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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10화 (210/489)

◈ 210화. 안부를 나눌 상황은 아니군 (1)

나는 마안의 망원경이 보여주는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망원경을 노려봤다.

……눈, 제대로 뜨고 있는 거 맞지?

그래도 미덥지 못해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손길에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일시적으로 망원경 조작에 능숙해집니다.]

[효과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란 건데.

그동안 워낙 믿지 못할 일을 자주 경험한 나다.

그중에서도 오늘이야말로 역대 최고.

빌어먹게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내면서.

앞으로 장담하는 건 되도록 자제하자고 다짐한 나였거늘.

그럼에도 장담해야겠다.

유낙서스, 거악, 우르스, 아젠트레스와 엘프들까지.

전장에 선 이들에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옳든, 옳지 않든.

다들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존재?

장담하겠다.

현실에는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속에서 그런 존재는 없다고.

그러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쪽은 누구신데요?

포탈 속에서 빗자루를 타고 등장한 초월자.

그녀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강함을 따질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모인 이들이 초월자 한 명에 위축될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저 이름 모를 초월자가.

싸움을 끝낼만한 소식을 들고 왔다는 것.

아니,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궁금증이 치솟았건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이유란 걸 들을 수 없었다.

텔레파시라니, 이 순간만큼은 마법이 원망스럽구나.

‘치사하게.’

물론, 내가 망원경으로 관찰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리는 없고 단순하게 시끄러운 천둥소리 때문이겠지. 저런 굉음 속에선 아무리 목청이 커도 대화할 수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비로소 잠잠해졌군.”

언제나처럼 말은 잘하는 그랑펠을 애써 외면하고는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결국,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유낙서스부터 거악까지.

모두가 거짓말처럼 싸움을 멈추고 해산.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서슬퍼런 눈빛들을 보면 미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당장은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유를 알지 못해 끝맛이 시원하진 않았지만.

‘후우─’

속으론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당장의 의문이야, 나 혼자만 궁금하면 끝나는 거였지만.

만약, 빗자루를 탄 초월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운수 좋은 날 결말이 날 뻔했으니까.’

그래도 지구 멸망 엔딩은 피한 건가.

그야말로 대폭 상승한 행운 덕에 만난 은인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감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나는 한결같이 내뱉고야 말았다.

“말하지 않았나. 행운도, 운명도 개척하는 거라고.”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지려고!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까지 들리진 않았겠지만.

나는 양심상, 철없으신 그랑펠을 대신해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그게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사춘기라 미안합니다.

.

.

.

[사이렌의 노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펼쳐졌던 개판.

대사건이 일단락된 시점에서 남은 효과의 지속 시간만큼은.

정말로 알차게 활용하리라, 다짐한 나였다.

그 시작은 의심이었으나.

은인의 등장으로 모든 게 평화롭게 끝난 지금.

행운의 효과는 증명된 셈이었으니까.

나는 재킷을 펄럭이며 숲속을 바라봤다.

[전쟁광 순록 : Lv.750]

[전쟁광 순록 우두머리 : Lv.800]

제로 산맥의 중턱.

외관은 몬스터보다 평범한 짐승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강함은 무시할 수 없다.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제로 산맥 토끼에게 호되게 고전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일반몹 다섯에 네임드몹 하나.’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황.

레벨 차이를 고려하면 초월의 경지에 이른 마법을 발현하지 않고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서 마력을 제외한 스탯도 꾸준하게 단련하기는 했다만.

동레벨의 근접 계열 클래스 플레이어들보다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들에겐 가혹한 일이겠지.”

귀철을 손에 쥐었다.

“그러니 배려하마.”

잠깐, 배려는 누구 마음대로 배려야?

설령 전설템, 귀철을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귀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이상.

나는 셰그윈과의 결투 때처럼 현란한 움직임을 펼칠 수 없었다.

물론, 나 이호열의 잔머리 같아서는.

‘나야 평생 귀철한테 맡기고 싶지!’

사회가 괜히 분업으로 발달한 게 아닌 법.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우물이, 살 구멍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검술에서만큼은 얌전하게 귀철이 이끄는 길로 따라가고만 싶은 게 사실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버스 승객이 되고 싶었단 거지.’

