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다만 그 전에 (2)
그랑펠의 심미안을 걱정할 게 아니었다.
나, 이호열의 수치사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 진짜로 뭐가 이렇게 화려해?!
외관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이걸 재킷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어디 중세시대 귀족……. 아니, 귀족도 웬만한 귀족은 넘보지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만듦새구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의 원단.
그 오묘한 빛깔을 그랑펠식으로 표현하자면.
“동트기 직전의 하늘빛인가.”
시각적인 표현 한번 죽여주는구나.
두 번 표현하다가는 나까지 죽이겠어, 아주.
‘어쨌든.’
그 원단 위를 수놓은 건.
딱 봐도 무진장 비싸 보이는 은빛의 자수였다.
목 부분의 카라부터 라펠까지.
이어진 자수의 문양이 낯뜨거울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양쪽 어깨에 견장들은 또 뭐냐.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게 흔들릴 것 같은 모양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들여다보는데……. 이거 심지어 보통 은도 아닌 것 같은데?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
아르카나 대륙,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덕분에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력의 백금]이다.’
마력의 백금.
광맥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물량이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귀하신 몸.
당연하게도 그 효과 또한 일반적인 광물과 비교할 게 아니거늘.
그런 마력의 백금을 고작 재킷 하나에 얼마나 때려 박은 거야, 이게? 양쪽 어깨의 견장만 하더라도 그 무게가 몇십 돈은 족히 나갈 것 같은데.
베스트에, 벨트에, 바지에 소모된 무게까지 고려한다면…….
정말, 백금괴 단위로 마력의 백금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군.”
의복을 대할 때만큼은 한없이 진심.
까다로운 그랑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월스와일을 비롯해서 다들 엄청 고생했겠구나, 다들.
하이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군께서 흡족해하시니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 하이엘.
네가 여러모로 애를 쓴 것 때문에.
아니, 덕분에.
이런 방어구가 탄생한 거겠지.
어버이날 자식이 만든 카네이션을 받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건가.
그러니까 또 걸쳐볼 수밖에 없겠구나.
‘다만 그 전에.’
장비의 스펙도 확인해 보자.
혹시라도 착용 제한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떠오르는 정보창을 하나씩 살펴나갔다.
그런데, 잠깐만.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트라우저]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셔츠]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베스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벨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재킷]
세트 아이템이란 사실에 놀란 게 아니었다.
‘여명을 기다리는 자아아아?!’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그걸 보고 동트기 직전의 하늘빛이라고.
분명, 그랑펠은 그렇게 지껄였었지.
‘드워프들이 그런 감성을 가졌을 리가 없다.’
이건 그랑펠을 똑 빼닮은 감성의 소유자만 할 수 있는 작명.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건 한 사람.
아니, 한 정령뿐이었다.
디엔드, 너로구나.
나는 흘러나오려는 탄식을 꾹 틀어막았다.
‘……그래,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참아보자.
그저.
나만 조금 민망할 뿐이다, 호열아.
그런 의미에서는 성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착용하는 거라고, 정신 승리가 필요하다.
나는 차례대로 정보창을 살폈다.
“!”
그리고 흠칫했다.
[등급 : 에픽]
다섯 개의 장비, 모두가 에픽 등급이었다.
내가 [전설] 등급의 귀철을 습득했다고 한들.
에픽 아이템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마왕의 전리품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는 소리……!
“과연.”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아니, 투자된 재료의 가치와 그걸 제련한 드워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에픽 등급은 적절한 판정일지도 모른다.
[제한 : Lv.500 / 높은 수준의 명성]
일단, 다행이다.
레벨 제한, 500레벨.
[높은 수준의 명성]이라는 추가 제한이 걸려있기는 했다만.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명성 정도야, 칠죄종 탐욕을 쓰러트렸을 때부터 충족시켰으니까.
내가 이렇게 성장했다.
속으로 우쭐거리기도 잠깐.
정보창과 별개로.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장인의 손재주로 착용 제한이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적용된 장인의 손재주 효과 : - Lv.300]
……아니, 성장했다는 말은 취소.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장인의 손재주 효과가 아니었다면 레벨 제한이 무려 800레벨. 드워프가 아니었다면 바짓가랑이에 다리 한 짝 넣어볼 수도 없었을 뻔했잖아, 이거?
