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04화 (204/489)

◈ 204화. 이것이 나의 길이다

어쩐지.

절대영도에 얼어붙은 용암이 지나치게 화려하다 싶었다.

이걸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바다처럼 물결치던 붉은 용암이 색을 유지한 채.

그대로 얼어붙은 풍경.

그러니까 그랑펠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루비의 바다와 같았으니.

상태창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촉이 왔다는 거지.

또각─

빙판 위를 걷는 거나 마찬가지.

더욱더 또렷한 구두 소리와 함께.

나는 얼어붙은 용암 위를 건넜다.

그나저나 간이 커도 상당히 크구나, 그랑펠.

‘무섭지도 않냐.’

절대영도가 기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절대 녹아내릴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위를 걷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

마탑 계단과는 또 다른 공포감이다, 이거.

‘우선 뭐가 보일 때까진 걸어야 해.’

순간이동, 포탈을 발현하기 위해선 목적지의 좌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암의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은 포탈을 발현할 수 없다는 뜻.

계속 아래를 내려다봐서 더 무서운 건가.

일단, 시선부터 옮겨보자.

마침 적절하게 떠오른 메시지가 있었다.

[심미 : 上]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본다.

확실하게 심미가 상승해 있었다.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여명 세트를 입었는데.

재킷, 하나 정도는 입지 않고 걸쳤더라고 하더라도.

심미가 상승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겠지.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런데, 上을 찍었다고 추가 효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엇보다 나는 심미를 발동하지 않았다.

효과가 저절로 발동된 것.

‘설마, 패시브 효과라도 추가된 건가?’

그래서 그 효과란 게 뭔데?

시뻘건 용암에 대한 공포감도 잊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는데……. 어째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뭐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다시금 되새겨 보는 심미의 효과.

마법에 있어서 심미는 복사, 붙여넣기 신공과도 같았다.

마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복잡한 간섭 과정을.

극소량의 마력으로 대체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최근 사용 빈도가 뜸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지.’

과거, 마력에 허덕대던 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단순히 스탯만 놓고 따지자면 아직도 마르셀로는 물론.

대부분의 선임 마법사들보다도 마력량이 뒤처질 테지만.

‘비약초도 모자라서 영약으로 기름칠.’

결정적으로.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무지막지한 버프가 상시 발동 중인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서클의 경지에 올라, 고위 마법을 발현하면서도 마력에 허덕대지 않을 수 있었단 거지.

‘굳이 심미까지 발동할 필요가 없었어.’

마력에 쩔쩔맬 시기는 지났으니까.

그래서 추가 효과 개방에 조금 기대했건만.

어째…….

‘영 갈피가 안 잡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령 내 눈이 놓쳤다고 한들.

양쪽 어깨에 눈을 대신할 든든한 분신들이 있었으니까.

“주군, 길이 보입니다.”

……길이 보여?

긍지의 길.

이딴 소리 하면 진짜 소환 해제해 버린다, 디엔드. 너.

나는 궁시렁을 삼키고 시선을 옮겼다.

그랬더니, 정말 길이 보였다.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형태로.

“찰나의 시간에 이리도 고아한 길을 발현하시다니. 주군에 비하면 저, 하이엘의 심미는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뭔데, 저 화려한 대로(大路)는?!

솟구쳐 오른 용암의 형태가 마치 조각과도 같았다.

비유하자면 개선문 같달까?

그래, 조각상처럼 복잡한 마법이 발현되는 것.

그것도 심미의 특징 중 하나였지.

하지만 문제는 그 스케일이다.

‘크다.’

역시나 말도 안 되게 웅장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에 [심미]의 뛰어난 마력 효율을 고려하더라도.

마력이 왕창 빠져나가진 않았을까.

의심해 볼 정도로.

그런데.

‘……추가 마력 소모가 없다고?’

그대로였다.

기이, 절대영도를 발현할 때 소모된 마력 말고 추가로 소모된 마력은 없었다. 그러니까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디엔드의 말과는 다르게.

“이것이야말로 주군께서 열어주신 길……!!”

내가 나의 의지로 발현한 길이 아니란 거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여는 것.

그게 바로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구나?

*

유스라 왕국.

탐험가 연맹 본대.

연맹 탐험가들은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되겠군, 아론.”

“내가 너랑 경쟁? 주제를 알아라, 롬버스.”

“하긴 내 주제가 그대보다 고상하긴 하지.”

