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05화 (205/489)

◈ 205화. 운수 좋은 날 (1)

심미가 발현한 위풍당당한 개선문.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던전의 심장부가 있고.

던전의 보스몹인 사이렌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괜히 [上] 등급의 추가 효과가 아니라는 거구나.

‘길찾기 서비스야, 뭐야.’

십만 개의 동굴.

이제 고작 첫 번째 동굴이었거늘.

시작부터 용암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꼴.

막막함에 자괴감에.

현자타임이 찾아올 뻔한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으니.

‘잘하면 앞으론 솔플도 가능하다는 거잖아?’

결국, 파비앙이나 탐험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였다.

딱히 파비앙을 꺼릴 이유는 없었지만.

호열 경부터 호열 총사령관님까지.

파비앙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꺼려지는바.

‘하이엘, 디엔드, 귀철도 모자라서 파비앙까지?’

그들의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뭘, 클리어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현기증으로 쓰러질지도 모를 것 같았으니까. 심미에 감사하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퀘스트 : 용암의 사이렌]

퀘스트가 떠오르더니 지금이었다.

♪♩♬─

울려 퍼지는 사이렌의 청아한 목소리.

디엔드는 드디어 입을 다물었고.

하이엘은 지그시 눈을 감고 감상평을 쏟아냈다.

“듣는 이까지 행복하게 해주는 노래로군요.”

과연, 하이엘.

그랑펠의 분신답게 교양에 있어서만큼은 빠지는 구석이 없구나. 물론 클래식 음악과는 담을 쌓은 나, 이호열의 귀에도 감미롭기는 하다.

‘그나저나.’

슬그머니 확인하는 마력량.

단숨에 절반이나 써버렸다.

그럴 만도 하다.

‘원래 섬세한 조절이 어려운 법이니까.’

무작정 얼려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용암을 바다처럼 차갑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때문에 절대영도 대신 일반적인 빙결마법을 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하여튼 그랑펠 고집 한번 들어주기 빡세네.

─용암의 사이렌을 처치하라. (실패)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성공)

그럼에도 선택지 중에서 아래를 고른 건 잘한 짓 같았다.

그 사정을 모를 때는 몰라도.

알고도 사이렌을 처치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테니까.

무려 800레벨짜리 던전 보스 몬스터.

경험치가 아깝기는 하다만.

몬스터가 사이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경험이 쌓이고 짬밥을 먹어서일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던전에 몬스터가 존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배경과 설정이 뒤따르는 것도 당연한 거고.

그러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아르카나는 코스모, AAU의 영역 밖에 있었다.

AAU가 제공하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듯.

개발 단계에선 콘셉트에 불과하던 것들이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들은 단지 균열을 통해 현실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각자가 배경과 설정을 가지고서는.’

그래, 그것이 AAU가.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유였지.

‘사이렌에게도 사연이 있던 거야.’

나는 그런 사이렌을 처치하는 대신.

그 사연에 얽힌 퀘스트를 해결한 거고.

‘빡세다. 빡세.’

텟퍼른에서도 느낀 거지만.

어째 그 사연이라는 거 한 번도 쉽게 알려주는 법이 없다.

구시렁거리는 와중,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입니다, 주군.”

사연 있는 자들의 동병상련이라는 건가.

먹구름처럼 물기를 머금은 디엔드.

역시나 그랑펠의 분신답게.

못지않게 손이 많이 가는구나, 너도.

‘내가 아니면 누가 달래주겠냐, 또.’

하지만 그 전에.

퀘스트 보상부터 확인하자.

[던전 : 용암의 사이렌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던전의 보스인 사이렌을 처치하지 않았건만.

클리어 메시지는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 말인즉.

나랑 사이렌은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아니란 거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게는 사이렌이 시스템상으로 몬스터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나.

♪♩♬♩♪─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차가운 용암을 헤엄치는 모습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게다가 연달아서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숨겨진 장소 : 용암의 바다에 진입하셨습니다.]

숨겨진 장소.

던전이 그 명칭부터가 바뀐 것이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과 같은 지역처럼.

