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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07화 (207/489)

◈ 207화. 운수 좋은 날 (3)

제국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황제는 찰나의 평화 속에서 판단했다.

수도성, 안토니움만 하더라도 그렇다.

제국 영토 대다수가 파괴된 지금 추가적인 식량 조달은 없다. 당분간은 제국의 창고에 저장된 식량으로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는…….

“그런가.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때문에 드워프의 지도자, 체인워커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각오하고 있던 덕분이겠지.

“대신들은 들어라.”

황제는 신하들 앞에서 선언했다.

“그대들이 알고 있던 찬란한 제국은 무너진 지 오래다. 악마와의 전쟁으로, 부끄러운 내전으로. 우리의 제국은 붕괴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다.”

“……!”

황제 폐하께서 스스로 저런 말씀을 하실 줄이야.

신하된 자로서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이들에게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제국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안토니움의 백성이 짧게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분인가?”

아첨하기 좋아하는 간신이 있었다면.

이쯤에서 황제 폐하의 이름을 부르짖었겠지.

그러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제국이다.

아첨할 간신배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답한다.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덕분입니다.”

그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모험가, 이호열 경 덕분이다.”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검성, 셰그윈을 비롯한 반군 연합을 안토니움에서 퇴각하게 한 그였다.

황제의 음성이 더욱더 결연해졌다.

“그는 황제인 나를, 제국의 수도인 안토니움을 특별히 여겨 구원한 게 아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변두리 영지, 드레드센 또한 구원해 냈으니까. 그렇다. 모험가가 황제인 나조차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을 통해 퍼진 호열의 영웅담.

황제는 그 일련의 경험에서 깨달았다.

“그는 어떠한 시련에도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합리화하지 않은 것이다. 타협하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긍지를 관철한 것이다.”

나는 황제다.

나야말로 제국의 중심이기에 결코 휘청거려서는 안 된다.

황제의 자리를 핑계로 도피해 온 자신과는 다르게.

하지만 깨닫게 된 지금.

황제에겐 더 이상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다.

다그닥─

갑옷도 모자라 투구까지 착용한 황제가 기병들 앞에 섰다.

모인 병력은 대략 오천(五千).

안토니움에서 용맹하기로 손꼽히는 병사들을 추려낸 것이었다.

황제는 가감 없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사지(死地)로 돌격할 것이다.”

그래,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리라.

자신들에게 방해되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든 다짜고짜 살의를 드러낸다는 엘프 무리.

과거, 아르카나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미치광이 철완의 우르스.

그리고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인가.

마왕, 이상으로 악기(惡氣)를 내뿜는다는 악마까지.

그런 전장에서 기껏해야 5천의 제국 병사들?

드워프들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엘프의 화살 한 방에 전멸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황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곳에 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목적지는 제로 산맥 인근의 소도시, 폴스타.

현재 생존 중인 백성의 수는 대략 삼천 남짓.

삼천이라, 절대 적지 않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하겠지.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지 않으냐고.

고작 작은 도시 하나에 황제가 움직일 필요가 있느냐고.

그자를 비난하지 않겠다.

자신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것은 계산의 영역이다.

“내 사전에 저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긍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두려운가?”

황제가 묻는다.

“아닙니다, 폐하─!”

사기충천한 대답이 이어진다.

안토니움에서 병사로서 생존한 이들이야말로 무수한 생사의 고비를 넘어왔을 터.

거기에 황제가 진두지휘하는 지금. 사지로 향하는 병사들의 기세는 오히려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다그닥─

출정.

안토니움을 떠나는 황제.

제국 최고위 마법사, 내쉬 윌리엄은 각오를 다졌다.

“폐하, 저도 원정에 함께하겠습니다.”

형님과 다르게 마탑에 입성조차 하지 못한 자신이다.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쉬에게 황제는 대꾸했다.

“불허한다.”

“……네?”

“내쉬, 그대는 안토니움을 지키는 방패다.”

“……!”

“그대라는 방패로 고작 나를 지킬 생각은 없다.”

감동적인 말씀이었거늘, 내쉬는 내쉬였다.

형님, 저는 정말 폐하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게 맞을까요?

제 능력이 부족해서 써주시지 않는 건 아닐까요?

결국, 반신반의하면서도 대답했다.