그러나.

“응답하라.”

긍지가 남에게 운전대를 순순히 넘길 리 있으랴.

어떤 고생길이라도 첫 번째로 나서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랑펠이 아니던가. 결국, 개고생 하는 건 이번에도 나라는 말이었다……!

곧, 시작되는 전투.

느껴지는 에고 소드.

귀철의 음성.

-이것이 나의 주인이란 말인가.

귀철이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을 때는 흠칫했다.

검성, 셰그윈을 꾸짖을 정도로.

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귀철이 아니던가.

내 얕디얕은 밑천을 알아본 건 아닐까.

순간, 도둑이 제 발을 저린 거지.

하지만 기우였다.

-어떤 전장에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라니.

……그래, 얘가 누구 분신인데.

-과연, 그런 마음가짐이 단기간에 검강을 그토록 짙게 만든 것이겠지. 역시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대의 검로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나의 주인이여!

한결같은 마음가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발버둥에 피어오른 한없이 풍성한 거품 덕분에.

적정 레벨만 따져도 최소 일백에서 수백 레벨이나 높은 균열과 몬스터만 상대해 오던 나였으니까. 심지어 검강의 성취를 이뤄낸 것도 한 번 사망한 덕분이었는데.

‘때론 모르는 게 서로에게 좋을 때도 있는 거지.

귀철아, 네가 기쁘다면 다행이구나.

슥─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하고 귀철을 휘둘렀다.

꼭 검술이 아니더라도 『흑마법』부터 시작해서 『사격』까지.

내가 보수공사를 해야 할 우물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검술을 선택한 이유?

그건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미완성을 넘어 완성에 다다른다면.

서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효과가 개방될 터.

노력 대비 가장 큰 결과물이 예상되는 선택지를 고른 셈이지.

전쟁광 순록 무리와의 전투.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나의 승리였다.

재킷 하나는 착용한 게 아니라 걸쳤다고 하더라도.

에픽템으로 도배를 한 것도 모자라 전설템까지 손에 든 나란 말이다. 이 정도 레벨 차이 정도는 가뿐하게 무시할 정도의 템빨이란 거지.

거기에다가 미완성이라고는 하나 쾌검술까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은 3단계 상승해 598레벨.

600레벨에 가까워져서인가.

레벨 업이 더뎌진 게 새로운 벽에 부딪힌 게 여실히 체감됐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긴 하지만.

‘지금도 종일 사냥 중이겠지, 다들.’

1레벨을 올리기 위해 하루가 뭐냐.

경우에 따라선 며칠씩 사냥을 멈추지 않는 플레이어들이다.

그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투덜거리지 말자, 호열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못 참겠는데?’

나도 참 진짜로 어떻게 된 게.

하나도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나는 상태창을 보며 탄식을 삼켰다.

[집념 : 1]

[보유 포인트 : 3]

새롭게 개방한 스탯인 심미와 집념.

심미야 처음부터 수치부터가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포인트 분배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었다.

‘그런데 집념아.’

너는 아라비아 숫자의 탈을 쓰고 그러면 안 되지!

‘악크샨이 웬일로 사기 스탯을 주나 했다, 내가.’

누구보다 노오오오력을 중요시하는 악크샨.

그런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이.

날로 먹을 수 있는 스탯을 전수해 줬을 리가 있겠냐고.

나는 집념의 효과를 떠올렸다.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불굴에 가까운 그랑펠의 정신력 덕분인진 몰라도.

집념은 1포인트에 대략 스탯 50포인트의 효율을 보였다.

앞으론 1레벨에 50레벨의 효율을 낼 수 있겠구나.

흡족했었거늘.

역시나 김칫국이었다.

‘집념을 상승시키는 법이야 뻔하지.’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가다겠지, 뭐!

집념이 개방된 순간처럼.

한계를 초월한 단련을 해야 할 게 뻔했다.

그런 의미에선 휴식을 취할 새가 없겠구나.

‘그래도 행운 효과로 집념을 상승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사서 고생할 생각부터 하는 게.

