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자리를 비우다
무섭다.
무서워.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스스슥─
책상 위.
수북하게 쌓인 수석의 업무.
나는 깃털펜을 휘갈기면서도 좀처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처음부터 모든 게 연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탑주의 연기는 고깔모자에 깃든.
전대 대마법사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탑주는 괜히 탑주가 아니었다.
탑주가 제시의 기억을 훑어봤던 것처럼.
대마법사들도 탑주가 나와 대화를 나눈 기억을 살펴볼 수 있을 터.
‘탑주가 입으로 내뱉은 말만 보면…….’
의심할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까칠하게 나왔던 거였구나.
그 메소드 연기 덕분에 낌새를 알아차릴 순 없을 거다.
애초에 얼굴을 맞대고 있던 나부터도.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퀘스트창이 반짝거리지 않았더라면.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건 아니다.
다짜고짜 공범이 되라니!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 그건?
‘괜히 마르셀로가 존경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가.’
플레이어의 전유물인 시스템창.
때문에 전대 대마법사들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사각지대인 시스템창을 활용해 내게 사건의 경위를 전해올 줄이야.
‘그건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단 거겠지.’
플레이어들이 『마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르카나인들에게도 [시스템]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천하의 마르셀로가 기이에 고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말이야.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과연, 탑주의 자리는 괜히 올라선 게 아니군.”
어째 낙하산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기이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은 어깨에 힘을 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결국, 탑주는 끝까지 나를 가늠해 본 모양이었다.
나를 신뢰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퀘스트 내용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능구렁이 몇 명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이게?’
대마법사의 음모도 아니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는 퀘스트.
이런 초고난도의 퀘스트를 탑주는 혼자서 수행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심지어는 그런 적들과 모든 감각을 공유하면서 말이야.
‘슬슬 이해가 되는데.’
어째서 탑주가 제시를 마탑에 입성시켰는지를.
탑주는 제시를 선택한 거겠지.
대마법사의 음모를 함께 막아낼 아군으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처럼 말하자면.
그게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스토리 라인이라는 거겠고.
-“스승과 제자라……. 그렇게 생각했던 게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자기가 스승이면서 그런 소릴 하다니.
하긴 본인조차 속여넘겨야 하는 연기였을 테니까.
여기선 탑주가 거짓말을 했다고 꼬투리 잡을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대마법사들의 음모가 뭐냐는 거다.
도대체 탑주는 어떤 음모를 알아차렸길래.
육체와 의식을 강제로 분리하고, 고깔모자라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서, 제시에게 대마법사 자리를 넘기는 도박 수를 던진 걸까……?
‘결국, 그놈의 진리가 문제인가?’
진리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카림제바.’
마탑의 지하.
무간에서 무너져 버린 두 명의 원로 마법사와는 달리.
카림제바는 절대영도에 얼어붙어 가면서까지 진정한 진리를 향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었다.
그런 카림제바가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벌였던 일은 다름 아닌 상위 마왕의 부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구린내가 난다.
마왕 쟁탈전 끝에 상위 마왕 중 하나인 가미긴과 마주쳤던 나였다.
덕분에 상위 마왕의 범상치 않음을 직접 확인했단 말이지.
일단, 상위 마왕하고는 말부터가 통하지 않았다.
-“□□.”
그러나 가정해보자.
카림제바가 말한 ‘진정한 진리’.
그리고 대마법사들의 목적지인 ‘마법의 극한’을 동일시한다면…….
‘기이가 진정한 진리가 되는 건가?’
나는 탑주와 나눈 대화를 통해 마법의 극한이 기이라는 걸 파악했다. 아니, 파악한 걸 넘어서 내가 기이의 창시자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왔지.
내 입으로 내뱉었으니까.
탑주뿐만 아니라.
다른 대마법사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
‘역시, 입으로 매를 버는구나.’
만약, 탑주가 아닌 다른 대마법사의 인격이 튀어나온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부디, 제시가 마력 탈진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생각 끝에서.
나는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잠깐, 상위 마왕이 기이의 영역에 있는 존재라면.’
그런 전제를 깔고 간다면.
단번에 풀리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그랬다.
가미긴이 [『기이』]에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은 셈이잖아!
기이는 말 그대로 기이한 효과를 가졌다.
자그마치 화룡이라 불렸던 카림제바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허약했던 과거의 나한테 패배했던 건 기이에 관한 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미긴이 유일했다.
다시금 떠올려보는 가미긴과의 전투. 악크샨 선배님들이 도움이 없었더라면, 설령 기이를 발현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을 수 없었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상위 마왕.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존재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상위 마왕이 그토록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기이한 힘이니까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던 거였어.
나는 읊조렸다.
“그런가.”
그래, 기이를 향해 달려나가던 게 나랑 마르셀로만 있던 게 아니었구나? 상위 마왕은 물론, 대마법사들도 기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거였어.
근데, 말이야.
다들 명심하고.
주제 파악을 하라고.
“허나,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설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나의 흑역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이상.
나는 누구보다 먼저 기이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뿐만이 아니다.
기이에 상위 마왕이, 악마가 관련됐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랑펠은 더욱더 진심이 될 수밖에 없거든.
스샤샤샥─!
……아니, 그렇다고 이런 데까지 진심이 될 필요는 없는데.
어째 깃털펜을 놀리는 속도가 더욱더 신속해져 간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뿔싸.
어째 기이로 향하는 길보다.
고생길이 더 훤하게 열린 것 같다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진행 중)
그러나 모든 길도 한 걸음부터다.