“……내쉬 윌리엄,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

망원경이 비추는 풍경.

디엔드가 전해 온 소식대로였다.

정말, 황제가 직접 이끄는 제국군이 난장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책임져라, 그랑펠.

전부 너한테 물든 덕분이잖아!

‘전염병도 아니고, 뭔데, 진짜.’

그렇다.

이번에도 긍지가 문제였다.

솔직하게 긍지가 넘치는 행보이긴 하다.

혹시라도 백성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서는 황제라니.

좀 감동이네.

“그대도 비로소 깨달은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제를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지 마라, 그랑펠.

게다가 마냥 흡족해할 일이 아니라고, 이건!

왜, 아까도 말했었잖아?

절대적인 열세.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는 마탑을 비롯.

온갖 강자들이 합류한 이쪽의 연합군조차도 열세란 말이다.

제국이라고 다를까.

심지어 황제의 검이나 다름없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조차도.

이곳, 현실에 떨어진 상황이란 말이다.

‘이런 말까지 하긴 싫지만.’

제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다.

누구 하나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는 순간엔 황제를 포함.

전원이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이 절망스런 상황에서 잘도 입을 털었구나, 그랑펠.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니!’

일단, 나의 최선을 떠올려본다.

말했다시피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방법은 없었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의 효과를 아껴뒀다면 모를까. 그 효과는 상실한 지 오래전이었으니까.

‘현재 마법부여학 수준으론 복구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나와 달리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디엔드.

그리고 하이엘을 통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건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

{고유 정령}, 하이엘.

어둠의 정령, 디엔드.

정령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둘이라고는 해도.

저 난장판 속에서 활약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하이엘과 디엔드야.

여러모로.

내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니까.

‘제국군을 보호하는 데까진 성공한다고 치자고.’

그런데.

황제와 제국군.

그리고 폴스타의 백성까지 구원한다고 해서 이 대형사건이 끝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원하는 건 저 난장판이 균열을 통해 현실로 넘어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일단락을 짓는 거란 말이다.

“디엔드.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일단, 디엔드를 제국군에게 합류시키는 건 바뀌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거악, 엘프, 초월자라는 건데…….

그나마 다행인 건 초월자의 정체라도 알아낸 건가.

“그대가 바로 소문의 우르스였군.”

『철완의 우르스』.

알려진 것만으로 수십 개의 영약을 섭취했다는 서적 속의 인물.

그 덥수룩한 머리칼의 사내가 우르스였다니.

영약을 큰 부작용 없이 섭취할 수 있는 타고난 체질 덕분에 초월자가 되고, 정말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거겠지.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되네.’

긴 세월을 살며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고 살아왔을 테니까.

내가 사교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든, 유난을 떨든, 뭐든.

큰 관심이 없던 거겠지.

‘그런 우르스가 움직였다라…….’

이유는 모르겠다만, 제발 서로들 시비만 붙지 않기만을 바란다.

하여튼, 자각이 없다.

당신들은 전부 다 거물이라니까? 작은 다툼이 일어나도 곧바로 대형사건. [전장] 균열이 생성되고, 긴급 업데이트가 떠오를 수도 있단 말이다.

하지만 나의 절박한 속내와 달리.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으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봐요, 그랑펠 씨.

듣는 사람 없다고 막말하기야?

그러나 드높은 긍지께서 내 눈치를 볼 리가 있나.

“아니, 그편이 옳겠구나. 내가 그대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그대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순리일 테니까.”

……진짜 미쳤나 봐!

하여튼 우리 위대한 가문 후계자님의 콧대 한번 높으시다.

거악이든, 엘프든, 우르스든, 주눅이 드는 법이 없다.

그야말로 항상의 자세다.

그런데.

“……!”

덕분인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언제나처럼 냉철한 머리.

덕분에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나와 악마 사이의 천적관계.

그걸 뛰어넘는 ‘또 하나의 천적관계’를……!

[축복의 위계질서].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에 묶여있는 나였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엘시도어에게는 [축복의 위계질서]를 들먹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엘프들에게 위계질서의 효과를 바랄 순 없다는 뜻.

하지만 말이야.

[첫 세계수의 축복].

그거 나만 받은 게 아니거든.

