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운수 좋은 날 (5)
“쇠약해진 육체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아젠트레스. 네 영혼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파멸한 모양이니. 이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구나, 나의 아우여.”
엘프.
저들이 어머니의 축복을 상실한 순간에도 유낙서스는 반신반의했었다.
제아무리 못난 아우여도, 고결했던 영혼만큼은 한결같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전부 나의 착각이었구나.
유낙서스의 눈동자가 지상의 악을 향했다.
저것이 바로 악마로군.
대륙과 어머니를 이런 꼴로 만든 존재들.
끓어오르는 감정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마계(魔界)로 활강.
저들의 땅을 대륙보다 처참한 꼴로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순 없겠지.
나의 어머니께서 그것을 바라시지 않았으니까.
세계수의 뜻은 유낙서스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이었다.
당신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부탁을 해온 것은.
그러니 따를 뿐이다.
그래, 언제까지고 잠에 빠져있는 것도 무료한 일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간만에 심장이 뛰었다.
‘그 이후로는 처음이군.’
용마대전(龍魔大戰).
찰나의 유희는 나름대로 즐거웠거늘.
이번엔 과거처럼 즐길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목숨을 내던져야 했으니.
“알아듣지 못했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꾸짖어 주겠다.”
늙고 병든 나에게 걸맞은 전장이다.
아우,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은 물론.
억누른 감정을 표출하기에 적합한 악마 하나.
그런 악마와 마주한 인간까지.
모두의 눈빛은 각오가 된 듯 보였으니.
누구 하나 휘말려들 걱정하지 않고 날뛸 수 있겠구나.
‘그대들이라면 어머니의 뜻을 실현할 수 있겠지.’
파지직─!
이내, 유낙서스의 몸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기운.
“!!!”
단순한 마력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얼마나 짙고 방대한 마력이라는 것인가.
마력이 시각화한 것도 모자라 일대의 기후.
심지어는 지형마저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내려치는 벼락이 유낙서스의 전신을 휘감은 순간이었다.
유낙서스의 시야 가운데 ‘무언가’가 난입했다.
그 실체는 작디작았건만, 어째서인가 커다랗게 보였다.
“!”
그럴 수밖에.
무언가, 하이엘이 내려앉은 곳은 유낙서스의 콧잔등이었으니까.
하이엘은 주군, 호열의 뜻을 충직하게 따랐다. 호열을 믿어 의심치 않고서는 또렷하게 말했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명한다.”
“……?”
“진정하시길, 유낙서스.”
드래곤과 엘프는 다르다.
같은 세계수에서 태어났지만, 그 외관처럼 가지고 태어난 능력도 달랐다. 만물의 지배하는 생물, 칭호에 걸맞게 드래곤에게 모자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세계수는 그런 엘프를 가엾이 여겨 축복을 내렸다.
드래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받지 않은 것뿐이다.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들은 태생 자체로 완벽한 존재였으니까.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드래곤인 유낙서스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유효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낙서스는 하이엘의 말에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랬군.’
작디작은 정령에게서 어머니의 기운이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느슨해지고만 유낙서스의 눈빛.
마치 어린 막내를 바라보는 것처럼 따뜻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대여.
“유감스럽게도 그 부탁에는 응할 수 없겠구나.”
유낙서스가 뇌리로 전달해 왔다.
-걱정할 것 없다. 모든 건 어머니의 뜻이니까.
텔레파시.
차원을 찢고 오갈 수 있는 드래곤이다.
그렇기에 그 목소리는 호열에게도 전해졌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명이여.
.
.
.
드래곤이 얼마나 강하냐고?
그건 메시지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엘프에 거악에 초월자가 모인 전장이다.
적정 레벨로 환산하면 일천도 그냥 넘을걸?
어지간해서는 출현 메시지를 출력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나 유낙서스는 보란 듯이 출현 메시지를 띄워냈다.