어째, 나까지 그랑펠의 긍지에 전염된 기분이었지만…….

흑역사에 시달리는 자괴감은 내일 느껴도 늦지 않는다.

[남은 시간 : 16시 14분]

나는 사이렌의 축복 지속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 같은 법이니까.”

오늘은 왜, 그 소리를 왜 안 하나 했다.

*

마탑의 집무실.

[남은 시간 : 54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장담하겠다.

오늘처럼 고된 하루는 또 없을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과에 시달리는 나였거늘. 그걸로도 부족해서 대폭 상승한 행운의 본전을 뽑기 위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오갔다는 뜻이다.

“나쁘지 않은 하루였군.”

주둥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찻물이 데워질 때까지 찬찬히 되새겨보자.

[집념 : 2]

일단, 고된 훈련 끝에 집념은 1포인트가 상승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흠칫했다.

행운이 대폭 상승했는데.

이런 훈련량에 고작 1포인트면 평상시엔 어떻다는 걸까.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

“요행은 요행에 불과한 법이었군.”

찬물에 우러나는 신상 녹차는 취향이 아니라고.

이런 타이밍에 이야기하지 마라, 그랑펠.

그래도 집념의 효과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고생이었지.

팔굽혀펴기 도중 눈앞이 흐려지던 순간.

상승했던 집념.

그 효과로 상승한 근력이 무려 100포인트였으니까.

‘평생 노가다 탈출은 불가능하겠구나.’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집념은 사기 스탯이 맞았으니까.

앞으로도 꾸준히 기절할 때까지 단련해야겠지……. 물론,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들른 유스라 왕국 집무실에서도 적잖은 성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반가운 성과는 아무래도 국왕, 하쿠나가 직접 전해온 소식이었다.

-“그간 송구했습니다. 비로소 각오가 섰습니다.”

하쿠나는 그동안 검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날붙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칼과 창, 방패를 볼 때마다 고대 왕국 시절 지켜내지 못한 백성들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자라더라도 저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그런 하쿠나가 과거를 극복한 것.

내게는 여러모로 희소식이었다.

하쿠나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도 축하할 일이었지만.

덕분에 내 업무도 조금은 줄어들 것 같았으니까.

조금은 숨통이 틔였달까?

또각─

한결 가벼워진 걸음.

마탑으로 복귀하니,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피지에 떠올라있던 글귀.

필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마르셀로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안부에 감사에.

요란한 수식어를 제외하고.

핵심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

탑주님께서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

마탑 최상층.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 구체 속에서 눈을 감고 부유 중인 탑주.

그런 탑주에게서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움직임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게 아니라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게 고작이었다지만.

‘전례에 없던 일이라니까.’

평소보다 경쾌한 그의 필체.

마르셀로가 얼마나 들떴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물론, 나도 기쁘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진행 중)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성공)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어쨌거나, 막막했던 퀘스트에 진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달칵─

찻잔에 뜨겁게 달궈진 물을 따르며 읊조렸다.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거늘.”

그렇다.

이렇게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대략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물론, 남은 한 시간 또한 알차게 보낼 생각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장할 예정이었거든.

‘만나봐야지, 생명의 은인.’

빗자루를 타고 나타난 이름 모를 각성자를 말이야.

행운이 대폭 상승한 지금이라면.

서로 엇갈려 만나지 못할 확률도 줄어들 터.

그러니까 나는 지금.

사교장 방문을 영 달가워하지 않는 그랑펠을 달래기 위해.

티백 녹차를 우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메뉴판에 별게 다 있던데 녹차는 없다니.’

나는 진지하게 읊조렸다.

“시공간에도 로켓 배송이 시급하겠군.”

.

.

.

나의 육체를 지배하는 그랑펠의 격식이다.

사교장에서는 더욱더 격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바.

한결같이 꼿꼿한 자세는 물론, 그 걸음걸이와 언행까지.

섣부르게 경거망동하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장에 진입한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경고’였다.

“정체를 밝혀라.”

정말로.

마지막으로 장담하건대.

시공간의 사교장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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