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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11화 (211/489)
  • ◈ 211화. 안부를 나눌 상황은 아니군 (2)

    『시공간』 혹은 [고인물 커뮤니티].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엔 괴리가 존재했으니까. 설정만 존재하던 고인물 커뮤니티가 시공간으로 실현되면서 몇몇 요소가 추가되는 건 확인했던 바였다.

    커뮤니티가 사교장으로 구현된 것부터 시공간의 결투가 콜로세움에서 진행되는 것까지. 물론, 그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있다.

    시공간은 오직 초월자를 위한 공간이라는 것.

    서클이라든가.

    쾌검술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아 넣은 나처럼.

    누가 봐도 경악할 만할 업적을 세운다든가.

    말 그대로 초월자.

    고인물이라 불릴 ‘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특출나야 한다는 거지.’

    아르카나 대륙에 시공간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까다로운 자격시험까지 생각하면 초월자의 수는 많을 수 없었다.

    ‘내가 목격한 이들은 대략 열댓 명 남짓.’

    기나긴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로.

    시대에 획을 그은 인물들만 시공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 기분이군.’

    하지만 내 특기가 무엇이냐, 주제 파악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초월자의 격을 갖추게 된 건.

    나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마왕 쟁탈전으로 지옥의 문이 열렸던 특별한 상황. 거기에 [악크샨의 유지]로, 지옥에서 불러낸 악크샨 선배님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이란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플레이어 중 나를 제외하면 시공간에 진입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나 히든 클래스라는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말이야.

    현시점에서 시공간은 감히 플레이어가 넘볼 영역이 아니라는 거다.

    또각─

    그렇기에 나는 걸음을 옮겼다.

    플레이어는 진입할 수 없는 시공간의 사교장.

    정말로 난데없게도.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낸 ‘고깔모자’에게로.

    커다란 고깔모자.

    그 얼굴은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늘어진 금발의 머리칼이 틀림없었다.

    제시 하인네스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정체를 밝혀라.”

    달칵─

    내 말에 제시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다.

    ‘……잠깐만.’

    이럴 때는 차(茶)를 향한 그랑펠의 광기가 도움되기도 하는구나.

    풍기는 향으로 홍차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게 바로.

    나도, 그랑펠도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였다.

    제시가 유일했었거든.

    -“죄송합니다! 역시, 차는 맛이 없네요!”

    내가 대접한 녹차를 남긴 사람은.

    티백 녹차가 싸구려여서가 아니었다.

    제시의 변명 아닌 변명에 따르면, 자신은 커피부터 홍차까지.

    차라는 차는 사실 입에 대지도 못한다고 실토했었으니까.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는 거야.

    “혹시, 벌써 제 이름을 잊어버리신 건가요?”

    그러니까 그딴 연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거기선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로 말을 끝내야 하거든.

    “마지막으로 묻겠다.”

    “……?”

    “정체를 밝혀라.”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목소리 한번 냉랭하다.

    덕분에 제시도…….

    아니, 제시가 아니지.

    제시를 연기하는 저쪽도.

    시치미를 떼어볼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것 같았지만.

    슥─

    천천히 움직이는 고깔모자.

    고깔모자 아래에서 얼굴이 드러난다.

    낯선 말투가 들려온다.

    “뭘까,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달라진 건 없는데.”

    달라진 게 없기는.

    동공에 느낌표가 없는 게.

    딱 봐도 제시가 아니잖아.

    ‘설마.’

    그나저나 이놈의 직업병은 어쩔 수가 없구나.

    겉모습은 제시 하인네스지만, 정신은 제시 하인네스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악마 빙의 가능성이었다.

    ‘아니, 냄새가 나지 않아.’

    게다가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았다.

    이번엔 기승전악마가 아니라는 건가.

    그래서일까, 더욱더 의문이 드는걸.

    누구냐, 너?

    “딱히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장난 좀 쳐보려고 한 거였거든. 이거, 내 머릿속을 꺼내서 보여줄 수 있으면 바로 내 장난기를 이해해 줄 텐데.”

