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12화 (212/489)
  • ◈ 212화. 그대였군

    누군가 들었다면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하겠지.

    당연하다.

    다짜고짜 내가 기이의 창시자라니.

    증명할 방법이랄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님께선 잘 알고 계시겠지. 마법적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제시가 어째서 그보다 상위 개념인 기이를 알고 있는지를.

    “……설마?”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동감한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악마 사냥꾼이거든. 그러니까 제시와는 마법과 기이에 관해서도 꽤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눴다는 거다.

    대마법사가 후후─ 너털웃음을 뱉는다.

    “그래, 확실히 그런 기억이 있네. 빌어먹게도.”

    제시의 머릿속 혹은 고깔모자에 담긴 기억을 되짚어본 건가.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표정이 조금은 심각해졌군.

    슬슬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인가 봐.

    ‘늦었지만.’

    긍지에 살고 긍지에 죽는 그랑펠이다.

    그런 그랑펠 앞에서 타인의 긍지를 가벼이 여겼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그 대가야 말할 것도 없겠지.

    과연, 누구의 긍지가 더 올곧으며 광적인지 겨뤄보자고.

    “한데, 기이를 향한 접근을 불허한다니. 제아무리 창시자라고 하더라도 그럴 권리가 있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그 말이 옳다.

    기이를 향한 길이 진짜로 걷는 길도 아니고.

    내가 가로막을 순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면서도 마탑의 수석인 나다.

    덕분에 마법사들이 무엇을 가장 꺼리는지는 잘 알고 있는바.

    “그대들이 목표로 했던 마법의 극한.”

    그러니까 나는 선언했다.

    “기이의 끝에는 내가 먼저 다다르겠다.”

    “……!”

    이른바 당신들의 진리를 가로채겠다는 거지.

    그거야말로 대마법사.

    당신들의 긍지를 꺾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짧은 침묵 후 되돌아오는 질문.

    “그건 우리를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침묵은 긍정이니까, 물론이다.

    아, 기절한 제시는 무죄니까 빼고.

    나는 머리를 굴렸다.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 없이 요란한 하루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한 명도 아니고, 대마법사‘들’이랑 적대적인 관계가 되다니.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가 진짜 이게 맞나, 싶다.

    그럼에도 의심은 하지 않았다.

    ‘행운의 효과는 제대로 확인했으니까.’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해 볼까?

    지금 이 상황이 행운으로 취급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유달리 고달팠던 오늘 하루를 되돌아본다.

    그러던 중 마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마르셀로의 글귀가.

    ──────

    탑주님께서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대마법사의 목소리.

    -“마탑의 수석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

    -“맞아. 마탑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라는 거지.”

    눈앞의 대마법사는 마탑에 관해 지나치게 상세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초월자의 격을 갖춰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했다는 건 마법사로서 적어도 ‘서클’을 형성했다는 뜻.

    내가 아는 지식 속, 마탑에서 서클을 형성했던 마법사는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대였군.”

    그와 동시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성공)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입맛은 이보다 씁쓸할 수 없었다.

    역시, 아랫물이 맑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나.

    ‘탑주가 생각하는 진리가 이따위였으니까.’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들도.

    그 아래의 선임, 숙련, 견습 마법사들도.

    진리란 울타리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나 이 순간,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그래, 마탑은 이름뿐인 진리를 내던지고.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변화했으니까.

    탑주, 당신이 마력 구체에서 부유하던 사이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지.

    그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겠군.

    “그대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연기에는 소질이 없군.”

    “……연기라고?”

    “지금이라도 그만두기를 권하겠다.”

    “아까부터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거 알아? 이렇게 쉽지 않은 사내는 처음인걸. 게다가 연기라면 아까부터 때려치웠잖아? 이 수석, 그대가 사사로운 장난에도 정색한 덕분에.”

    아니.

    내가 그만두라는 연기는.

    제시의 흉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험가인 제시 하인네스. 그녀에게 견습 마법사 자격을 부여한 건 대마법사의 그릇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함이었나?”

    “……!”

    “허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나의 말에 대마법사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선대 대마법사들과는 달리 그대의 육체는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뱉은 말이 사실이라면, 그 행동은 명백히 일인전승 절차에 어긋나는 행위일 터.”

    “……글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말했다시피 그대는 연기에 소질이 없네, 탑주.”

    “!”

    내가 그만두라는 건 그놈의 자작극이다.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 대마법사의 절차를 어겨가면서까지.

    육체와 의식을 분리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이 일은 당분간 기밀로 치부하겠다.”

    탑주, 당신이 걱정돼서가 아니다.

    “마르셀로 수석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군.”

    자신이 시한부의 저주로 죽어가던 순간까지.

    탑주, 당신을 걱정하던 마르셀로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마르셀로의 이름을 꺼낸 순간.

    탑주의 얼굴엔 더 이상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드륵!

    신경질적으로 끄는 의자 소리.

    그러더니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이어진다.

    “잠깐, 이대로 자리를 떠나도 되는 거야? 나라면 걱정될 것 같은데. 설마, 내가 이 아이의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협박인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거 같은데.

    그 대사는 나도 똑같이 되돌려줄 수 있거든.

    나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탑주, 그대의 육체 또한 내 수중에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그리고 다시 한번 조언하지. 그대는 아무리 봐도 연기에 소질이 없군.”

    게다가 탑주가 제시의 육체를 차지한 데에는.

    대폭 상승한 행운이 영향을 끼쳤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나였다.

    [남은 시간 : 3분 21초]

    심지어는 본인의 입으로.

    천운이 따라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했다고 말했으면서 말이지.

