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운수 좋은 날 (4)
아젠트레스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손과 발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움직여 보려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봤거늘.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젠트레스 님……?”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동족, 모두가 자리에 멈춰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엘프조차도.
‘저건 대체.’
아젠트레스의 시선이 하이엘을 향했다.
처음에는 정령왕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나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정령은 정령의 왕, 그대들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의문이었다. 정령왕이 어찌하여 대륙의 일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다행히도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라 명한다.”
……주군이라고?
괜히 왕이란 칭호가 붙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기에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풍겨오는 기세로만 보자면.
정령왕보다도 상위 존재일지 모르는 저 정령에게.
진정으로 섬기는 주군이 있다는 말인가?
‘대륙에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내린 판단은 또 한 번 어긋났다.
아젠트레스의 동공이 확대됐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멈추어라.”
축복의 위계질서……?
그 어떤 마법도, 정령의 자연 능력도 감히 자신들의 몸을 옥죄어 올 순 없다. 틀림없다. 저 말대로 이건 아둔한 우리의 어머니, 세계수의 힘이다.
“어라라라.”
악취가 느껴진다.
칠죄종, 악마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알을 굴린다.
감히 이 몸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손을 흔들어댄다.
“이야, 이거 진짜로 멈춰버리셨네요? 우리 콧대 높으신 손님들께서 이렇게 순순히 멈추란 소리에 따를 리는 없겠고…….”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뭔진 몰라도 잡힌 거구나. 약점.”
나를, 엘프를 능멸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식사고, 거래고, 영생이고.
다 때려치우고 녀석의 목을 절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너는 누구냐.”
하이엘을 향해 간신히 말을 잇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러나 짧은 한마디에 담긴 살의는 더없이 흉흉했다.
거악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야, 이래서는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네.”
그러나 호열의 분신이다.
작디작은 몸집을 가진 하이엘이었거늘,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더없이 올곧은 자세며 더없이 한결같은 표정까지.
하이엘은 답했다.
“나의 주군께서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
“그대에게 물을 자격은 없다.”
정확히는 받아쳤다.
“감히…….”
더욱더 거세지는 아젠트레스의 살기.
그건 깔깔거리던 거악조차 눈치를 보게 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되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고고한 하이엘의 목소리뿐.
“엘프여, 그대는 어째서 거악과 마주했는가.”
“!!”
그 질문엔 아젠트레스는 물론, 거악까지 흠칫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하이엘은 조금 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으니까. 식사에 관한 것은 물론, 거악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다니.
“씁. 오래 살았어도 유명인사까진 아닌데 말이야.”
그런 하이엘의 비범함은 거악조차도 경계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저런 말도 안 되는 정령에게 섬기는 주군이 존재한다는 것.
‘어디냐.’
아젠트레스는 감각을 일깨웠다.
분명, 주군이라는 자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
드높은 상공의 드워프조차 알아차렸던 엘프의 감각이다.
그 신경을 한껏 곤두세웠건만.
‘없다.’
언제나처럼 하늘에 뜬 마안(魔眼)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이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의 주군께선 잡생각 또한 허가하지 않으셨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는 잡념.
“주군의 질문에 답하라.”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
“……영생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굴욕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말을 내뱉은 자신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치욕이다.
하지만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헛된 것을 쫓았구나.”
“……?”
“그대가 갈망하는 세계수의 축복은 나의 주군께서 거머쥐고 계시니까.”
그랬구나.
그 주군이란 놈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어머니의 축복을 앗아간 존재로구나.
아젠트레스는 그 순간, 판단을 내렸다.
세계수의 축복의 행방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악마의 힘은 필요치 않았다.
‘녀석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면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모습을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만.
결국, 아르카나 대륙에 있을 터.
대륙 전역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깐만, 장사 방해는 이야기가 조금 다른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거악.
칠죄종, 식탐이 아니었다.
목적 달성이 코앞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정령 하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진다고?
“유감이지만, 손님 여러분.”
엘프를 향하는 식탐의 눈매.
“허가되지 않는 메뉴는 폐기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잔머리 굴리지 말고 똑똑히 지켜보라고.
식탐은 악취를 흘리며 하이엘에게 다가갔다.
찢어진 것처럼 흉측하게 벌어지는 주둥이.
인간의 가죽에 가려져 있던 거악의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규율이라는 거 나한테는 효과가 없는 모양이니까.”
세계수라니.
나는, 내 형제들은.
그런 어머니 둔 적이 없거든.
“……?”
그러나 식탐은 하이엘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식탐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으니까.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우르스였다.
철컥─
우르스가 철완을 들어 올렸다.
식탐은 멈칫했다.
‘인간?’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은 인간을 초월한 것이었다.
설마, 이 녀석도 셰그윈과 같은 초월자인가?
아젠트레스도 흠칫한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놓쳤다?’
신경을 곤두세웠을 때.
우르스는 틀림없이 감각의 반경 안에 있었다.
그럼에도 놓쳤다는 건.
사내가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것.
목적이 있는 난입이라는 뜻이었다.
엘프, 거악, 초월자.
드디어 서로가 마주한 순간.
우르스는 입을 열었다.
“엘프든 정령이든 누구든 좋다.”
이어지는 말에 아젠트레스는 다시금 확신했다.
“부디 내게 세계수의 위치를 털어놓아라.”
아무래도 모조리 도륙을 내야겠다고.
*
[마안(魔眼)의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난장판이 기어코 개판이 됐구나.