    어설픈 연기를 집어치우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곳곳에서 늘어지는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연륜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겠지? 이 상황에 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날이 선 태도는 아니로군.

    이내, 맞은편 의자를 향하는 시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남의 말에 따를 위인은 아니지. 무언의 제안을 외면하고 꼿꼿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제시의 탈을 쓴 누군가가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아차, 격식. 제일 중요한 건데, 깜빡했네.”

    그러곤 사교장의 메뉴판을 띄웠다.

    “차라도 대접할 테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격식에 살고, 격식에 죽는다.

    존댓말에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타깝게도.

    ‘애초에 목적은 빗자루를 탄 초월자였지만…….’

    현재 사교장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제시가 제시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지금.

    이것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었다.

    왜냐니.

    제시의 몸을 차지한 그쪽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쪽은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입장이거든.

    ‘인류의 핵심 전력 중 하나라고, 제시 하인네스는.’

    클래스는 무려 대마법사.

    제시의 잠재력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말도 걸지 못할 NPC들이 제시에겐 호의적이었다고 했었지. 심지어 하르콘과도 안면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그러니까 그 자초지종이란 걸 들어보자.

    “저랑 같은 홍차로 하실까요?”

    그 말에 나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유감스럽게도 시공간의 사교장에 녹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미 녹차로 충분한 도핑을 마치고 온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나는 미련 없이 말했다.

    “잡설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더욱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길 사이는 아니니.”

    단순하게 홍차가 취향이 아닌 거면서.

    녹차라면 좋다고 얻어 마실 거였으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를 덧붙이지 마라, 그랑펠…….

    *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가?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 대륙엔 종종 그런 질문이 떠돌고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마법사는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화룡, 카림제바.

    만년설, 세니오스.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등등…….

    더군다나 물고 물리는 상성이 존재하는 마법이다.

    정답이 없는 가위, 바위, 보가 제일 재미있듯.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정답은 없었지만, 적당히 떠들기 좋은 질문이었단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뚜렷한 최강이 없다면.

    어째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라 불린단 말인가.

    몇몇 마법사들은 말해왔다.

    “능력을 떠나 대마법사는 이명에 가깝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그 결이 다르니까.”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네, 그쪽은.”

    “유일한 존재를 어떻게 다른 이들과 비교한단 말인가?”

    그래, 대마법사는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단지 대마법사로 선택받는 것일 뿐.

    그런 대마법사로 모험가인 제시 하인네스가 선택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국의 황제조차도.

    “어쩌면 이 또한 여신의 은총일지도.”

    언제나 마탑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제국에는 더없는 기회였다.

    대마법사인 제시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마탑이란 불안요소에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변수에 변수로군.”

    마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례적으로 모험가인 제시의 마탑 입성을 허가했다.

    자격 증명 과정을 생략하고 견습 마법사 계급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게 누구인가?

    수석은 물론.

    원로 마법사들조차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 모든 게 탑주의 뜻이었다.

    탑주가 의식을 잃은 채.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기 직전.

    적어둔 서신의 유일한 전언이 바로 제시 하인네스의 처분이었다.

    여기까지가 세간이 알고 있는 대마법사.

    그리고 현시점의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에 관한 정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게 끝이었을까?”

    제시의 껍데기가 씰룩거렸다.

    “마법사란 족속은 기본적으로 오만하지. 마탑의 수석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원로, 수석, 선임, 숙련, 견습.

    다섯 계급으로 분류되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러나 어떤 계급도 스승과 제자로 칭할 순 없었다.

    그나마 밀접하다고 할 수 있는 선임과 숙련 마법사조차도 협력 관계에 불과, 선임 선출 기간에는 경우에 따라 경쟁 관계가 되곤 했으니까.

    “대마법사라고 그 본성을 억누를 수 있었을까?”

    곡선을 그리는 눈꼬리.

    그 낯선 눈웃음이 다시금 제시가 아닌.