[용암의 사이렌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용암의 바다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용암의 사이렌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군.

해당 지역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해당 지역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뜻.

‘잠깐만.’

……이거 경험치를 아까워할 일이 아니었다.

나 지금 제로 산맥 알박기에 성공한 거 아닌가?

십만 동굴 공략은 물론.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세웠단 소리지.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이번만큼은 한껏 폼을 잡아도 인정이다, 그랑펠.

먼 미래를 생각해 보자.

경험치보다 이쪽 선택지의 보상이 훨씬 나아 보였거든.

‘지금이야 내 거품에……. 그것도 아주 풍성한 거품에 가려져서 악마 쪽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눈치였지만.’

성전에서만큼은.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은 변함없는 열세였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제3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를 아군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물론, 사이렌만 특이한 경우일 수도 있겠지.’

까놓고 인간과 악연으로 얽힌 몬스터도 얼마든지 존재할 테니까.

그러나 그걸 착각할 염려는 없다.

그래, 내게는 [심미]가 있었으니까.

그냥 길이 열렸을 때만.

퀘스트가 떠올랐을 때만.

따라가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말했다시피 쉽지 않은 길이다.

‘아니, 막말로 방금 사이렌만 하더라도.’

그 사연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걸 실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나부터가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사기 버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니까.

웬만해선 실패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의미에선 나, 대단한 일을 해낸 걸지도……?

“때론 낯선 길의 풍경도 나쁘지 않군.”

그러나 긍지 높으신 그랑펠 님께서 자신의 고생을 남에게 생색을 내는 법이 없었으니.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건 역시 시스템밖에 없구나.

[사이렌의 노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남은 시간 : 23시 59분]

‘!’

음알못인 내 귓구멍에도 음색이 참 감미롭구나 했더니, 버프였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행운] 스탯 상승 버프였다.

‘대폭 상승이라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행운] 스탯의 역할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행운.

작게는 치명타를 때리고, 회피하게 해준다든가.

크게는 장비 강화를 성공하게 해준다든가.

기껏해야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거지.

하지만 역시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나였다.

왜, 1포인트씩.

[행운]에 적선하듯 투자할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그리고 그런 [행운]을 미신이라고 외면했을 때는?

‘갑자기 마왕이 쏟아지질 않나.’

하여튼, 난리가 났지.

그런 의미에서 이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였다.

버프의 지속시간은 오늘 단 하루.

남은 하루를 더없이 알차게 보내야 할 이유가 생긴 것.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이곳을 네게 맡기마.”

백 마디 말보다 우리 사이엔 텔레파시가 효율적이지.

던전에서 지역이 됐으니까. 지역이라 부를만한 기반이 필요할 터.

당장은 어떻게 발을 디딜 공간부터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저 하이엘, 주군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 역할을 해줄 건 막대한 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났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 막대한 열기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블러디아 관상목’이다.

고오오─

하이엘은 곧장 {자연} 능력을 발현했다.

그러자 용암의 바다.

그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블러디아 관상목들.

관상목답게 화려하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입에서 그랑펠어가 쏟아진다.

“순수한 땅에 걸맞은 순수한 속내구나.”

해석하자면 나무의 줄기가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게 나무 주제에 피와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용암이 뿌리, 줄기, 이파리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이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 같았거든.

─?

문득, 멈춘 노래.

사이렌이 용암 속에서 얼굴을 반만 내밀고는 자라나는 관상목을 살피고 있다. 놀랄 만도 하다. 실시간으로 울창해지는 게 보일 정도의 성장 속도였으니까.

뭐, 내게는 익숙하지만.

‘비약초를 영약으로 키워낸 축복이라고.’

블러디아 관상목쯤이야.

쑥쑥 자라나게 하는 게 당연하지.

어느새 두꺼워진 나뭇가지가 발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안심하고.’

이제,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를 제대로 써먹어야 할 시간이 왔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사냥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레벨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면서도.

레벨을 올려야만 하는 모순에 빠진 상황이 아니던가.

몸을 돌리자 눈치 없이 펄럭거리는 재킷─

‘한참 남은 레벨 제한은 둘째 치더라도.’