그랬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격’까지 상승한 존재가 있었으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그 이름을 불렀다.

“하이엘.”

*

태초의 산맥.

제로 산맥조차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추다니.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이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젠트레스는 동족들을 바라보았다.

가엾게도 어머니의 축복을 상실한 이들.

더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게 됐다.

모두가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젠트레스에게 엘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송구합니다, 로드. 놓치고 말았습니다.”

상공에서 느껴지던 불순한 시선─

그 형편없는 고철 덩어리는 드워프 놈들의 것이었겠지.

짤막한 몸뚱이를 화살로 꿰어버리라고 명령했건만.

기껏해야 이 정도 거리에서 화살이 빗나갈 줄이야.

‘천운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래, 모든 책임은 어머니.

우리에게서 축복을 앗아간 아둔한 세계수여.

그대에게 있는 것일 테니까.

저벅─

“어떻게 고민은 끝난 건가?”

아젠트레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존재를 바라보았다.

외관은 틀림없이 인간.

그러나 ‘존재’라고 칭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악취.

그건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뭘 그리 노려보는 거지? 그쪽들이 원하는 건 간단하잖아, 영생! 밥상은 내가 저쪽에 깔끔하게 차려놨다니까. 솟구치는 ‘식탐’에 솔직해지기만 하면 된다고.”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며 수많은 악마와 만났던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악마는 그들과 무언가 달랐다.

인간도, 악마도 아닌.

제3자.

엘프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다르다.’

아젠트레스는 대륙에서 참살한 악마들을 떠올렸다.

악마는 하나같이 멍청하며 저열했다.

인간보다 무식한 존재가 바로 악마였다.

왜냐고?

-“제, 제발 목숨만은……!!”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엘프? 썩 괜찮은 몸뚱이구나.”

악마들은 주제도 모른 채 되려 달려들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악마는 달랐다.

무엇보다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악마라고 다 같은 악마가 아니라고 그러네. 나는 결이 조금 다른 악마라니까? 누구보다 당신네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지.”

-“?”

-“나도 영겁을 살아왔거든. 좀 복잡한 존재라서.”

칠죄종.

악마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칠총사 중 누군지는, 어차피 그쪽도 관심 없을 테니까. 소개는 생략하지. 내가 제안하는 건 하나. 단지 선택지 하나를 소개하려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지금이었다.

“간단하지? 타락하면 영생을 되찾을 수 있다.”

아젠트레스는 그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엘프인 자신부터가 영겁의 존재였다.

덕분에 상대가 정말로 영겁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쿠릉!

아젠트레스는 뇌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나를 책망하는 것 같군요, 아둔한 어머니시여.

작게 읊조렸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은…….”

아젠트레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당신께서 먼저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생기를 잃어가는 몸을 바라본다.

칠죄종에게서 제안을 들었을 때부터.

내렸던 결정은 단 한 순간도 바뀌지 않았다.

먹겠다.

“좋아요. 다들 제가 차린 식사가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칠죄종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메뉴명은 ‘폴스타’입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저벅저벅─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을이었다.

이제 와서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짓에 불과했으니까.

칠죄종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예상치 못한 애피타이저까지 도착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죠? 뭐, 우리 손님들에게 저 정도쯤이야.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다그닥─

들려오는 건 말발굽 소리.

아젠트레스는 입을 열었다.

“식탐은 죄악이다. 넘치는 것은 버려라.”

타락?

착각하지 말 거라.

우리는 그저 악마의 힘을 이용하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칠죄종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찰나였다.

“이전의 실수를 만회하겠습니다.”

끼긱─!

곧장 활시위를 당기는 엘프.

과연, 수천의 병사를 한 입 거리라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화살촉에서 일렁이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마력.

그러나.

“……?”

당겨진 활시위가 놓이는 일은 없었다.

엘프와 폴스타의 제국군.

그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작디작은 무언가.

그것은 더없이 고아했다.

‘정령왕……. 아니, 그 이상.’

아젠트레스마저 착각하게 할 정도로.

우아한 외관을 뽐내는 정령.

그 정령이 곧, 입을 열었다.

“나,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라 명한다.”

마치 ‘누구’처럼 더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

“멈추어라.”

“……!!!”

그러자 아젠트레스와 일백(一百)의 엘프가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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