    제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타인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스승과 제자라……. 그렇게 생각했던 게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톡─

    고깔모자의 챙을 건드리는 손가락.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었으려나?”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전대 대마법사들은 의식으로서 ‘고깔모자’에 깃들어 존재한다.

    그 목적은 마법의 경지를 넘어선 극한을 목격하기 위함.

    극한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 바로.

    대마법사들이 계승해 온 일인전승이라는 것이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으실까요? 대마법사의 실체가 생각과는 전혀 달라서? 우리 이 수석께서도 어쩔 수 없는 마법사니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눈매가 초승달처럼 더욱 가늘어졌다.

    “육체라는 족쇄는 식견을 좁게 만든다고 하지. 그렇다면 새로운 육체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그걸 넘어서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모험가의 육체로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다.

    그것이 대마법사의 그릇으로 제시 하인네스를 선택한 이유였다.

    제시의 탈을 쓴 대마법사‘들’의 결정이었다.

    “물론, 당사자가 모든 걸 이해하고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 아이, 꽤 노력하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마력 탈진으로 기절해 버렸지만.”

    대마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처럼 정신을 잃었을 때나 이렇게 뛰쳐나올 수 있다는 거지. 누구의 의식이 발현되는지는 순전하게 운.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천운이었나?”

    대체 이게 얼마 만에 하는 바깥 구경이야.

    너스레도 잠깐.

    대마법사 중 하나가 속닥거렸다.

    “그런데, 그 내 몫의 금화는 바닥나서 그런데…….”

    비워진 찻잔을 들면서.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아니지, 까요?”

    그러자 마침내 잠자코 있던 호열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마법의 극한을 목격하기 위함이었나.”

    “맞아. 마탑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라는 거지.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 아이가 힘내준 덕분에 그 진리라는 게 슬슬 눈에 보이는 것 같거든. 신기하게도 그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있더라고? [『기이』]라고.”

    물론, 마법에 관한 이해력이 형편없기는 하다만.

    그건 우리가 있으니까 우려할 건 아니지.

    대마법사는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그릇의 역할이었으니까.”

    그건 명백한 사족이자 실수였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유감?”

    “기이로 향하는 길.”

    그것은 오만이나 방종이 아니었다.

    그만한 자격이 있기에 감히 내뱉을 수 있는 말.

    확신에 찬 목소리가 대마법사에게 이어졌다.

    “그 길에 자네들은 없을 테니까.”

    .

    .

    .

    하도 애지중지하길래.

    보통 고깔모자가 아니겠거니, 짐작은 했었다.

    그런데, 대마법사의 의식이 깃들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하나둘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물론, 그 이유에 흠칫하진 않았다.

    만년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그가 진작 마법사에 관한 환상을 제대로 깨주신 덕분이지. 마법사란 족속이 원래부터 글러 먹었다는 건 직접 봐서 잘 알고 있는 나였거든.

    게다가 제시, 본인도 알고 있었겠지.

    제시는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 중이었으니까.

    플레이어의 특권인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제시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향하는지 시스템창을 통해 파악했을 거다.

    문득, 떠오르는 대마법사의 말.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 아이, 꽤 노력하고 있었거든.”

    거악에 마왕에 제로 산맥까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

    그럼에도 제시는 무력감을 딛고 일어섰다는 거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이 성장을 위해 제로 산맥을 찾은 것처럼. 제시도 성장을 위해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했을 거다.

    그래, 그게 제시의 긍지였겠지.

    그런데 말이야.

    뭐, 그저 그릇에 불과해?

    그랑펠 앞에서 타인의 긍지를 업신여기다니.

    대마법사,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한 거야.

    “그 길에 우리가 없을 거라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가 그 [『기이』]의 창시자이자.

    현시점에서 마법의 극한에 가장 가까운 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이 시간부로.”

    “……?”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기이의 창시자인 내가.”

    “……뭐?”

    주제를 파악시켜줄 테니까.

    “기이를 향한 그대들의 접근을 불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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