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너도 긍지냐?
거대 연합.
물과 기름은 나름대로 섞여가고 있었다.
[명검을 문 늑대개].
65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답게 그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스슥─
늑대개가 숲 사이를 누비자.
우지끈─
주변의 고목들이 순식간에 쓰러져 나갔다.
둥실─
허공에 뜬 드론.
전황을 지켜보던 남철민이 말했다.
“영리하네. 전장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고 있는데?”
괜히 혼자만 검을 입에 문 게 아니라는 건가.
늑대개는 야전사령관이라도 된 것처럼.
전장을 자신과 동족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히사기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늑대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개답지 않게 거치네요.”
바뀐 지형 탓에 행동이 제약된 상황.
하지만 말했다시피.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던 물과 기름.
가온과 이나즈마는 서서히 융화되어 갔다.
남태민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착각하고 있구나. 똥개들.”
“……?”
“하긴 늑대개가, 진짜 야성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
야만전사.
바바리안, 남태민은 히사기에게 선언했다.
“저 검을 물고 있는 놈은 내가 맡는다. 원래 짐승이란 게 우두머리만 조지면 사기가 꺾이는 법이거든. 그때부터 한 마리씩, 알아들었지?”
거목들이 쓰러지며 만들어진 지형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민첩하다고 하더라도 두 발로 걷는 이상.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러나 남태민에겐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광폭화].
고유 스킬을 발동함과 동시에.
마치 네 발로 뛰는 것처럼.
몸을 숙인 채 뛰쳐나가는 남태민.
파바박!
과연, 야성을 그대로 간직한 짐승과도 가까운 움직임.
그 박력에 늑대개들조차 놀라서 깨갱거릴 정도였다.
히사기가 중얼거렸다.
“정말, 개 같으시군요.”
욕도, 중의적 표현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감상.
남태민은 정말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개라도 된 것처럼.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갔으니까.
히사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창사.
슈슈슉!
창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리한 마력 줄기.
히사기의 창이 허공을 가르자 길목을 가로막았던 거목들이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히사기의 지휘에 따라 거대 연합의 플레이어들이 늑대개 무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태민과 히사기.
그리고 길드원.
각자는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아주 척척 맞으셔들.”
뭐, 라이벌?
호열 씨만 아니었어도 상종도 안 해?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구라를 쳐도 그럴싸하게 치던가.”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온과 이나즈마.
길드원 전원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악연으로 대립하던 시절.
서로서로 약점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경험 때문이었지만. 제삼자, 그것도 유럽인의 시선으로 한일 감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버서커 길드원들이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가끔은 소외감 든다니까, 언니?”
“미친, 소외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물론, 언니는 그런 거 못 느끼겠지만.”
“흥.”
광전사는 고독할수록 강해지는 클래스다.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전투가 계속될수록 전투력이 상승하는 클래스였으니까. 어차피 그런 광전사의 호흡에 페이스를 맞출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레오니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외로우면 너도 두 개씩 들던가.”
어쩌면 그래서 쌍검에 이끌렸던 건지도 모르지.
이내, 제각각 날뛰기 시작하는 거대 연합.
그 광경에 흠칫한 건 다름 아닌 세컨드 썬이었다.
간부, 재커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슈, 슈레이그. 우리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슈레이그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세컨드 썬 또한 정식으로 성전에 참전했던바.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연합과 호흡을 맞춰볼 생각에 그들의 뒤를 쫓았거늘.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재커리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저걸?”
각자의 개성이 강해도 너무 강하지 않은가!
세컨드 썬.
자신들부터가 최상위권 길드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전장에 체계적인 약속이나 호흡 따윈 없다는 것을.
하지만 슈레이그에게는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저게 최선일지도.”
가온과 이나즈마, 버서커까지.
셋은 상위 길드 중에서도 특색이 뚜렷한 길드였다.
특히나 유럽의 버서커를 제외하면.
가온과 이나즈마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속한 두 길드가 아니던가.
자신의 방식으로 랭커를 차지한 만큼.
고유의 스타일은 쉽게 변할 수 없겠지.
“무규칙 속의 규칙이라는 건가.”
모순과도 같은 말.
그게 정말 실현이 가능한 것인가.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
그러나 슈레이그는 웃어넘겼다.
“뭐, 긍지라면 그걸 가능케 할지도 모르지.”
과연, 그런 슈레이그의 생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슈레이그가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에게 합류 의사를 전했다.
이야기는 속전속결이었다.
“긍지?”
“물론, 긍지입니다.”
“호흡을 맞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레오니, 한 사람만 빼고.
“???”
뭔데, 저것들.
자기들만 아는 암호야, 뭔데.
레오니는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었건만.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다그닥!
알렉산더의 말발굽 소리였다.
히히힝!
샤이닝을 포함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외면하듯.
스쳐 지나온 스칼이.
마침내 거대 연합 앞에서 멈춰 선 것이었다.
레오니는 순간 당황했다.
‘얜 또 뭐냐.’
그렇지 않아도 긍지문답에 정신이 아득해졌던 참.
그런데.
난데없이 스칼이라니.
‘실물은 처음인데.’
레오니와 버서커는 최근 들어 크게 성장한 플레이어, 길드였다.
두문불출하는 랭킹 1위, 스칼과는 접점이 없는 게 당연한 일.
그러나 나머지 세 사람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괴물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한 건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스칼이 최강자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히든 클래스빨이든, 뭐든, 어떻게든.’
그러나 대격변 이후.
호열의 등장 이전까지.
최강에서 내려오지 않는 스칼을 보고 남태민을 비롯한 랭커들의 생각은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쌓인 경험 덕분이었다.
‘괴물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겠죠.’