    새삼스럽게 직업병 덕을 봤구나, 싶다.

    ‘하도 악랄한 악마들만 상대해서 그런가.’

    악의를 구분하는 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할 수 있는 나였다.

    그러니까 무슨 사연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제시를 볼모로 협박해 오는 탑주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천하의 마르셀로가 존경해 오던 탑주였다. 그런 마르셀로의 보는 눈을 부정하면, 마르셀로 덕분에 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나 자신을 부정하는 꼴이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집어치우라고 했던 연기는.

    그 어울리지도 않는 나쁜 사람 연기를 말하는 거라고 탑주.

    잘근─

    탑주는 제시의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의가 없군, 이 수석. 그대는.”

    뭐?

    예의가 없어?

    격식에 죽고 못 사는 내가?

    “상사의 치부를 꼭 그렇게 들춰야 하는 건가?”

    ……아, 계급을 들먹이면 할 말이 없어진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탑주의 안색이 다시금 바뀌었다.

    상황에 따라 낯빛을 휙휙 바꾸는 게.

    정말로 부장님을 보는 것 같아서 무섭다.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찰나.

    “이 수석. 그대가 모든 걸 훤히 꿰뚫어 본 이상, 어쩔 수 없게 됐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가 나의 공범이 되어줘야겠어.”

    ……그런데, 뭐요, 공범?!

    내가 미쳤다고 구린내가 풀풀 나는 상사와 한배를 타랴.

    썩은 동아줄은 붙잡지 않는 게 사회생활의 상책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성공)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잠깐, 거기부터 연기였어?’

    아무래도 연기 못 한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는데?

    *

    드래곤이 활강했다!

    그 속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당장 두려울 것 없이 제로 산맥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나가던 플레이어들조차 멈칫하게 할 소식이었으니까.

    “……저거, 설마 우리한테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세상에 입구까지 마중 나오는 보스몹이 어딨냐?”

    “그렇지? 괜한 걱정이겠지?”

    실제로 AAU에게서 정보를 전달받기 전까지.

    제로 산맥의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었다.

    워낙 높은 제로 산맥이어야지.

    호열과 검성, 셰그윈이 맞붙었을 때 났던 굉음처럼 큰 소음이 아니고서야 들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제로 산맥 남서부.

    거대 연합의 베이스캠프.

    분석관, 남철민은 들어오는 정보를 읊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깨진 차원의 틈 균열 때와 유사한 현상이 포착됐다……. 현재까지 들어온 정보는 거기까지야. 그쪽도 별일 없는 거지?”

    -응. 토끼들이 겁나게 빡세다는 거 말곤 없어.

    “다행이네. 최정상에서 활강한 이후엔 어떤 곳에서도 드래곤의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역시, 생성된 균열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했을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네.”

    -정말? 옆에 있는 전문가도 형이랑 똑같은 소릴 했는데.

    “……전문가?”

    남태민의 말에 남철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세상에 드래곤 전문가가 어디에 있다고…….

    아니지, 설마 호열 씨랑 함께 있는 건가?

    -호열 씨가 아니라 용기사, 스칼 말하는 거야.

    “난 또……. 가 아니라 스, 스칼?! 스칼이 왜 옆에 있어?”

    -아, 그게 조금 전에 우리 쪽으로 합류했거든.

    “뭐, 뭐어?!”

    남철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칼이 누구던가?

    신비주의 그 자체.

    그 어떤 길드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던 플레이어. 더군다나 그 잠재력만큼은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용기사!

    그런 스칼이 거대 연합에 합류했다고?

    순간, 머릿속에서 두들겨지는 계산기.

    ‘잘하면 샤이닝도, 천하통일도…….’

    우리 거대 연합이 제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남철민의 상상의 나래는 오래가지 않았다.

    토끼와의 사투를 끝낸 남태민이 말을 덧붙였으니까.

    “맞아, 긍지더라고.”

    찌릿─

    그 말에 곁에 있던 레오니는 눈을 흘겼다.

    ‘아니, 그걸로 설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호열과 드래곤부터 클래스 퀘스트까지.

    구구절절하고 복잡하게도 얽힌 스칼의 거대 연합 합류였다. 자초지종도 모자라 구구절절 설명해도 부족한 사연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긍지 한 단어로 퉁 치면 알아들을 수 있겠냐고!

    “역시, 형은 이해할 줄 알았어.”

    “?!”

    ……그런데, 있었다.

    레오니는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마, 내가 비정상인 건가……?

    젠장,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짜 다들 미쳤어…….”

    그러나 레오니의 두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으, 으아아악!!”

    애마, 알렉산더의 꼬리를 빗기던 스칼.

    그가 기겁해서 소리쳤으니까.

    히히힝!

    퍽!

    그 바람에 놀란 알렉산더가 날뛰며 뒷발질을 했지만.

    정작 얻어맞은 스칼은 익숙한 모양인지,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히사기와 슈레이그가 걱정할 정도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스칼 씨?”

    “뭔가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는데.”

    “……어째, 스칼 저거 내가 알던 이미지가 아닌데. 언니?”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건만.

    스칼에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말발굽에 사타구니를 얻어맞은 것보다도.

    끔찍한 글씨가 눈앞에 떠올랐으니까.

    “……아, 안 돼.”

    드래곤이 활강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설마 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새로운 퀘스트창이 반짝거리는 지금.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스칼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위대한 가문?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와? 모든 용들이 집합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요! 드래곤이 움직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어디서 어떤 일을 벌이셨길래. 이런 퀘스트가……!!”

    천운의 후폭풍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