그런 유낙서스가 [축복의 위계질서]에 멈칫했을 땐 흠칫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진짜 행운이었던 건가.
찰나의 순간, 혼자서 김칫국부터 마셨던 나였으니까.
드래곤을 위계질서로 부려 먹을 수 있다니!
월드 퀘스트, [악룡(惡龍) 사냥꾼]의 클리어는 물론.
드래곤의 능력으로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거잖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최후의 모험가] 효과로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나였으니까.
얼마든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장 속도를 낼 수 있을 터.
그러나, 김칫국이 괜히 김칫국이겠냐고.
나, 이호열.
누나만 셋인 막내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유낙서스의 시선.
그건 나를 바라보던 웬수들의 눈빛과 똑같았다.
흠칫하기도 잠깐, 머릿속으로 유낙서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텔레파시.’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완벽히 다른 두 세계.
일반적으론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드래곤만큼은 예외겠지.
균열에 얽매이지 않고,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오가는 데 텔레파시 정도야.
내가 놀란 건 텔레파시의 내용 때문이었다.
‘여, 여명?!’
그 민망한 이름을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아니지.
그것보다.
‘……죽는 게 어머니의 뜻이라고?’
첫 만남부터 대뜸 유언을 남기는 게 어딨어?!
나야 굴러 들어온 자식이니까.
집안 사정, 세계수의 뜻 같은 건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가족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위도 없다.
막내 취급은 집에서도 실컷 받고 있거든.
게다가.
‘아니, 뜻이고 나발이고.’
유낙서스 씨.
그쪽이 날뛰시면 이쪽이 곤란해진다니까요?
엘프에 거악에 초월자만 하더라도 충분히 벅차단 말이다.
그런데 드래곤이라니.
균열의 클리어를 떠나 균열 자체가 버티지 못할 스케일이었다. 균열 생성 후, 얼마 가지 않아서 균열 붕괴도가 100퍼센트를 돌파해 버리겠지.
‘그런 게 도심지에 생성된다면…….’
그 전투의 여파로 도시가, 나라가, 대륙이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나는 잘도 입을 놀렸다.
“세계수의 뜻이라니. 착각이 지나치군.”
태연하게도.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황제도 모자라서.
드래곤, 세계수 앞에서도 한결같이 꼿꼿하구나, 그랑펠.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였다.
유낙서스의 말만 들었을 땐.
세계수가 유낙서스의 죽음을 원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래도 가정사는 들어보고 싶다는 거지, 굴러 들어온 막내로서.
“대화가 필요하겠군, 유낙서스.”
물론, 텔레파시도 혼잣말도 닿을 리가 없으니.
나 혼자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았을 뿐이지만.
잡설은 거기까지였다.
이젠 정말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
‘나도, 하이엘도 최선을 다했어.’
이쯤에서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럼에도 이 개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그나마 위안할 거리는 균열 생성 시기를 늦췄다는 것 정도려나.
‘균열에서 모든 걸 쏟아부을 수밖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균열이 생성되면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답답하진 않겠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입은 쉬질 않는다.
“나는 행운 따위 믿지 않는다.”
어쩐지, 그 소리를 이번에는 왜 안 하나 했다. [행운]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하려고 할 때마다, 미신을 운운하며 훼방을 놓던 그랑펠의 똥고집이 아니던가?
펄럭─
타이밍 좋게도 불어오는 바람.
“행운도 운명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요.
내가 속으로 빈정거리던 순간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하늘에서 포탈의 빛무리가 일렁였다.
……잠깐, 빗자루가 하늘을 날고 있다?
말 그대로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빗자루.
그런데 빗자루 위에 올라탄 여인이 낯설지가 않았다.
저 치렁치렁한 복장.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본 것 같은데?’
확실하다.
우르스와 더불어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내게 관심이 없던 또 한 명의 초월자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우르스보다 심했었지. 저쪽은 아예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는 단 한 번도 들어올리지 않았었으니까.
