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16화 (216/489)

◈ 216화. 수업 (1)

“!”

눈동자에 확실하게 느낌표가 떠오른 걸 보니까 이번엔 제시 하인네스가 맞군. 그나저나 놀라야 할 건 나인데. 어째 제시 쪽이 훨씬 놀란 눈치다.

“이런 곳에서 오랜만에 뵙네요, 이호열 수석님!”

일단,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꾸벅─

직각으로 숙이는 자세가 정중해서 나도 모르게 화답했다.

“마력 탈진의 후유증은 나아진 모양이군.”

안부를 묻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단도직입도 정도가 있지!

방금 말했잖아?

‘사교장에서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만난 기억도 없는데.

제가 마력 탈진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혹시라도 물어오면 어쩌나.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력 탈진……? 역시, 이 수석님이세요! 제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걸 알아보셨군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이럴 땐 쌓아둔 업보가 도움되기도 하는구나.

그나저나, 나는 제시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좀 위험하지 않나.

‘500레벨 초중반이었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제시에게 이 전장은 무리다.

벌써부터 증거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미약하게 들썩거리는 어깨.

포탈에서 나타난 제시였다.

목적지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포탈 발현에 소모되는 마력량은 급격하게 상승하는 법.

호흡을 가다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제시는 포탈을 발현하는 데에 많은 마력을 소모한 거겠지.

제시가 탑주의 마력흔을 추적할 순 없었을 터.

그렇다면 역시.

클래스 퀘스트를 따라 움직인 건가.

슬쩍 주변을 살핀다.

아직까지 탑주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다.

제시와는 의견을 교환할 필요가 있겠군.

적에 관한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시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어떻게 보면 당사자니까.’

나야 탑주와의 대화를 통해 이 사건에 얽힌 사연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만.

구체적인 목적까진 알지 못했다.

퀘스트가 있긴 해도 지나치게 간결했거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실패)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처치하라.

그렇게만 적혀있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 제시는 아니겠지.

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과연, 짐작하고 계셨네요! 클래스 퀘스트 때문이 맞습니다. 이 수석님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가 기특해서가 아니다.

내가, 이호열이 기특해서다.

나, 진짜 날마다 죽도록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왜, 오늘만 두고 봐도 그렇다.

어찌어찌 잘 풀려서 긴급 업데이트를 해결하고 복귀한다고 쳐보자고.

그런 내가 유스라든, 마탑이든 복귀해서 할 일은 뻔했다.

[집념]을 향상시키겠다고, 육체를.

그것도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혹사하겠지.

어디 그것뿐이냐?

기이의 영역에 상위 마왕을 포함한 경쟁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기이에 관한 연구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

그러나 드높으신 긍지께서.

타인의 앞에서 엄살을 부릴 리가 없었으니.

나는 제시를 향해 의연하게도 말했다.

“알고 있다.”

탑주가 한 말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력 탈진에 빠졌었으니까.

그나저나.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앗, 마력 탈진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력 탈진에 빠질 때까지 무리하는 건 자제해 주면 좋겠다.

내 천운은 진작 끝났거든. 고깔모자에서 어떤 대마법사의 인격이 튀어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네, 명심할게요!”

제시가 느낌표로 대답하기도 잠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엇이냐,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

탑주의 계획은 과연……!

“이번 클래스 퀘스트는 [수업]입니다!”

……수업?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퍼즐처럼 흩어졌던 의문들이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탑주가 제시를 마탑으로 불러들였던 시점부터 지금 이 순간.

제시에게는 턱없이 벅찬 이 공간으로, 제시를 이끈 이유까지도.

탑주는 고깔모자에 깃든 뒤에도.

차기 대마법사 제시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남겨둔 것이었다.

제시는 모험가다.

마법적 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존재.

그럼에도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다른 세계의 존재.

그런 제시에게 방대한 마법적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던 거겠지.

제시가 양손으로 지팡이를 꼭 붙잡곤 말했다.

“퀘스트 목표는 전대 대마법사의 육체와 조우하는 건데요! 약간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네요! 고깔모자 말고 육체는 처음 뵙는 거거든요!”

나와 제시의 퀘스트 목표를 비교해 본다.

‘……나는 처치하라. 제시는 조우하라.’

뭔가 상당히 다른 뉘앙스군.