베테랑 탐험가 아론과 롬버스는 물론.

현역 탐험가로 복귀한 연맹장, 파비앙까지.

플레이어, 아르카나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긴장감 속에서 자신을 정비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엔 박휘강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저희 탐험가들이 밥값을 할 때가 온 거죠!”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이야말로.

탐험가들이 긍지를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간만에 활기찬 분위기에 파비앙도 조금은 몸이 달아올랐다.

“엄밀히 따지자면 복귀 후 첫 행보도 아닌데 말이야.”

텟퍼른 미궁 균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파비앙은 호열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그래 봤자 미궁이라 생각하고 자신만만했거늘.

호열이 아니었다면 공략은커녕.

미궁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첫걸음처럼 느껴지는 건가.”

그러나 제로 산맥에서는 달라야만 한다.

그야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은 텟퍼른 미궁처럼 미지의 금역(禁域)이 아니었으니까. 파비앙, 자신만 하더라도 공략을 한 동굴이 십여 개는 되지 않았던가?

파비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이야 전부 바다에 잠겨버렸을 테지만.”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에게도 제로 산맥 중턱은 밟아보지 못한 장소였다. 그러나 산맥 저지대의 동굴을 탐험하며 나름대로 특징을 파악했던바.

파비방이 탐험가들 앞에 섰다.

“제로 산맥 출정에 앞서 그대들에게 전하겠네.”

그 목소리에 집중되는 탐험가들의 시선.

“그대들도 알다시피 십만 개의 동굴에는 각자 고유한 규칙이 존재하네. 모험가들의 언어로는 필드 타입이 다르다고 하는 거겠지. 어떤가, 내 말이 맞나?”

파비앙의 물음에 박휘강이 넙죽 대답했다.

“넵, 정확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파비앙이 말을 이었다.

“던전, 미궁, 전장……. 어떤 동굴에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지는 진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 기대감이 탐험의 묘미라고는 하나, 우리는 탐험가들은 더 이상 묘미만을 위해 탐험에 매달릴 수 없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비장감이 감도는 건 덤이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각자의 세계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전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비전투 클래스인 탐험가가 총력전에서 활약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때문에 아쉬움을 삼키던 탐험가들이 아니던가?

‘낯선 균열과는 달라.’

‘던전은 내 전문분야라고.’

‘미궁 공략 콘텐츠로 20만 구독자를 끌어모은 나다.’

갈증을 해갈할 기회가 왔다는 것.

파비앙도 모두와 같은 심정이었다.

피식,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탐험가로서 편견에 한 방 먹여줘야 하는 순간이겠지. 그래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답지 않은 짓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네. 그러니 다들 이제부터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하게나.”

앙숙인 아론과 롬버스만 봐도 알 수 있듯.

탐험가들은 서로가 경쟁자였다.

아르카나 대륙이 광활하다고는 해도.

결국 탐험 장소는 유한한 법.

그 때문에 자신의 탐험 요령을 다른 탐험가에게 떠들어대지 않았다.

탐험가들의 공생을 위해 설립된 연맹에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오가는 일이 없었다.

일종의 금기.

“첫째로, 필드에는 알려지지 않는 길이 존재하네.”

그러나 파비앙은 연맹장으로서 금기를 깼다.

“……!!!”

탐험가들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파비앙은 전설의 탐험가로서 쌓아온 경험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잠자코 듣고 있던 아론과 롬버스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새로운 개념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길이라니요……?”

“던전이나 미궁엔 수많은 갈림길이 존재하지만……. 결국, 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게 탐험의 상식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상식으로는 그러네.”

알려지지 않은 길.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수많은 필드를 공략해 온 자신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길을 목격한 건 단 한 번에 불과했으니까.

박휘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장소만 특별했던 건 아닐까요?”

“아니.”

“!”

얼마나 단호한 대답인지.

박휘강의 입에선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 번밖에 목격하지 못한 이유? 단지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네. 하지만 보상은 확실했지.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보다 값진 전리품을 거머쥐었으니까.”

……무엇보다 값진 전리품?

“바로 진실을.”

거기까지 말했어도 감을 잡지 못하는 탐험가들.

파비앙은 또 한 번 안도했다.

역시, 현역으로 복귀하길 잘했군.

이런 햇병아리들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지.

그러곤 너그럽게 물었다.

“다들 생각해 봤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파비앙 연맹장님?”

“아론, 롬버스. 그대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

“텟퍼른 미궁의 깨워선 안 될 존재.”