탑주의 육체라면 마탑 최상층,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최상층을 찾는 건 수석의 업무를 마친 그다음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스슥─!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의 새로운 근위대장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삼인자, 에노크 로렌이었다.
에노크는 문득, 예시카를 떠올렸다.
예시카는 어째서 그렇게 기겁을 했던 걸까?
“흐아암─”
하품이 다 나올 정도로 할 일이 없는데 말이야.
-“단장님, 제로 산맥 원정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예시카의 선언.
예시카가 나를 대신해 위험천만한 제로 산맥 원정을 대신 나서줄 줄이야. 에노크에게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르콘의 승인 아래 예시카와 에노크, 서로의 직무가 바뀐 게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 궁전 수호가 절대 만만한 임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놓인단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누가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황금 궁전에 얼씬거릴 수 있단 말인가? 무려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매일같이 방문하시는 장소란 말이다.
물론, 총대장님께서야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언제까지고 자리를 지키고 계시진 않는다. 그럼, 그 부재를 노리는 이들이 있는 건 아니냐고?
아니, 뭘 모르는 소리를.
‘산 너머에 또 하나의 산이 기다리고 있지.’
그렇다.
황금 궁전의 별실엔 엘시도어가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엘프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
저런 엘프를 어떻게 굴복시키신 건지는 모르겠다만…….
암, 모든 게 이호열 총대장님의 능력이시겠지.
“이게 얼마 만에 꿀이냐?”
그리고 이런 꿀을 마다한 예시카의 덕도 추가.
그러나 에노크는 착각하고 있었다.
황금 궁전 근위대의 업무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해가 중천에 뜨고, 시곗바늘이 정확하게 정오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우르르─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황금 궁전 앞으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호열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취재진들이었다.
난데없는 인파.
에노크는 반사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정지. 아직 이호열 총대장님께서는 복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통제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이번에도 짜맞춘 것처럼 정갈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말이다.
“가위바위보!”
“아자! 저희 VBC가 먼저입니다.”
“아니, 윤 감독님. 먹고 가위바위보 연습만 하셨어요?”
또한 순서를 정하는 나름의 절차도 존재하는 모양.
에노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이호열 총대장님의 덕분이라는 것을.
왜, 라이언 하트 기사단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었거든.
-“총대장님이 입만 열면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니까?”
-“사실 나도 마탑 마법사한테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뭐, 마탑에서 뭘 들어?!”
-“소문에 의하면 총대장님께선 이쪽 세상에서 아주 고귀한 혈족이신 것 같더라고. 콧대 높은 마탑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니까.”
-“심지어는 호멘이라던가. 그런 기도문도 있다고 했지?”
그저 호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에노크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와중이었다.
다그닥─
난데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그와 동시에.
기자들에게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에휴.”
애마, 알렉산더를 타고 나타난 스칼이었다.
그간 신비주의를 고수해 오던 스칼이 아니던가?
그런 스칼의 등장에 환호해야 할 기자들이 시큰둥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니, 또 왔어. 저거?”
“이젠 반갑기보다는 지겨운데, 진짜.”
“류오쥔춘은 걱정도 안 된대요? 1레벨 차인데?”
놀라고,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대체 호열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란 말인가?
그동안의 신비주의가 무색하게도.
호열 앞에서만큼은 스칼은 지나치게 질척거렸다.
호열의 뒤를 쫓아 마탑과 유스라 왕국.
그리고 제로 산맥을 쏘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진짜 정말 미치도록 급한 일이라.”
“뭐, 이번에도 특종감인가요 스칼 씨?”
“물론, 해결만 되면 정식으로 기자 회견 열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매번 같은 변명을 해가면서 은근슬쩍 맨 앞으로 나아가는 스칼이었다. 언제나처럼 예시카를 붙잡고 호소하려던 스칼은 흠칫했다.
“……예시카 브라이트 경은?”
“그녀는 제로 산맥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오늘부터 황금 궁전의 근위대장은 저, 에노크 로렌입니다.”
“아, 그렇군요. 에노크 씨.”
“……?”
예시카는 경이고, 자신은 왜 씨란 말인가?
묘하게 거슬렸지만, 따지기엔 또 치졸해 보였다.
게다가 상대는 스칼이었다.
‘용기사 스칼인가.’
대격변 이전, 제국에서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몇 안 되는 모험가 중 하나. 에노크 또한 기사이기에 용기사인 스칼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모험가 스칼이.
“아니. 그보다 긴급한 일입니다, 에노크!”
안절부절.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꼭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꼭 호열을 만나야 한다며 떼를 쓰고 있었다.
에노크는 그제서야 질색하던 예시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스칼에게 매일같이 시달린 거구나, 예시카…….
단호한 예시카에 달리 에노크는 정이 많았다.
“경께서 복귀하신다면 전언을 전달하겠습니다.”
게다가 스칼의 목소리가 워낙 호소력이 짙어야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칼에겐 호열에게 반드시 전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평소랑 대사가 조금 다른데?”
거기엔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바람잡기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칼은 이번에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근데 몇 시에요, 지금?”
“엥? 잠깐만, 훨씬 지났는데?”
“아니 호열 씨가 이러실 분이 아닌데?”
“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거 아닐까요?”
“……설마?! 아, 안 돼!”
단 하루도 일과를 어기지 않았던 이호열.
그가 이례적으로.
하필이면 오늘 황금 궁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
.
.
마탑의 최상층.
흥건한 바닥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고 있다.
멈칫─
그 광경을 목격한 원로 마법사.
“……이호열 수석?”
유그위드가 간신히 말을 잇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처참하게 깨져버린 마력의 구체.
그 안에서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마력의 정수.
탑주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