당연하게도.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제시는 내 퀘스트에 관해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마냥 설레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제시 하인네스.”

“네, 듣고 있습니다. 이 수석님!”

“이번 수업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

지구를 향해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10개나 발현했던 탑주의 육체가 아니던가? 하도 빌어먹을 상황을 많이 겪어서 말이야. 조금은 감이 생겼거든.

내 추측에 화답하듯.

변해가는 환각마법의 풍경 너머.

요동치는 마력의 물결 속에서.

탑주의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업이 시작된 모양이군.”

그 말에 제시의 동공이 처음으로 내게서 떨어진다.

불투명한 마력 구체에서 빠져나온 탑주의 육체.

남자인가, 여자인가.

성별을 알아차리기 힘든 중성적인 외모.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초점 없이 공허한 눈동자였다.

이내, 제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수석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퀘스트 목표가 갱신됐습니다! 그런데…….”

“말해도 좋다.”

“그게 ‘이번 수업에서 살아남으라’라고 하시네요……!”

생존이라니, 제시에겐 불가능한 퀘스트 목표잖아?

하지만 어째서 제시에게 벌써부터 이딴 퀘스트 목표를 줬는지 알 것 같다.

분명, 그 고깔모자 속에서. 대마법사들의 의식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겠지, 탑주?

시간이 촉박한 거야.

더는 고깔모자 속에 존재하며.

제시를 돌볼 여유가 남아있지 않은 거야.

그런 상황에서 나를 떠올린 거겠지.

서클을 형성한 나라면.

게다가 기이의 창시자인 내가 제시와 함께라면.

먼 훗날 제시를 위한 안배를.

지금 시점에서 개시해도 된다고 판단한 거겠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약간 참관 수업 같은 느낌이잖아, 이거?’

육체와 의식이 분리된 시점에서 탑주가 자신의 육체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만에 하나, 자신의 육체가 폭주해 제시를 헤치려고 든다면.

지켜보고 있던 나더러 처치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아니, 진짜 부장님 같네.’

퀘스트 목표까지 들이대면서 부하 직원 부려 먹는 거 뭔데?

하지만 마냥 투덜댈 일도 아니겠지.

그도 그럴 게.

현재 탑주가 발현하고 있는 모든 마법은 말 그대로 차기 대마법사, 제시를 위한 것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처럼 마법 서적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초고위 마법이 쏟아진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부릅뜨고.

생각을 고쳐먹자, 호열아.

참관이 아니라 함께 수업을 받는다고 생각하자고.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겐, 그랑펠에게는 목격하는 모든 걸 흡수하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좋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탑주여.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부디 배울 것이 있었으면 좋겠군.”

*

마탑.

유그위드는 집결한 선임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로써 마탑의 치부가 세상에 들통이 났군요.”

이 수석, 특히 그대에겐 면목이 없답니다.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들의 반란부터.

마탑을 지키기 위해.

또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에게로 모든 관심을 돌리던 호열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무색해지게도.

“곧장 초고위 마법 발현이라니. 기운도 넘치시지.”

마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탑주.

우리 탑주님께서 거하게 뒤통수를 쳐주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그위드를 비롯한 이곳에 모인 선임들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어째서 이 수석이 침묵을 지켰는지 알 것 같군요.”

“수석께서는 차마 말씀하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마티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이 수석께서는 늘 마탑을 우선시 여기셨습니다.”

크리스탈 홀에서의 침묵 또한 배려가 확실했다.

탑주가 적의를 드러내고 발산한다면, 마탑이 나서서 탑주를 저지해야 할 터.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런 상황을 반가워할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탑주가 누구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탑주의 행동이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는 것.

“이 수석에게 모든 것을 떠넘길 순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유그위드 님.”

“이런, 벨리에 선임이군요.”

“저 또한.”

“오호, 나스로우?”

그들을 필두로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의견을 일치시켰다.

유그위드는 다시 한번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듯싶었다.

“다행이네요. 혼자 나설 걱정은 덜었어요.”

그런 유그위드의 눈빛이 이내, 돌변했다.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카림제바나 세니오스처럼 『마법』에서 비롯된 이명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마탑에 입성한 후.

선임에서 수석, 원로를 거쳐오며 뒤늦게 붙은 이명이었다.

유그위드에게 그런 이명이 붙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나서볼까요?”