아론과 롬버스는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거대한 동공을.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두 탐험가는 흠칫했다.

“녀석이 미궁의 암벽 속에 파묻혀 있던 이유를.”

“!!!”

그제야 파비앙이 말한 진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던전과 미궁, 온갖 필드엔 몬스터가 존재한다.

파비앙은 공략을 거듭해 오며 위화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어째서 그 심장부에는 언제나 몬스터가 존재하는 것인가를.

‘그거야 당연히 게임이니까…….’

“……!!!”

생각하던 플레이어들은 흠칫했다.

아니,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다.

박휘강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전부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연맹장님?”

텟퍼른 미궁.

당시 그곳엔 박휘강도 있었다.

그 또한 전부 목격했다는 것이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를.

그들과 깨워선 안 될 존재.

또 텟퍼른에 얽힌 사연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정답이네, 모험가여. 여태껏 수많은 던전과 미궁, 온갖 필드를 공략해 온 나지만.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던 탐험은 고작 단 한 번에 불과했지.”

“……설마, 그 한 번이라는 게?”

“설마가 맞네. 알려지지 않은 길에 진실이 있었네.”

진실이라니.

파비앙은 대체 무엇을 목격한 것인가?

쏟아지는 눈빛 속에서.

파비앙의 눈이 빛났다.

“진정한 의미의 공략에 도달했다는 것이네.”

*

사이렌.

언제부터일까.

인어(人魚)의 마모된 기억은 언제나 푸른 바다를 향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다를.

정말로 우스운 일이지?

부글부글.

솟아오른 암벽 위에서 붉은 용암을 바라본다.

존재할 리 없는 기억 속에서.

사이렌은 바다를 떠올렸다.

바다는 이렇게 뜨겁지 않았지.

또 무의미하게 넓지도 않았지.

용암의 바다가 아닌 진짜 바다에는.

자신 말고도 다른 생명체들이 헤엄치고는 했으니까.

용암 말고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시간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다를 상상할 때만큼은 마음이 평온해졌다.

“!”

그러나 종종 평온은 깨지곤 했다.

정확하게는.

누군가가 용암의 바다에 발을 들인 순간.

어째서인가.

사이렌은 자신도 모르게 흉포해지고는 했으니까.

어째서일까.

어째서 나는.

뜨겁기만 한 이 공간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걸까.

그것은 저주와도 같았다.

사이렌은 진심으로 바랐다.

누구라도 좋았다.

죽을 수 없어 살아있는 자신의 숨통을 누구라도 끊어주기를.

그런 사이렌의 귓가에 문득,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무언가를 단호하게 내딛는 소리가.

이상한 일이지.

가본 적이 없는 바다에서도.

용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소리였다.

바다든 용암이든 내디딜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지.

멀리서 다가오는 형체.

한데 사내는 분명 용암을 걷고 있었다.

풍덩─

본심과 관계없이 사이렌은 암벽 위에서 용암으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 각인된 사명은 오직 하나.

용암의 바다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

더욱더 흉포하게 날뛰어야만.

그래야만 누군가 자신을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

피부와 비늘이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워야 할 용암이 뜨겁지 않았다.

아니, 뜨겁지 않은 걸 넘어서 차디찼다.

“……!”

마치 상상 속에서 염원하던.

바다를 헤엄치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

.

.

심미(審美).

살필 심.

아름다울 미.

아름다움을 살펴서 찾는다는 뜻이다.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이 화려하든, 험하든, 복잡하든 상관없다.

그랑펠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달하고 말 테니까.

지금처럼.

[퀘스트 : 용암의 사이렌]

수천 개의 갈림길 중.

단 하나의 길을 목격한 자여.

오직 그대만이 사이렌을 구원할 수 있다.

─용암의 사이렌과 조우하라. (성공)

─용암의 사이렌을 처치하라. (실패)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진행 중)

물론, 그 고집을 감당해야 하는 나는 상당히 귀찮겠지.

그럼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용암을 바닷물처럼 냉각시키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

.

제로 산맥 최정상, 용의 둥지.

“…….”

노룡(老龍)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산맥의 심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

사이렌이로군.

“…….”

노룡은 생각을 곱씹었다.

과연, 나의 어머니시여.

세계수시여, 당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내, 노룡이 거대한 육체를 일으키며 말한다.

“영겁의 잠에서 깨어나라, 동족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노라.

“여명이 도래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