[효과 : 세트 아이템 착용 시, 발현]
[설명 :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를 위해 제작된 장비. 명품, 수작, 대작.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고귀함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았다.]
설명에도 나와 있듯.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
그러니까 나만을 위해서 만든 장비라고 하니 고맙기는 한데…….
어째 효과가 약간 특이하다.
‘에픽 아이템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왕의 전리품도 그렇고.
에픽 등급부터는 그 효과가 확실히 고유했다.
마안의 망원경이나 지휘봉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물론.
아르나카인들조차 의문스러워 할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효과는 성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장비 아이템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은 따로 표시되지 않는다. 공격력과 방어력을 계산하고 수치화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
다만, 짐작은 할 수 있다.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착용 제한을 고려해도 특출난 수준이라면, 설명에서든 효과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플레이어가 그 성능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줬으니까.
‘하여튼 등급 값을 한다니까?’
물론, 에픽템이라 그런가.
설명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심상치 않았지만.
걱정할 건 아니다.
착용해 보면 알게 되지 않겠어?
‘마침 테스트 장소도 있고.’
본래 장비의 착용 제한은 800레벨로, 현재 내가 진입한 [던전 : 용암의 사이렌]의 적정 레벨과 같았다. 이보다 적절한 상황도 없다는 말씀.
둥실─
마력으로 허공에 옷가지들을 띄우고 환복한다.
뜬금없이 동굴 입구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만, 절도와 자신감 넘치는 동작만큼은 어디 명품관 탈의실에서 갈아입는 것처럼 우아했으니.
남은 건 이제 재킷뿐이다.
옷가지 중에서도 유달리 화려한 재킷.
정말로 아뿔싸, 소리가 절로 나온다.
‘뭔 파란 보석까지 달렸어. 진짜.’
훈장이야, 뭐야.
그렇게 재킷에 손을 뻗는데.
잠깐만,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 정보창을 띄웠으니까. 그중에서도 유달리 외면하고 싶었던 재킷의 정보 확인을 마지막까지 미룬 게 화근이었다.
[제한 : Lv.700]
장인의 손재주 효과를 적용받고도 700레벨.
그렇다는 건 원래는 일천(一千) 레벨짜리 아이템이라는 거잖아?
어째 내가 심각하게 휘황찬란하다 싶었다……!
나는 슬쩍 하이엘을 바라봤다.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럽구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하다.
앞으로 100레벨이나 남았다니.
700레벨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세트 효과도 확인할 수 없다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역시나 겉으로 드러나는 법은 없었으니.
촤락─
나는 뻔뻔하게도 재킷을 집었다.
그러고는 어깨 위에 걸쳤다.
그렇다.
이것이 현시점에서의 나의 최선이다.
왜냐고?
이놈의 레벨 때문에.
재킷에 팔 한 짝 넣어볼 수조차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인가.’
마력으로 어깨에 재킷을 자석처럼 붙여놓을 수 있다는 게.
그런 나의 모습에 하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하이엘, 그런 착용법은 차마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나의 몰골을 한번 살펴본다.
다른 플레이어의 장비들도 만만치 않게 판타지적이니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더라도. 어깨에 재킷을 걸치는 것만큼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받아들일 수 없다면.’
좋아.
빠르게 700레벨에 도달.
제한을 충족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레벨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레벨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심오한 모순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또각─
아차.
말이 나온 김에.
이놈의 또각 구두도 어떻게 바꿔 신든가 해야지…….
*
제로 산맥.
광활한 신대륙에서는 사냥이 한창이었다.
균열에서도 사냥은 계속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뭘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입장할 수 있는 균열과는 달랐다.
지역으로 추가된 제로 산맥.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은 현대의 화기에 무방비했으니까.
탕─!!
아르카나 대륙에선 들릴 수 없는 총성.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 류오쥔춘은 외쳤다.
“전군 전진!”
이유 없이 항공모함 편대를 이끌고 온 게 아니다.
제로 산맥이 균열이 아닌 지역으로 추가된 시점.