목숨을 걸고 진입해야 하는 균열이다.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길드원들과 함께 진입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균열이란 말이다. 하지만 스칼에겐 몸을 담은 길드 따윈 없었다.
그렇다고 스칼에게 동료라 부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느냐고 묻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스칼은 모습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 적었으니까.
그런데.
“크흠.”
그 스칼이 자신들의 앞에 멈춰 서서는.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 목적이 마냥 호의적이라는 법은 없는 법.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채.
스칼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스칼이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체, 긍지가 무엇입니까?”
입이 열리자 탁─ 하고.
풀려버리는 긴장의 끈.
레오니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진짜, 진심으로, 너마저도 긍지라고?
*
“긍지의 행보에 방해가 되는군.”
……오해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디엔드가 뱉은 헛소리란 말이다.
디엔드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저걸 그냥 아르카나 대륙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뭐, 백번 양보해서 틀린 말까지는 아니네.
실제로 행보에 방해되긴 했으니까.
‘열기가 장난이 아니야.’
[용암의 사이렌]이라는 던전명에 걸맞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새빨간 용암의 바다였으니까. 근데, 그게 대체 긍지랑 무슨 상관이냐고!
‘됐다. 말하면 나만 피곤해진다.’
급하게 디엔드를 외면한 나는 용암의 바다를 둘러봤다.
과연, 보통 동굴이 아니라는 비로소 실감이 난다.
용암의 호수도 아니고.
바다라고 비유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정말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분한 것을 품고 있군.”
……그나마 주어라도 생략해 줘서 고맙다, 그랑펠.
하다 하다 산맥에게 말을 거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진 않겠구나.
어쨌든.
시기가 적절하게 새로운 장비를 갖춰 입게 돼서 다행이다.
마법부여로 화염 속성 친화력을 떡칠하지 않아도 용암의 열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에픽 등급의 위용이라는 거겠지.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기본적인 방어력과 속성 친화력은 일정 수준 이상 겸비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어째 길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장소도 아니고 던전에선 당황할 일도 아니다.
다른 던전이 그랬던 것처럼.
용암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장치가 숨겨져 있겠지.
‘괜히 던전 공략에 탐험가가 필수인 게 아니네.’
내 눈으로 벽면이라든가, 발밑이라든가, 둘러본다고 한들 뭐가 들어올 리가 없겠고……. 결국, 내 방식대로 용암의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건가.
“제 어둠은 용암의 강렬한 열기조차도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주군.”
디엔드가 먼저 입을 열고.
“불꽃을 먹고 자라는 식물에 관해서는 저보다도 주군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시겠지요? 혹시라도 제 축복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질 새라 하이엘이 고아하게 말을 잇는다.
고유 정령인 하이엘.
그리고 상위 정령조차 긴장하게 하는 디엔드다.
이 정도의 용암쯤이야, 식은 죽으로 만들 수 있겠지.
든든하구나.
든든해.
근데, 든든한 걸 떠나서 얘들아…….
너희가 양쪽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나, 조금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말끝마다 주군, 주군……!’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면 어떡하니, 진짜.
‘내가 이래서 둘 다 소환하는 걸 꺼린 건데.’
그럼에도 하이엘과 디엔드.
두 정령을 소환한 이유는 간단했다.
왜긴 왜야, 정령마법에 조금 더 친숙해지기 위해서지.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정령마법 또한 마법의 한 갈래.
서클로 상승한 발현력을 제대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만큼이나 학구열이 강한 누군가는 묻겠지.
정령의 {자연} 능력.
그리고 『마법』은 다른 개념이 아니었느냐고.
예리한 궁금증이다.
그랑펠이 칭찬과 함께 녹차 티백을 부상으로 내어줘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질문.
그렇다, 정령마법은 사실상 정령의 {자연} 능력을 보조하는 마법에 불과했으니까.
‘페이얀 선임의 마법도 그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기이』}가 아니고서야 극복할 수 없는 마법의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나와 그랑펠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만 한다.
깨닫게 됐으니까.
어쩌면 기이야말로.
거품을 완전히 걷어내더라도.
내가 다른 이들보다 앞서는 유일한 분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기이에 소홀히 할 것 같냐.’
무엇보다 상위 마왕, 가미긴에게도 먹혀들었던 기이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여러 개념의 기이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 듣고 있습니다.”
“존명, 나의 한없이 깊은 어둠이시여.”
……무슨 대답이 이렇게 길어.
어째 대답 때문에 벌써 힘을 빼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용암 따위에 아까운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둘 다.
“힘을 비축해 두거라.”
“?”
“용암 따위에 그대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른 플레이어나 아르카나인은 몰라도.
이래 봬도 기이의 선구자인 내게 용암 따위야.
설령 바다처럼 넘실거린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마침 새 장비의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
아니, 그렇다고 감격한 표정을 지을 것까진 없거든?
양쪽에서 쏟아지는 부담스런 눈빛 속에서.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
흩날리는 재킷.
마력에 감응해 일렁이는 백금의 자수들.
그런 내가 발현한 것은 [『기이, 절대영도』].
효과는 굉장했다.
부글거리는 형태와 빛을 유지한 채.
급속도로 얼어붙어 버린 용암.
절대영도가 만들어 낸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니.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심미 : 上]
아무래도 심미가 한 단계 상승한 것 같다고.
그러나 기쁨에 솔직하지 못한 이놈의 주둥이.
나는 언제나처럼 지껄이고야 말았다.
“과한 열기는 사양하지. 찻물을 데울 필요는 없으니.”
이런 상황에 찬물에도 잘 우러나는.
신상 녹차를 구매했다고 자랑하지 마라, 그랑펠.
됐다, 애써 걸음을 옮기는데…….
“?”
문득,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잠깐, 추가 효과 개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