인자한 미소 속에 감춰진 냉철한 판단.

유그위드에겐 결단력이 있었다.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거인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유그위드는 거인이었다.

스스로 내린 결정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으니까.

서늘한 농담이 이어졌다.

“따지자면 이건 탑주를 향한 반역이 되겠군요? 뭐, 나쁘지 않습니다. 기왕 마탑에 발을 들인 김에 나이라도 내세워 탑주 자리에 앉아보는 것도 좋겠어요. 후후.”

유그위드는 곧장 마력흔을 추적했다.

탑주의 마력흔보다는…….

이 수석의 마력흔을 추적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지.

그리 생각했거늘.

유그위드가 너털웃음을 뱉었다.

“……정말로 보통이 아니군요, 이 수석?”

마력흔조차 추적할 수 없다니.

이게 바로 [『기이』]란 말인가요?

그대의 말이 맞았군요.

그대에게 서클은 거쳐 가는 경지에 불과했어요.

“그러니 탑주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하늘로 되돌려버린 거겠죠.”

원로인 유그위드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기이.

신선한 충격에 감탄하기도 잠깐.

유그위드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이 수석의 마력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감히 추적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선 것 같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마티스?”

“원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뱅그릿,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요?”

“네, 넵! 자, 잠시만요!”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그는 선임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마력감응력을 가졌다.

마력에게 선택받았다고 할 정도의 감응력. 축복에 가까운 재능이 제대로 된 마도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 뱅그릿을 선임 자리에 올려놓았다 해도 무방했으니까.

“유그위드 원로님의 말씀이 옳으신 듯합니다.”

물론, 그런 뱅그릿에게도 무리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군요.”

유그위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마르셀로 수석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마르셀로라면…….”

“그러고 보니 보이질 않는군요?”

호열과 함께 기이의 길을 걷는 마르셀로라면.

마력흔을 추적하는 것쯤은 능히 해낼 수 있을 터.

유그위드는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이런.”

벨리에가 흠칫해서는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유그위드 원로님?”

“아무래도 우리가 늑장을 부린 모양입니다.”

“네?”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가 닿지 않는군요.”

“그 말씀은……?”

“아마 마르셀로 수석도 이 수석과 같은 공간. 그러니까 탑주가 발현한 마력 소용돌이에 진입한 모양입니다. 이거, 두 수석을 쫓기에 늙은이는 무리란 걸까요?”

물론, 엄살이었다.

말했다시피 거인은 이미 발을 내디뎠으니까.

유그위드가 곧장 마르셀로의 마력흔을 추적.

이내, 포탈을 발현했다.

유그위드가 말했다.

“늦었지만, 부지런히 두 수석을 쫓아봅시다.”

.

.

.

나는 맞은편에 선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이호열 수석.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마르셀로는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름대로 진지한 목소리인데.

내게는 이보다 웃긴 말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처럼 사적인 자리에서 나를 향한 마르셀로의 호칭은 ‘경’으로 고정되어 있었거든.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탑주? 그쪽이 알던 마탑이랑 지금 마탑은 좀 상황이 달라졌다고.

그러니까 이딴 유치한 환각 따윈 치워버리란 거야.

“수업이라 칭하기엔 지나치게 가볍군.”

나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이 이뤄지던 토파즈 홀.

그곳에서 내뱉었던 독설처럼.

“마탑의 체면을 떨어트리지 않기를 바란다. 탑주.”

그런 내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그 의견에 동감입니다.”

이번엔 진짜였다.

“당신이 알고 계실 리가 없으시겠습니다만. 경께서는 저를 그저 마르셀로라고 부르십니다. 수석이란 불필요한 칭호를 붙이지 않으시지요. 물론, 원로님들에게도 마찬가지십니다.”

……어째 나를 존댓말도 모르는 놈이라고 돌리는 것 같다만.

어쨌든.

반갑다, 진짜 마르셀로.

그런데 어째 마르셀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탑주 앞에서 아련해야 할 눈빛이…….

어째 활활 불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르셀로도 마법사였단 사실을.

그랬다.

저 활활 불타는 눈빛은 만년설, 세니오스의 그 눈빛.

“뭐, 그래야 당신답지만.”

나.

“아니, 한결같아 보이셔서 오히려 좋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꺾는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탑주와 마르셀로의 관계를 단단히 착각한 것 같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