류오쥔춘은 모든 계획을 끝마쳤다.
대격변의 시대가 도래한 뒤.
빛이 바랬던 조국의 군사력을 활용하겠노라고.
[군주]의 클래스 스킬 발동.
류오쥔춘의 눈이 빠르게 전황을 살핀다.
계속되는 사냥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플레이어들.
류오쥔춘이 그들의 후방으로 병력을 투입했다.
탕!
투두두!
탕탕!
대격변 초창기.
세계는 현실을 범람한 몬스터에게 대응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했다.
과연, 인류를 지탱했던 [과학]의 힘은 위대했다.
몬스터라고 한들.
살상력을 극대화한 대 몬스터용 신무기를 견뎌내기는 어려웠던 것.
그러나 균열에선 이야기가 달라졌다.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뿐.
플레이어 중 그런 신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이 극소수에 불과할뿐더러.
신무기로 몬스터를 사냥해 봤자 막대한 경험치 손해는 물론, 스킬 숙련도조차 제대로 올릴 수가 없었으니까.
천하통일의 간부, 유지오.
“영락없이 고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가 감격한 듯 말을 이었다.
“역시, 류 군주님이십니다. 그런 애물단지들을 이런 방식으로 활용하실 줄은 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로 산맥의 몬스터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탄약, 수백 발을 맞고도.
최후에 최후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물량에 장사는 없다.
쿠궁.
쿵.
쿠구궁.
곳곳에서 쓰러지는 산맥의 맹수들.
그러자 류오쥔춘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투입된 군병력은 일반인이 아닌 전원 플레이어였다.
천하통일에 입문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조국의 저레벨 플레이어들.
류오쥔춘에게 그들을 육성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저들은 자신의 검과 방패조차 되지 못한 존재.
그저 디디고 나아갈 발판에 불과했으니까.
류오쥔춘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 오직 나만이 가능하다.’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던 다른 [군주]들은 모조리 도태됐다.
살아남은 건 플레이어들 위에서 군림하는 오직 자신뿐.
‘제로 산맥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시간문제다.’
524레벨.
비로소 같은 눈높이.
록스, 나는 너를 뛰어넘겠다.
스칼,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류오쥔춘의 레벨 업 소식은 실시간으로 록스에게도 전해졌다.
“아니. 이러다가 따라잡히는 거 아니야, 록스?”
드미트리에 호들갑에 록스는 웃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웃어?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 진심?”
“뭐, 총까지 가져와서 쏴대는데 어쩌겠어?”
말과는 반대로 록스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목격하고도 깨닫지 못했나, 류오쥔춘?’
호열과 검성의 결투.
결투에서 록스는 깨달았다.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호열이 플레이어에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마탑을 비롯한.
아르카나 대륙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주었는지도.
‘레벨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걸.’
록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류오쥔춘의 방향성은 잘못됐다고.
그렇기에 조급한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물론,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잠깐만, 록스?”
나무 위에서 주변을 정찰하던 카밀라가 흠칫했다.
“이거,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그건 카밀라에게 몇 안 되는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준 인물이었다.
흔치 않은 카밀라의 반응에 록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불청객이 누구인지를.
류오쥔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라이벌.
“스칼이군.”
정답이라는 듯.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산맥에 울렸다.
이내, 산맥 아래에서 스칼이.
황금빛 갈기를 흩날리는 그의 알렉산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칼의 등장을 마지막으로.
제로 산맥에 집결한 아르카나 공식 랭킹 1, 2, 3위.
카밀라가 찝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쟤 표정이 왜 저래? 화난 것 같은데, 록스?”
“!!”
무엇이 스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인가?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서.
점차 스칼이 가까워졌다.
.
.
.
스칼은 입안에서 되뇌었다.
“이호열.”
……아니지. 만남에 앞서서 격식과 예절부터.
“이보시게, 호열 경 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당사자가 듣는다면 기겁할 말을 잘도.
그런 스칼에게 록스는 물론.
샤이닝 길드 전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으니까.
다그닥!
알렉산더의 말발굽은 멈추지 않았다.
쌔앵!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스칼.
정적 속에서─
“……엥?”
드미트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