엘프야 [축복의 위계질서]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악하고, 우르스는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고생했다, 디엔드.’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
그들이 폴스타의 주민을 구출해 안토니움으로 고삐를 돌리는 데까진 성공했으니까. 일단, 거악의 계획 하나는 막아낸 셈이였으니까.
그나저나 진심으로 치졸들 하시군.
‘다들 이름값 좀 하면 덧이라도 나는 거냐고.’
그런 의미에선 잘하고 있다, 하이엘.
정말로 그랑펠 뺨칠 정도로.
하이엘이 뒷일 생각 없이 나서준 덕분에.
지켜보기만 하던 나도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거든.
일단, 엘프는 정말로 한결같았다.
“긍지 없는 무의미한 삶을 갈구하는 것인가.”
영생?
받은 것도 되돌려주고 싶다고, 나는.
아니, 평생 흑역사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끔찍한데. 흑역사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악한 짓을 대가로 영생을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진짜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괜히 너희 어머니가…….’
아니, 세계수가.
축복을 앗아간 게 아닌 것 같다.
그 난폭한 엘시도어는 양반이었다고 느껴지게 할 정도라니.
하나같이 얼마나 개차반인 거야, 성질머리들이.
우르스도 참 여전했다.
‘세계수가 목적일 줄이야.’
엘프와 거악이 대화를 나눌 때는 별 관심도 없어보이더만. 하이엘이 나타나고,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우르스는 전장에 끼어들었다.
‘그놈의 영약 사랑.’
만물의 어머니인 세계수다.
그런 세계수에 내재된 기운은 영약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단지 어느 누구도 세계수를 씹어 삼킬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그러나 우르스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적의 일화만 보더라도, 영약을 향한 우르스의 광기는 세계수를 뿌리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진짜 꼬여도 엄청나게 꼬였다. 이거.’
각자의 이유로 다들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대로라면 정면충돌은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대형사건.
균열 생성까지도 시간문제겠지.
나는 망원경을 바라봤다.
[손길에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일시적으로 망원경 조작에 능숙해집니다.]
[효과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병 주고 약 주냐?
어쨌든, 대폭 상승한 행운이 도움되기는 했다. 사실 망원경의 지속시간은 제국군이 폴스타에 도착했을 때쯤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진 똘망똘망 눈을 뜨고 있군.
그래, 너라도 양심이 있다면.
되도록 눈을 감을 생각은 하지 마라, 망원경아.
‘하이엘에게 저 전장은 무리야.’
나와 함께라면 모를까.
하이엘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하이엘이 저 삼파전에서 활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막말로 축복의 위계질서를 요령껏 활용하면 또 모르지만.’
그랑펠을 쏙 빼닮은 하이엘이다.
나, 이호열처럼 잔머리를 굴려 위계질서를 써먹을 리가 있겠냐고.
결국,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말은 참 술술 나온다.
젠장, 균열이라는 변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나.
4배속으로 그에 관한 전략을 세워본다.
지금 당장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쿠릉─!
“……?”
그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잊고 말았던 것이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그런 시스템을 통해.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를.
쿠쿠구구궁─!
아르카나 대륙에 쏟아지는 뇌우(雷雨).
이내, 대륙의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 차원의 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이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다.
드래곤이다.
.
.
.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대륙에 울려 퍼진다.
그 울음소리는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당장에라도 맞붙을 기색이었던 우르스와 식탐조차 멈추게 할 정도였다.
“흐음.”
노룡, 유낙서스는 황폐해진 아르카나 대륙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거대한 동공으로 엘프를.
정확하게는 아젠트레스를 바라보았다.
유낙서스가 말했다.
“아젠트레스.”
어머니시여.
“나의 어리석은 아우여.”
어찌하여 당신께서.
저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가셨는지 알겠습니다.
유낙서스가 우레와도 같이 꾸짖었다.
“아직도 어머니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생물, 드래곤.
어머니의 축복 없이 드래곤 로어에 정면으로 노출된 탓인가.
전율하는 전신의 감각들.
그러나 덕분에 빌어먹을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젠트레스가 우득─거리는 목을 풀며 답했다.
“다물어라, 유낙서스. 도마뱀 자식아.”
.
.
.
그러니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엘프의 이름이 아젠트레스고…….
그런 아젠트레스가 드래곤, 유낙서스의 아우라고?
이건 예상치 못한 출생의 비밀인데?
잠깐만, 그러면 족보가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세계수.
드래곤.
엘프.
그리고…….
나랑 하이엘?
순간, 나는 설마 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위계질서가 드래곤한테도 유효한 건가?’
거기까진 확신할 수 없다.
설령 형제라고 하더라도 드래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엘시도어도 축복은 오직 엘프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했었으니까.
게다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세계수 족보의 막내로서 부탁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큰형, 쟤들 좀 어떻게 좀 말려 봐!
나, 이호열.
누나만 셋.
조르기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건만.
유낙서스는 더욱더 격노해 울부짖고 있었으니.
“알아듣지 못했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꾸짖어 주겠다.”
떠오르고야 말았다.
[노룡(老龍),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출현합니다.]
본격적인 출현 메시지가.
진짜로 말리기는커녕 싸우러 온 거구나.
형보다 누나가 낫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시도해 보자꾸나, 하이엘.
유낙서스에게도 [축복의 위계질서]가 유효한지를!
.
.
.
하이엘이 유낙서스의 콧잔등 위에 서서 말한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명한다.”
“……?”
“진정하시길, 유낙서스.”
“……!”
그러자 우레가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