[집념]의 효율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레벨을 올려 스탯 포인트를 획득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목표 좌표는 제로 산맥.

이제부터.

사연이 없는 몬스터는 두려움에 떨도록 하라.

“따라오너라, 디엔드.”

*

어나더 스페이스 호.

지구 위를 공전하는 또 하나의 우주정거장.

대격변 이후.

균열에 대응하기 위해 떠오른 AAU 소속의 우주선이었다.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균열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게 바로 어나더 스페이스 덕분이었다.

포착되는 이상 징후 없음─

계기판을 들여다보던 중년 사내.

그는 간만에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진짜 없는 거구나, 정기 업데이트.”

“의심도 많으시지.”

“의심? 컴컴한 우주를 떠다니며 지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없던 의심도 생길 수밖에 없을걸? 난 아직도 가끔씩 의심하거든.”

우주에서도 선명하게 내려다보이는 제로 산맥.

어디 선명하게 보인다 뿐인가?

그 최고봉은 우주에서도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높게 솟아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꼭대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어나더 스페이스의 관측 렌즈를 통해 선명히 촬영되어야 하거늘.

“이게 몰래카메라는 아닐까, 하고 말이야. 우리가 렌즈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은 다 조작된 영상이 아닐까, 싶다는 거지. 봐봐,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주에 구름이라니.”

우주에 안개라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덤.

마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사내는 장난스럽게 화를 냈다.

“제기랄! 마법이란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만 않았어도 절대 인정하지 못했을 텐데. 빌어먹게도, 보고 말았어. 마법을 믿는 과학자라니.”

한탄에 여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간만에 활기차신 모습이 보기 좋으시네요. 뭐 레이먼 션이 빌어먹을 놈이긴 해도 여태까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업데이트 내역이 없다면 없다는 것.

내역에 떠오르지 않는 균열이야 문제없다.

기껏해야 적정 레벨 200 이하.

레벨 업에 열이 오른 플레이어들 선에서 금세 클리어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좋은 날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구요.”

“윽. 뭔데.”

“찜질팩이요.”

“이 뜨거운 걸 왜 얼굴에 덮어?”

“제가 대신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라고.”

사내는 투덜거리면서도 어윽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긴 하네.

그렇게…….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짧은 단잠에 빠진 순간이었다.

“서, 선배?”

“응?”

“저기, 저게……!”

“!”

툭─

반사적으로 부릅뜬 눈.

바닥에 떨어진 찜질팩.

다급한 목소리에 직감할 수 있었다.

터졌구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

긴급 업데이트.

그로 인한 균열의 출현.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역할은 단, 일각이라도.

신속하게 지구에 균열의 위치를 포착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마법.”

그러나 과학을 기반으로 우주에 떠오른 어나더 스페이스 호가 아르카나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때문에 완전 자동화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이면서도 마법을 목격한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야만 했다.

“어디냐.”

언제 눈을 감았느냐는 것처럼.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사내의 시선이 계기판을 향했다.

그런데.

“……뭐야?”

포착되는 이상 징후 여전히 없음─

사내는 생각했다.

……진짜 몰래카메라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깨달았다.

“거기가 아니라 저, 저기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지구.

그랬다.

제로 산맥 최정상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블랙홀……?!”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격하게.

균열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건 마치 힘으로, 억지로 공간을 찢는 듯한 광경.

“……!!”

그렇다.

두 사람은 비슷한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의 출현에서.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블랙홀처럼 일그러진 공간.

공간을 향해 활강하는 거대한 형체.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지구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AAU 어나더 스페이스 호.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이상 징후 포착. 드래곤이 공간을 찢고……. 아니, 차원을 찢고 활강하기 시작했다!!”

.

.

.

[마안(魔眼)의 망원경].

망원경이 비추는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

나는 더없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아니, 행운이 대폭 상승했다면서?

드래곤, 엘프, 초월자, 그리고 마왕까지.

그냥 행운이 아니라.

행운의 편지였냐?

이게 갑자기 무슨 난장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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