‘갑자기 또 뭔데.’
당연하게도.
나는 이 개판에 그녀가 등장한 이유 따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긍지에 가라앉아도 주둥이만큼은 떠오를 것 같구나, 그랑펠.
.
.
.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는 망망대해를 날았다.
남은 『영약 궐련』은 단 한 개비.
씁, 입맛을 다신 마녀는 아래로 보이는 남녘 바다를 노려봤다.
“……문어 대가리가.”
심해 속에서 수천 개의 다리가 꿈틀거린다.
빌어먹을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무엇하나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부터 환청이 들려온다.
『도망가도 소용없다.
운명을 받아들여라.
네 손으로 종말을 시작하라.
고통스러운 삶을 애써 부여잡지 말거라.』
“진짜 궐련 땡기네.”
『바다의 대흉』.
놈의 저주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값비싼 영약 궐련을 태울 때밖에 없었다.
심정 같아서는 사교장에서 궐련이나 태우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고 싶었건만.
쿠르릉─!!
거대한 기운이 넘실대는 대륙을 보면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흡연 욕구도 참아내고 쉴 새 없이 비행한 덕분인가.
어느덧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건만.
그 풍경조차 잊어버려 포탈조차 열 수 없었건만.
마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세월이라는 게 참 무서워.”
개 같은 기억은 미화시키고.
그나마 좋았던 기억만 남겨두니까 말이야.
당신께서도 제 말에 동감하시겠죠?
“그러니 돌아오신 거겠죠.”
마녀는 지체하지 않았다.
영약 궐련의 부작용.
뿌예진 기억 속에서 제로 산맥 인근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풍경을 그려 좌표를 포착.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과정은 더없이 신속했다.
마녀는 포탈에서 빠져나온 뒤 목격했다.
드래곤, 엘프, 거악, 초월자.
대륙이 요동치던 원흉을.
마녀는 혀를 찼다.
정말로 세월이 무섭다.
“마계도 그렇고, 시슬리도 그렇고, 제로 산맥도 그렇고.”
과거에는 다들 정말 얌전했었는데 말이야.
마녀는 품속을 뒤졌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끼워 꺼내는 건 마지막 한 개비의 영약 궐련.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득이하게 마력을 써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 전에 머리를 맑게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종말을 시작하라.
연기를 들이켜자 귓가에 맴돌던 『바다의 대흉』의 목소리가 옅어진다. 그래, 그렇게 닥치고 있으라고 문어 대가리. 지금부터는 너도 듣는 처지가 되어야 할 테니까.
“후우─”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연기.
마녀는 전장을 내려다봤다.
자연스럽게 가장 낯익은 얼굴로 시선이 갔다.
우르스.
처음 사교장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정말 햇병아리 같았는데.
내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이에.
삐뚤어져도 한참을 삐뚤어진 길을 선택했구나.
“뭐, 귀쟁이들은 한결같이 재수가 없고.”
싸가지에 비해 과분한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엘프.
대체 무슨 복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마녀는 그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뱉었다.
“여전히 목청 하나는 끝내주시고.”
드래곤, 유낙서스에겐 그다지 감정 없음.
마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옮겨갔다.
“그중에서도 너는 특히 눈치가 없구나.”
칠죄종, 탐식을 향하는 눈초리.
바다의 대흉을 노려볼 때에도 평온하던 마녀의 심기가 격하게 요동을 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내뱉을 이야기에는 이 자리의 누구도, 심지어는 나조차도 무관할 수 없었으니까.
고오오오─
격동하는 마녀의 마력.
덕분에 전장 모두가 마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졌는지를 떠나서.
이 자리 모두에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작되는 마녀의 말.
“다들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면 어떨까 싶은데.”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마, 말도 안 돼!!”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
모두가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나는 내 목숨에 맹세코 말할 수 있어.”
마녀는 말을 이었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