐 정도로 충격적인 과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